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73화
119장 큰돈 줄래, 작은 돈 줄래?(4)
"그 돈을 안 줘서, 벌을 받은 걸까?"
넋두리를 닮은 법무팀장의 말에 박호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만 다시 입에 댔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확신을 품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생각, 판단조차도 전혀 정리가 안 된 상황이었으니.
"내가 직접 협상을 했잖나. 마무리를 지었고."
"……."
"정신없는 와중에도 뭔가 쎄한 느낌이 들어서 기억을 다시 더듬어봤어. 금액도 기억하네. 12,530,781원. 박종우 고객이 납입한 총 보험료 잔액, 딱 그만큼이었지."
"……그만하게."
"자네는 나한테, 아니, 우리 회사에 그 돈과 6억,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지. 어느 쪽이든 마음대로 하라고, 대신 여기에서 끝내겠다고. 그게 14일이었어."
그리고 9조 원의 보험금 부담을 안긴 신규 가입자는 그 다음 날인 15일부터 몰려들었다.
그들이 한두 달 동안 납입한 보험료라고 해봐야 얼마나 될까.
9조 원이 넘는 보험금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서해생명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9조원이 넘는 손해를 떠안게 되었다.
법무팀장은 술에 취한 눈빛으로 박호진을 바라보며,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내가 오죽하면 이런 생각을 하겠나? 차라리 그때 6억을 줄걸, 그랬으면 우리 회사가 이 꼴은 안 당했을 텐데, 하고 말이야."
"다른 생각은 말게. 우리 회장님은 그냥 서해생명이 가진 양심의 크기를 보고 싶었던 것뿐일세."
"양심의 크기를 재고 나서, 거기에 맞는 처분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럼 우리 회장님이 미리 죽을 사람들 수천 명 중 보험이 없는 사람들만 파악해서 그 사람들한테 서해 생명에 가입을 하라고 꿈으로 계시라도 줬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박호진은 피식 웃으며 술을 다시 따랐다.
과일을 안주 삼아 한 잔 쭉 들이 켠 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합리적인 설명을 꺼냈다.
"우리 회장님이 서해그룹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은 몰랐을 테지?"
"그랬나? 처음 듣는군."
"그간 서해식품과 이런저런 트러블이 많았어. 심지어 지금은 서해식품이 방계에서 직계로 편입됐지."
"그랬었군."
"서해그룹에서 농작물 소득 비과세개정안 추진을 로비했었어. 딱 우리 회장님만 저격하는 법안이었지. 그게 통과됐으면 우리 회장님은 수천억 원 대의 소득세를 내야 했네."
법무팀장은 술에 취한 와중에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라운 표정을 보였다.
"뭐, 다 무산 됐지만, 아무튼 우리 회장님은 서해그룹과 썩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없어."
"……그랬군."
"이번에도 서해생명이 어떻게 나오자 한 번 봐야겠다, 역시나 그거밖에 안 되는 곳이다, 그런 걸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뿐이야.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박호진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지어낸 셀프 해명이기도 했다.
하수영이 지닌 재물운의 저주를 믿는 편이지만, 서해생명 건은 재물운이라 믿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컸으니.
이런 식의 심리적 안전장치라도 두고 싶었던 것이다.
"회장님은 그 보험료 받아서 박종우 씨께 돌려주고, 그간 지출했던 병원비는 모두 지원해 주셨네. 그리고 지금 청담수영병원에서 무상으로 치료받고 있지."
"……."
"이번 일,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회장님이 신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일을 꾸밀 수 있겠나? 자네도 괜한 망상을 떠들고 다니지 말어. 우리 회장님 귀에 들어가면 많이 불편해하실 거야."
"나는 그럼 나중에 큰 병이 걸려도 수영병원에서는 치료를 못 받는 겐가, 허허."
"환자를 거절하면 의료법 위반이지. 받을 순 있네. 다만 병원 차원에서 진료비 지원을 주는 일은 없을 수도 있어."
"그런 거야 상관없어."
"VIP병실에 입원할 거 아니면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할 수도 있어."
"상관없네. 그 정도 돈은 있어."
"허허, 우리 병원 VIP실 입원료가 얼마인지나 알고."
클럽 폭행 정치인 아들이 나흘 입원하고 421억을 토해내고 나간 걸 말해줘야 할까.
참고로 그 돈은 폭행 피해자에게 돌아갔다. 원래 피해자가 받아야 할 몫이었다는 쿨한 이유와 함께.
사망 위기를 무사히 넘긴 피해자는 지금은 일반 병실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나저나 그 보험금을 전부 지불하는 것도 쉽진 않겠군. 9조 원이 넘는다고 했지?"
하려면 할 순 있다. 서해생명이 쌓아두고 있는 현금 자산이 얼마인데.
하지만 그룹 경영진 입장에서는 생돈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니 원래 줘야 할 돈도 최대한 안 주려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게 된다.
원래 돈을 줘야 하는 사람의 심리는 이런 것이고, 이게 욕망이 가득한 대기업에서는 악독한 지급 거절행태로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9조 원을 전부 지급하지는 않겠군, 적당히 털겠지."
"내가 여기서 말할 건 아니네."
법무팀장은 대답 회피로서 긍정을 표현했다.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보험금 지급 거절에 있어서 법무팀장이 마냥 떳떳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근데 다른 것도 아니고 대부분 사망보험이라서 지급 거절할 만한 사유가 마땅치 않을 텐데."
지급의무 면책사유가 되는 천재지변 등하고는 일절 관계가 없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나. 어차피 내 일도 아니고, 경영진이 결정할 문제야. 난 법무적인 리스크만 관리하면 되지."
법무팀장은 계속 대답을 회피했고, 박호진은 술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자살이거나, 속였거나, 부실계약이었다고 우길 셈이로군. 보험설계사 몇몇한테도 총대 들려주고.'
보험금 전부를 안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중에서 만만한 가입자, 어떻게든 지급 거절로 물고 늘어져야겠다는 사람들을 상대로 우기면서 거절을 할 순 있다.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다가 지친 유족들에게 적당한 금액으로 타협을 보면, 그만큼 또 남는 것이니.
지불이 늦어지는 만큼 이자 수익도 거머쥘 수 있고, 서해생명이 어떻게 대처할지, 박호 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뻔히 보였다.
'재물신의 저주가 과연 이것으로 완전히 끝난 건지, 아직도 남아 있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
자산 300조 원짜리 회사의 미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박호진은 내심 궁금했다.
***
몇만 명이나 되는 신규 가입자가 어떻게 해서 죽기 전에 우르르 서해생명에만 몰려들었는지, 그 음모론은 큰 불씨를 피우지 못했다.
죽은 가입자들은 말 그대로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었고, 어떤 연관점이나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입을 한 상품이나 금액도 제각각이었고, 직업과 나이, 성별 등도 다양했다.
원래라면 그 기간 동안 정상 통계적으로 사망했을 인물들이, 하필이면 죽기 직전에 가입을 한 게 전부다.
하지만 서해생명은 포기하지 않고 지급거절 대상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급성 심정지로 사망한 20대 남자한테는 기저질환을 숨긴 것이라고 소송을 걸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40대 남자에게는 빚에 허덕인 나머지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반격했다.
70대 노인에게는 본래 가입 적합자가 아니라고, 유효한 계약이 아니었다고 지급을 거절했다.
30대 여자에게는 보험계약 체결과정에서 부실요건이 있어 계약 무효를 주장했다.
이렇듯이 서해생명은 다양한 사유를 들어, 지급해야 할 보험금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물론 무작정 모두 거절한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허점을 잡기 어려운 상대한테는 발 빠르게 보험금을 지급했다.
그들이 이뻐서가 아니라, 무작정 우기기로 발 빼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다.
"현실적으로 9조 원 전부를 발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대 3조 원까지는 어떻게 털어버리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1.9조 원 내지 3조 원. 이게 우리 회사가 달성해야 할 목표다. 모두 알겠지?"
"네!"
최소 1.9조 원은 무조건 털어야 한다.
그리고 일이 잘 풀려도 3조 원 이상 털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무 많이 털면 아무래도 여론이나 금감원의 제재 등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크게 탈이 나지 않을 적정한 선에서 최대한.
이것이 서해생명이 품은 목표였다.
덕분에 유족들은 난리가 났다.
서해생명 본사 앞에는 매일같이 시위대가 몰려들어서 보험금 지급을 정상적으로 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오너 일가를 비방하는 플래카드도 쉴 새 없이 걸렸고, 확성기를 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진을 쳤다.
하지만 지상파, 메이저 언론은 그런 소란을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SNS 등에 어쩌다 올라와도 빛의 속도로 파묻힐 뿐이었다.
매일같이 수백 명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찻잔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풍에 불과했다.
[서해생명, 과감한 보험금 지급 결정!]
[청구요청 접수 후 사흘 안에 쿨하게 지급! 당일 바로 지급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이현덕 부회장, "슬픔에 젖은 유족들을 두 번 슬프게 하지 말 것.
지급에는 지체 없어야."]
[보험금 지급 받은 유족들, 슬픈가운데에 그나마 한 줄기 위로의 빛내려와.]
[현재까지 총 지급액 5조 원이 넘어.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전대 미문의 지급총액!]
[그룹의 미래를 이끌 오너의 결정은 과감했다!]
[미지급 상태인 보험금도 심사 거쳐 진행될 예정…….]
서해생명 등 연관 검색어로 검색하면 주르륵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언론사들은 최대 광고주의 이쁨을 받기 위해 예쁘게 포장된 찬양 기사를 물량 공세로 내보냈다.
어디를 찾아봐도 서해생명이 발 빠르고 과감하게 보험금을 지급했다는 내용밖에 없었다.
-그럼 강남역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은 뭐라는 거야?
-진상 손님들이라잖아. 원래 보험금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보험금 내놓으라고 떼쓰는 거지.
-아니, 사망보험 들었고 사람 죽었으면 걍 줘야 하는 거 아님? 거기에 자격이고 나발이고가 있어?
-기저 질환 숨기고 청약했으면 취소 사유 된다. 그리고 가입하고 2년 안 지난 자살은 못 받는다. 청약 자체가 제대로 체결이 안 된 거래도 있고,
-그런 거야?
-서해생명이 쿨하게 지급한 보험금이 5조 원이 넘어. 그런 서해생명이 뭐가 문제라서 그렇게 시위하는 사람들한테 돈을 안 주고 있겠냐?
-그건 그럴듯하네.
-ㅇㅇ. 그렇게 쿨한 회사가 안 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떼쓰는 진상 고객들이니까 그런 거지.
-그렇구나. 하나 배워간다. 나도 저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동정표 주지 말아야지.
정당한 보험금 지급이 거절당한 사람들은 그렇게 물량공세에 휩쓸려 세상의 시선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지급했지?"
"약 5조 3,211억 9,873만 원입니다."
"대충 6,789억만 더 던져주면 되는군."
"사장님, 근데 지금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굳이 여기서 돈 더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그래? 분위기가 좋다고?"
"네, 애초 목표치는 3조 원 넘게 털지는 말자였지만, 그보다 조금 더 털어도 문제없습니다. 여론이 아주 예쁘게 잘 잡혔습니다."
사장은 기분 좋은 듯이 허허 웃다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그래도 마무리가 깔끔해야 뒤끝이 편한 법이지. 강성 유족들만 골라서 대충 200억 정도 더 던져줘."
"아! 그럼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열을 더 일으킬 수 있겠군요."
"그리고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 해. 우리가 착오가 있어서 지급이 미뤄진 거라 지금 바로 지급하는 거라고 정중한 유감 표시하는 거 잊지 말고."
"아, 역시! 그럼 우리 회사 이미지가 더 좋아지겠군요. 바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해생명은 당초 기획했던 3조 원보다는 더 많은 액수를 털어버림으로써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사장은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오너일가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가장 많은 수고를 한 직원들에게 상여금이 돌아갔다.
본사 앞의 시위는 기세가 한풀 꺾였으며, 이제는 행인들한테서도 눈총을 받고 있는 분위기였다.
'자네가 고생했네.'
그룹 명예회장 이창영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서해생명 사장은 개운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회사 주가부터 확인한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뭐야, 갑자기 주가가 왜 이렇게 떨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