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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갓-484화 (484/1,270)

프랜차이즈 갓 484화

122장 충격은 약한 곳부터 몰린다. (4)

S은행의 공문은 서해건설 천웅철사장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만나서 신신당부했을 때만 해도 허허 웃으며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해놓고는.

이제 와서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서해라테 재건축 컨소시엄은 조합원 분양 외에, 일반 분양자를 2,000명 이상은 받을 생각이었다.

당연히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 대출상품이 필요하고, 국내 최고의 은행인 S은행이 그것을 맡아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발을 빼버린다면, 가뜩이나 '재건축 정말 문제없는 겁니까?'라며 쪼아대는 설영서 부시장이 도끼눈을 뜨고 달려오지 않겠는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우리만 이렇게 죽도록 힘든 거냐고!"

"……."

"……."

절규에 가까운 천웅철 사장의 부르짖음에, 임원들은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불은 종로에 났는데 한강에서 화상을 입은 꼴이다.

반도체 시장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은 알겠는데, 왜 그 피해는 서해 건설이 고스란히 입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애초에 그룹 계열사 간 거래라고는 하지만 계약조건을 명확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서해전자에 대금 결제를 너무 루즈하게 배려해 준 것이 이렇게 독이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어음을 포함해서 '밀린' 건설대금을 모두 결제받는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 모든 것은 서해전자 때문에 서해건설이 큰 피해를 입을 거라는 우려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니.

지금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임원들은 없었다.

이제는 재건축 사업자에서 탈락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룹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서 오너 일가가 건설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게 문제였다.

'이미 그룹에서 건설은 한 번 팽당한 적이 있다.'

'서해물산의 건설 부문으로 흡수되었다가 서해건설로 다시 분리된 게 몇십 년 만인데……. 이제 와서 다시 물산으로 돌아갈 순 없다.'

***

윈텔과 ADM은 TSMC에 발주하기로 한 반도체 물량의 일부를 서진 파운드리에 돌리기로 했다.

테스트를 통해 서진파운드리의 공정능력을 확인한 덕분이다.

처음에는 마이크론이 하도 띄워주길래 서진파운드리의 지분을 우회해서 보유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시제품을 확인하자 그런 의심은 쏙 들어갔다.

"이미 구세대 모델이긴 하지만 이론상 가능한 최대치의 성능을 내고 있습니다. 시제품 모두가 오버클럭한계치까지 도달한 제품들입니다."

"마이크론이 괜히 50억 달러를 미리 밀어 넣고 라인을 전용한 게 아닙니다."

"우리도 라인 전용을 실시해야 합니다.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타사에 라인을 뺏기기라도 하면 골치 아픔니다."

"무엇보다 생산 단가가 TSMC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서진파운드리에서 제공한 견적서가 무엇보다 윈텔과 ADM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TSMC와 비교해도 너무 차이가 났다.

과연 이것만 받아서 파운드리 공장이 잘 굴러갈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서진파운드리를 찾은 윈텔 부사장은 일정 물량을 돌리면서 라인 전용을 요구했는데, 대답이 의외로 시큰둥했다.

"아직 본공장이 준비되지 않아서 라인 전용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아니, 하지만 마이크론은 이미 라인 전용을 하지 않았습니까?"

"마이크론이야 첫 고객이니까 그런 서비스를 베풀어드리는 게 어렵지 않았죠. 하지만 귀사가 얼마의 물량을 주문할지 알 수 없고, 또 막상 본공장의 가동률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라인 전용을 약속드릴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간을 보려고 일부러 과감하게 발을 빼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주문량이 우리의 생산 능력을 넘어설까 봐 그러는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가뜩이나 마진을 적게 남기고 있는데 위약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이면 저도 경영자로서 부담스럽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마진을 적게 남긴다는 말에 윈텔의 부사장은 대번에 수긍했다.

그들이 신생업체임에도 서진파운드리를 선택한 것은 품질 외에 가성비가 극히 높다는 것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귀사는 다른 직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심지어 커피 등 손님 접대도 CEO인 정서진이 직접 하고 있었다.

덕분에 부사장들은 아직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직접 미팅하는 중이다.

상대는 정서진 CEO가 직접 나서 는데, 이쪽에서 일반 임직원들을 내보낼 수는 없으니.

"아, 회사를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인원 채용을 못 했습니다."

"네?"

"그, 그 말씀은……."

"네, 서진파운드리에는 아직 저 혼자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생산 공장을 완전 무인화한 덕분에 생산 운영에는 차질이 없죠."

사장 혼자뿐이라는 말에 윈텔 부사장은 당혹스러웠다.

자본금 100억 달러짜리 파운드리 회사에 직원이 한 명도 없다고? 이게 말이 돼?

'그만큼 공장의 무인화, 자동화가 완벽하게 잘 세팅되었다는 자랑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런데 사람의 개입 없이 로봇만으로 반도체 패키징을 한다면, 그 로봇의 AI 수준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불량률 관리는 대체 어떻게…….'

그런 의아함과 우려, 경이로움 외에 한편으로는 안심하는 마음도 들었다.

'서진파운드리가 반도체 설계 진출을 준비한다면 곧바로 포착이 되겠어.'

전혀 기반이 없는 설계를 시작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천재들을 끌어모아야 하니, 이 과정에서 움직임이 훤히 보일 수밖에 없다.

"아, 그러고 보니 ADM에는 말씀을 드렸지만 아직 귀사, 윈텔에는 말씀을 안 드린 내용이 있군요."

듣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저희 서진파운드리는 종합반도체 회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자회사, 계열사 등 어떤 우회적인 방법으로도 자사 반도체 판매를 할 일은 절대 없습니다."

남이 주문한 반도체를 만들어주기만 할 뿐, 내 이름을 단 제품을 시장에 출시할 일은 없다.

정서진은 윈텔 부사장 앞에서 그 점을 정식으로 천명했다.

"예, 저희도 그러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입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서해전자에 파운드리 발주를 하자니 신경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요.

"발주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라인 전용 이야기는 본공장이 완전히 준비되면 그때 논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희에게 우선협상권을 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파운드리의 최고 VIP가 바로 윈텔인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마무리하던 중, 별안간 윈텔 부사장이 목소리를 진지하게 잡고 물었다.

"혹시 옵테인 메모리도 생산 가능하겠습니까?"

"옵테인 메모리요?"

정서진은 깜짝 놀랐다.

옵테인 메모리는 윈텔이 최근에 출시한, D램과 낸드플래시를 넘어서기 위한 메모리 패러다임의 야심작.

D램과 낸드플래시의 속도 차이에서 오는 병목 현상, 그로 인한 전체적인 컴퓨팅 성능 저하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미래 제품으로 각광받는 메모리다.

문제는 값이 더럽게 비싸서 '저걸 대체 누가 써?'라는 수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윈텔이 최근에 마이크론하고 결별했었지.'

옵테인 메모리 제조 과정에서 윈텔은 마이크론하고 손을 잡았지만, 얼마 전 결국 그 분야에서 갈라섰다.

정서진은 갑자기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지금 윈텔은 자사가 소중히 여기는 최신형 설계의 생산을 맡기려고 한다.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설계가 어떤지 모르니. 시범테스트를 맡겨 주시면 견적은 낼 수 있을 듯 합니다."

"옵테인은 우리 윈텔이 기대하는, 미래를 선도하는 기술입니다. 아직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널리 보급되지 않고 있지만, 가격만 안정된다면 D램이고 낸드플래시고 모두……."

"씹어 삼킬 수 있겠죠."

"자사공장 외에는 절대 외부에 설계를 돌리지 않는 제품입니다.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양산에 실패하면 회사에서 제 꼴만 우습게 됩니다."

이 제안에 자신도 자리를 걸었다는 말이리라.

하지만 정서진은 그 부분만큼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이것은 부사장의 단독 결정이 아닌, 이미 윈텔 본사 차원에서 논의가 된 내용일 것이다.

"옵테인의 생산을 맡겨 주신다면, 양산의 성공 실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전체 공정라인의 50%를 전용해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윈텔 부사장은 산뜻한 미소를 보였다.

"약속하신 겁니다."

***

"그나저나 한 번은 찾아올 줄 알았는데……."

정서진은 아직까지 조용한 서해전자의 반응이 의외였다.

파운드리 시장의 가장 큰 고객인 윈텔과 ADM이 서해전자를 버리면, 파운드리 라인에 쏟아부은 그 많은 돈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서해전자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당연히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전화 한 통도 없다.

"설마 아직까지 우리를 얕보고 있는 건가? 그럼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사실 정서진 입장에서 서해전자에 큰 유감은 없었다.

반도체 생산 및 패키징에서 주도권을 잡고 나면, 서해전자는 좋은 고객이 된다.

서해전자는 뭐니 뭐니 해도 메모리 시장의 패왕이니까.

정서진은 서해전자가 설계한 메모리 반도체를 잔뜩 설계해서 넘겨준다는 미래까지 벌써부터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 서진파운드리의 진짜 적은 바로 설계 전혀 안 하는 TSMC라고."

서해전자에 대한 경쟁의식은 서해 전자의 생산물량을 전부 가져오기 직전까지만.

마지막까지 경쟁할 진정한 적은 바로 대만의 TSMC다.

시가총액 500조 원에 가까운, 파운드리의 최강자 괴물.

***

신생 파운드리 한국업체의 등장으로 반도체 업계가 술렁이고 있을 무렵, 백두반도체에 불운이 찾아왔다.

"불이야! 불이야!"

"미친! 소화 시스템이 고장이야! 고장이 나도 하필 이럴 때!"

"빨리 불을 꺼! 어서!"

얼마 전 서해가 인수한 백두반도체 공장에 불이 난 것이다.

즉각 모든 생산라인이 정지했고, 회사는 불을 끄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공장은 값비싼 첨단설비들이 즐비한 시설이다 보니 여러 가지 소화시스템이 중첩돼 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메인 소화 시스템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불길이 퍼져 나갔고, 백두반도체는 발화 3시간 만에 간신히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피해는?"

"생각보다 그리 대단하진 않습니다. 치명적인 손실도 없고 오염 정도도 낮습니다. 내부 정비만 제대로 하면 적어도 한 달 안에는 다시 가동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필 파운드리 경쟁자가 나타난이 때에 불이 나다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안 그래도 그룹 본사 눈치가 보이 는데, 이거 원……."

인수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아직 백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미 내부적으로는 서해전자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공정라인을 최소한으로만 돌리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어차피 당장은 반도체 찍어낼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화재보험도 든든하게 들어뒀으니, 실질 피해는 전무한 거나 마찬가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나. 안 그래도 부회장님 심기 불편하신 이때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본사에서 우리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어?"

공석인 사장 자리를 대신해서 백두반도체를 임시로 맡고 있는 사장대행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

재건축 하나만을 목을 빼고 바라보던 조합원들은 백두반도체 공장에 불이 나자 곧바로 시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행정2부시장 앞에서 드러누웠다.

"서해건설은 재건축 사업자 능력이 없소! 자기네 공장도 제대로 관리 못 하는데 무슨!"

"서해건설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든든한 시행사가 필요하다!"

서해전자에 줄줄이 이은 악재는 서해건설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조합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행정2부시장이 조합에 시달리던 나날이 이어졌고, 결국 서울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서울시, 현진해운 재건축 사업주 재선정하기로 결정.]

[모든 것을 백지에서 다시 시작.]

서진파운드리가 쏘아 올린 파운드리 로켓은 돌고 돌아서 서해건설과 라테건설을 동시에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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