프랜차이즈 갓 498화
125장 3타자가 될 순 없지 (4)
황태진 부회장은 하수영하고 깊은 대화를 가져본 적은 없다.
아트락 부지를 넘길 때, 얼굴만 잠깐 봤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하수영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재미를 여러 번 봤다.
아트락 부지 복합센터 건설과 운영도 자신이 쥐고 있었고, 수영농장의 스톰벅스 생두 공급 계약 이후, 라면 사은품 행사 혜택도 받았다.
'받은 게 있으면 적어도 그만큼은 돌려주는 인물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 당시 하수영이었다면?
얄짤 없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했다.
인정 사정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농민들에게 베푸는 것을 보면 적어도 사람으로서의 의리는 강한 사람이다.'
매년 농민들에게 100억 원 이상을 지원하고, 쌀 매각 대금 수십조 원의 이자수익을 3년 동안이나 홍수 피해 농가에 지원한다.
또 수천억 원의 적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을 운영한다.
적어도 이 사람은 돈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재벌 2세인 자신의 눈에도 그게 보일 정도였으니.
그래서 황태진은 도박을 하기로 했다.
"제가 가진 마트 지분의 절반을 넘기겠습니다."
"네?"
"그 대신 제 자리를 보장해 주십시오."
황태진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그런 제안을 던졌다.
가장 중요한 카드를 초장부터 보여준 것이다.
간보기, 밀당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
하수영은 입을 다문 채 황태진 부회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길어지는 침묵에 스멀스멀 불안함을 느낄 무렵,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른 집안 경영권 싸움, 유산 다툼에는 별로 끼고 싶지 않습니다. 그거 얼마나 한다고요."
"저를 지지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거래, 좋습니다. 그럼 거래만 이야기하지요."
하수영은 느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보유 지분의 절반이니 20%겠네요? 가격은 1.2조 원으로 합시다."
자신이 불리한 상황임에도 괜찮은 조건이다.
어느 한쪽에 크게 기울지 않은 수준, 황태진은 역시 자신이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마트 경영권은 10년을 보장해드리죠."
"10년……."
황태진이 다소 머뭇거리자 하수영이 피식 웃었다.
"대차게 말아먹어도 10년은 무조건 보장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
"보증기한 이후에도 다른 분들보다는 훨씬 너그러운 기준을 적용할 겁니다. 그래도 지분 20%를 가진 '동업자'니까요."
"동업자라고 하셨습니까?"
"예, 전 동업자에게 많이 너그럽습니다. 웬만한 건 편의를 봐주고 있죠."
한 번 물꼬가 트이자 협상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황태진은 바로 그 자리에서 보유지분 40% 중 20%를 하수영한데 양도한다는 계약서까지 썼다.
[인수자는 매도자의 경영권을 10년 간 무조건 지지한다.]
든든한 특약 조항을 확인한 황태진은 한결 마음이 풀렸다.
"진작 의원님을 찾아올 걸 그랬습니다.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 알았다면요."
"아시겠지만 전 농장 외의 사업체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수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재벌 2세라고 싸가지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편견이었구나 하고,물론 진실은 조금 다르다.
하수영이 자신보다 윗급이라는 것을 인정했기에 이렇게 시원하게 굽힐 수 있는 것이었다.
가진 자일수록, 자기보다 더 가진 자 앞에서 쉽게 굽힐 수 있는 게 세상 이치다.
하우스플러스 김정준 상무는 줄곧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준 부회장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저 하수영이 부리는 직원이겠거니, 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경쟁업체 임원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표현을 더욱 주의했을 텐데.
황태준 부회장이 떠난 뒤.
김정준 상무는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뉴월드마트 지분 20%가 굴러들어오다니요."
"앉은 자리에서 받은 건 아니죠. 그만큼 수영농장이 잘된 덕분입니다. 하하."
"……."
"원래 농사라는 게 그래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일이 끝도 없고 언제 빛을 보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지금 할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야죠."
하수영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확물이 가득가득 맺힙니다. 그럼 뿌듯해요."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런 점이 기업 경영하고 달라요. 땅만큼 솔직한 게 없거든요. 제가 농사에 푹 빠진 이유죠."
"그렇습니까……."
적어도 하수영이 지닌 운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김정준 상무는 확실히 알았다.
"참, 저희 모그룹에서 뉴월드유통주주 위임장을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빠르게 처리하셨네요."
"우리가 뉴월드마트를 원한다고 하니 주주들이 흔쾌히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황희철 회장은 유통의 지분을 38%까지 경영권 방어에 쓸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 하우스플러스는 황희철의 백기사 지분을 공략했다. 시중에서 지분을 몰래 사모으기도 했다.
바로 뉴월드마트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고 하수영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황희철의 장남이 자기 지분의 절반을 들어 바치는 것을 볼 줄이야.
"황태진 부회장이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조금은…… 그렇습니다."
"황 부회장은 세자 자리에서 쫓겨 나게 생겼습니다. 그럼 외세를 끌어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유지해야지요. 역사적으로 흔히 있는 일입니다."
"……."
"그래도 전 하우스플러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뛰어다닐 줄 몰랐습니다. 뉴월드마트 인수까지 노리시다니, 의외였습니다.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임형필 사장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하수영은 화제를 살짝 바꾸었다.
"그나저나 라면 이벤트는 어때요? 잘 되어가나요?"
"물론입니다. 온오프를 가리지 않고 매출이 대폭 늘었습니다."
"사은품이 더 필요하다 싶으면 주저 말고 말씀하세요. 기왕 캠프파이어 시작했으니 후련할 때까지 화려하게 불태워야 할 거 아닙니까."
"하…… 하…… 알겠습니다."
"요즘에도 마트 앞에서 사람들이 줄 서고 그러나요?"
"아니요,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조금이라도 라면 사은품을 많이 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아침부터 줄을 길게 섰다.
혹시라도 재고 문제로 못 받을 것을 우려해서.
하지만 온라인으로 하루에 100개씩 주문해도 배송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
덕분에 줄서기 현상은 이제 사라졌다.
'하루에 100개씩 주문 잘만 되는 데, 뭐하러 고생하면서 줄을 서?'
이게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이다.
그리고 하우스플러스는 남은 수량을 실시간으로 공시했다.
19억 개라는 물량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아무리 사도 사도, 재고가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 소비자들은 라면을 가득 쌓아두고, 떨어진다 싶으면 마음 편하게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그럼 사은품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는 당분간 라면 매출은 없겠군요."
"그래도 넉넉잡아 두어 달도 안 돼서 다 소진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내 소비자들이 원래 월 6억개씩 소비해 온 게 있으니까요. 짧으면 한 달?"
"그렇군요."
김정준 상무는 이런저런 보고를 마치고 돌아갔다.
***
하수영은 짬이 난 틈을 타서 구의회 업무를 보다가 정서희의 연락을 받았다.
-수영 씨, 준비는 다 끝났어요.
"황세라 사장님이 의결 지분을 확보한 모양이군요."
-네, 위임장을 모두 확보했어요. 우리 편이 될 이사들도요. 이제 이사회 개최, 임시주총을 차근차근 진행하면 돼요.
"이사회 의결 내용은 어떻게 되죠?"
-당연히 황태진 부회장의 유통 이사 권한을 정지한다는 내용이에요. 그 이후에 주총을 열어 해임할 거예요.
황태진은 정확히 마트가 아니라 모기업인 유통의 이사였다.
유통 지분 5%, 마트 지분 40%로 마트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황태진 부회장의 마트 지분은 뺏을 수 없어요. 그러니 일단 유통에서 쫓아내야죠.
개인 지분은 당연히 뺏을 수 없으니.
-그러면 마트에 관해서 아무것도 못 해요. 황희철 회장도 황세라 손을 들어줄 거니까요.
유통에서 자리를 잃으면, 마트 지분 40%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주주로서 경영진을 귀찮게 하는 것 정도?
"유통의 새 주인은 누가 들어옵니까?"
-황세라 사장의 오른팔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분은 백화점을 경영해야 하니까.
하수영은 피식 웃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서희 씨, 상황이 조금 바뀐 거 같아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정서희의 목소리가 살짝 변했다.
하수영은 차분하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말했다.
바로 정서희가 알지 못하는 변수들.
그동안 하우스플러스가 물밑에서 움직였던 것.
후계자에서 쫓겨나느니, 차라리 적구에 투항해 자리를 지키려 하는 황태진의 선택.
-…….
다 듣고 난 정서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 다 그런 걸 준비했어요?
"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
"그런데 하우스플러스가 말도 없이 알아서 움직이고, 서희 씨는 미리 말하고 움직이고, 그 덕에 궁지에 몰린 황태진 부회장이 자기 지분을 들고 쪼르르 달려왔네요?"
-……내가 기가 막혀.
전화기 너머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러면 판을 전부 새로 짜야 하잖아요.
"그래서, 싫은 겁니까?"
-그럴 리가요. 수확할 판돈이 훨씬 커졌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게임에 임해야지요.
"황태진 부회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약속한 의리만큼은 지키고 싶네요. 저의 신뢰를 스스로 떨어뜨리기는 싫습니다."
-괜찮아요. 까짓거 제 신뢰를 대신 깎으면 되죠. 원래 비즈니스는 다 그래요.
***
뉴월드유통 이사 창범식.
그는 원래 황희철 회장을 따르는 이였고, 당연히 황 회장의 지시에 따라 황세라한테 붙었다.
오늘 이사회 안건은 황태진의 이사직 직무정지.
그 다음에 주총을 열어 최종적으로 유통 이사직 자체를 박탈할 것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이사회 의결을 진 행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이 황태진 부회장의 직무정지안건은 부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창범식 이사는 놀라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는 같은 팀(인 줄 알았던) 동료 이사들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며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중에는 황태진 부회장도 있었다.
황태진 부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사회를 슥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곧바로 다음 안건 표결을 시행합니다. 뉴월드유통이 보유한 뉴월드마트 지분 49% 중, 31%를 수영마트에 매각한다는 내용입니다."
뭐? 마트 지분을 매각한다고?
창범식 이사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척! 척! 척! 척! 척! 척! 척!
"그럼 본 안건은 과반으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유통의 마트 지분 31% 매각이 결정된 그 날.
황태진의 마트 지분 20%가 양도 되었다는 내용이 공시되었다.
이로써 수영마트는 뉴월드마트의 지분 51%를 지닌 대주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