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69화
118장 그리운 반도체공학부(3)
박효산 교수는 떨떠름해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공정연구개발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니?"
"저희 회사가 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 회사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설마, 자네 회사에서 1나노공정라인 양산 같은 거라도 성공했단 말인가?"
"기밀이라 말씀은 못 드립니다. 다만 학교가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앞으로 공정에서는 일체 손을 떼시고, 설계와 소재에만 집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래도 제 모교인지라 어렵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저도 어렵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허락을 받아?"
"회장님께서 반도체공학부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계시더군요. 서진파운드리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은 없었으면 하신다고."
"아, 그러고 보니 하수영 회장님께서 우리 한국대에서 일반인 청강을 하고 계신다지?"
"나도 언뜻 들었네. 대체 어느 수업을 들으시는지 궁금하지만 말이야. 살짝 귀띔해 줄 수 있나?"
"청강을 하신다고요? 우리 회장님께서요?"
정서진은 처음 듣는다는 듯이 깜짝놀랐다. 아무리 봐도 연기는 아니었다.
"정 박사, 자네 전혀 몰랐었나?"
"몰랐습니다. 회사 설립 때문에 이리저리 바빠서 모교 소식은 별로 못들었습니다. 근데 청강이라니……."
"2학기에 기여입학으로 들어오는 것은 확실해. 총장 능구렁이가 그것은 부정하지 않더군. 근데 어느 학부인지는 끝내 말을 해주지 않아."
"분명히 해당 학과 교수들은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호들갑 떨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가증스러운 짓이지."
"우리 반도체공학부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더라고, 우리가 자네 앞에서 연기하는 것은 아니니 믿어도 좋네."
"현재로서는 의대와 건축학과가 현재 유력하지. 병원과 임대업 운영을 위해서 의대와 건축학과, 둘 중 한 곳에서 청강하고 있다는 게 유력한 다수설이야."
"덕분에 그 두 학과는 매일매일이 전시 분위기지."
정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에이, 기여입학을 노리는 거면 그 두 학과는 아닐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교수라고 해서 모든 학칙을 숙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서진은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기여입학하려면 해당 학과는 미달학과여야 합니다. 어디 의대와 건축학과가 미달되는 거 보셨습니까?"
미달은커녕 누구나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이 난 과들이다. 기여입학은 어림도 없다.
그 순간 교수들은 큰 충격을 받은 채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 한국대에 미달학과라는 게 있긴 한가?"
"내가 알기로는 없네. 국내 최고 대학에 미달학과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아니, 아니야! 미달학과가 하나 있긴 해! 농대 농대가 지금 3년 넘게 정원 못 채워서 고생 중이라고!"
"농대?"
"하수영 회장님은 그러고 보니 취미로 농사를 지으시는 분이셨지?"
의대는 병원 운영을 본업으로 생각, 건축학과는 부동산 임대업을 본업으로 생각, 그리고 반도체공학부는 반도체 투자운용을 본업으로…….
"뭐야, 정말 농대였어?"
"내가 지금 대학법 조항을 찾아봤네! 과연 정 박사 말이 맞아! 기여 입학은 기여입학자를 모두 받고 나서도 여전히 정원 미달이어야만 유효해!"
"아니, 의대 교수들은 대가리에 다들 우동 사리만 들었나? 아무도 이걸 몰랐단 말이야?"
"우리 대학에 기여입학자가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렇지! 농대 말고는 기여입학 자체가 안 되는데, 누가 돈까지 내가면서 농대에 들어가겠어?"
"의대 교수들이 한 명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돼. 아는 놈들도 입을 함구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어째서?"
"타학과 잘되는 꼴은 못 봐주겠다. 그런 심리지. 원래 남 잘되는 거 배아파서 못 보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농대, 농대가 틀림없군. 총장이 우리 대학인 건 확실하다고 묵인했으니까 농대가 틀림없이 맞겠어."
"농장일은 취미로 하시는 줄 아셨는데 대학 진학까지 고려하실 정도로 이렇게 진지하게 매달리실 줄이야."
정서진은 허탈함과 안타까움을 나누는 교수들을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켜봤다.
'회장님 농업이 취미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농사지어서 번 돈으로 파운드리 사업에 10조 원이나 떡하니 투자하신, 대한민국 제일의 거농인데?
앞으로 공정 연구개발은 접으라는 정서진의 제안은 교수들의 머릿속을 잠시 떠난 듯이 보였다.
그들은 어떡하면 하수영이 반도체 공학부 수업을 듣게 할 수 있을지, 입학 후에 전과나 복수전공은 안 되는지, 등등의 편법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회장님 말씀대로 농대 청강 중이라는 것은 티 안 나게 잘말했군.'
정서진이 방문한 진짜 목적이다.
하수영은 한국대에서 구입한 벼 종자로 전격 교체하기로 했다.
원래는 기존의 벼 종자를 그대로 쓰고, 사람 먹을 쌀만 따로 신 종자를 쓰려고 했었다.
어차피 수영농장에서 생산되는 벼의 대부분은 벼알까지 가축 사료로 소비되니까.
그런데 확인을 해보니 기존에 쓰던 벼 종자가 바로 일본이 특허를 가진 것이었다.
물론 수확한 벼알로 다시 농사를 짓는 하수영은, 처음 종자를 구매했을 때 이후로는 로열티 부담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국대에서 구입한 종자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 가축사료에 일본산 벼가 대부분 쓰인다는 게 나중에 발목을 잡을 수 있지. 그놈들 우기기 시전전에 원천 봉쇄를 해야겠어."
「현재 우리 농장에서 재배하는 밀과 고추는 몬산토 종자입니다. 버섯들은 고유 종자특허를 가진 회사가 없습니다.」
"몬산토 종자는 뭐 그대로 쓰자. 어차피 종자 재활용이라 특허료 더내는 것도 아닌데."
「몬산토산 밀과 고추는 종자를 재활용할 경우 횟수에 따라서 수확량이 거듭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종자를 구입하지 않고 씨를 채취해서 다시 파종할 경우, 재배할 때마다 수확량이 줄어든다는 소리다.
몇 번 정도는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결국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너무 줄어들기 때문에 다시 종자를 구입할 수밖에 없다.
「밀의 경우, 보통 1회 정도만 재활용을 하고, 2회 이상은 재활용을 하지 않습니다. 고추는 3번까지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우리야 엘릭서 비료빨이 있으니까 상관없지. 근데 몬산토 놈들 재주도 좋네. 지금 시대 기술로도 그런 식으로 종자 개량이 가능하다니, 놀라워."
엘릭서 비료는 그런 종자의 근본적인 한계를 다 씹어 먹은 채 놀라운 생산량을 달성하고 있다.
"이야, 어쩌면 몬산토에서 우리 농장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쟤네는 종자 구입도 전혀 안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작물을 찍어내냐고."
「수영농장은 이미 카길, 몬산토, 팟디서플라이 등 세계적인 곡물회사들의 주시를 받고 있습니다.」
"근데 팟디서플라이 애들은 요즘왜 이렇게 잠잠해?"
「골든 트러플을 시중 유통하지 않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수영은 남상진 교수 아이디로 로그인한 농대 종자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하는 중이었다.
혹시 살 만한 다른 종자가 또 없는지 보고 싶다는 말에, 남상진 교수가 흔쾌히 열어준 것이다.
"어디 보자…… 시장에 나가지 못하고 농대 종자연구소 유배 처지가 된 이유가 다들 있구나."
「병충해에 약하거나, 생산량이 좋지 않거나, 농약에 약하거나, 다들 특징이 있군요.」
"그래도 맛이 없어서, 라는 이유는 없네. 하긴, 맛없는 애들은 애당초 탈락일 테니까."
「맛은 없어도 생명력이 강한 경우 다른 연약한 종자에 섞어서 개량을 하기도 합니다.」
"아, 그런 애들은 여기 따로 넣어 놨군, 단독 종자도 아니고 남을 보조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생들이 네. 가엾어라."
하수영은 심드렁하게 마우스를 굴리면서 구입할 만한 종자를 찾아보았다.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렇게 네 개만 일단 주문해서 한번 키워보자고."
「네, 남상진 교수한테 연락을 보내놓겠습니다.」
"써보고 마음에 들면 구입은 해놓자. 당장 재배할 건 아니더라도 특허는 많이 갖고 있으면 좋지."
강한 생명력, 월등한 생산력.
종자에 필수적인 그 두 가지는, 수영농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엘릭서 비료와 24시간 순찰관리하는 로봇들의 조합은, 어떤 연약하고 비루한 종자도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
다 필요 없고 그저 맛만 좋으면 그만이다.
「정서진 대표가 오늘 한국대 반도 체공학부를 방문했습니다. 공정 연구개발 투자는 전면 중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모교가 숯을 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걸 뻔히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이제는 곧 내 모교가 되기도 하니까."
「마이크론도 공정라인 축소화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비상상황을 대비한 최소치만 남기고 모든 공장을 축소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다른 데는 아직 소문 안 났지?"
「네, 마이크론이 철저히 기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투자는 생각이 없으십니까?」
"투자? 반도체 시장에 변화가 닥칠 테니까 그에 맞춰서 공매도 같은 거라도 크게 하자, 이 말이냐?"
「네, 마스터.」
하수영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그렇게 돈 벌 거였으면 진작 메가밀리언 복권 몇 장 사서 그거 종잣돈으로 시작했지. 그런 건 이제 안 해. 지금 버는 걸로도 청담동 건물 수집하는 것은 충분해."
문제는 사고 싶어도 매물이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작년부터 청담동에서 나온 모든 매매 매물은 모두 하수영이 거둬들이고 있었다.
지독히도 매매 물건이 안 나오는 게 슬플 뿐이지…….
"오죽 물건이 없으면 내가 서해전자 엿 먹인다고 파운드리에 10조원씩이나 투자하고 있겠냐고, 맹수는 배가 부르면 불필요한 고기를 사냥하지 않는 법이다. 어차피 썩어서 먹지도 못해."
「그렇군요.」
혹시 또 구매할 만한 종자 특허가 있을까 싶어 쇼핑리스트를 훑고 있는데, 알람이 울렸다.
재단 홈페이지 비공개 상담센터에서 온 알람이었다.
"오, 직원들 중에서 누가 글을 올렸나 보군. 자, 오늘은 어떤 가여운 어린 양이 이사장님의 자비를 호소하고 있는지 한번 볼까?"
-회장님! 저는 프라임컴퍼니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 김말식이라고 합니다!
……중략……
저와 같이 일하는 동료의 사정이 너무 안타까워서 회장님께 건의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궁지에 몰렸을 땐 언제든지 이곳에 편하게 털어놓으라는 평소 회장님의 당부를 떠올려서 이렇게 용기를 냅니다.
……중략…….
「암환자 가족의 병원비 부담 때문에 가정이 파산 직전에 몰린 동료 직원의 사연이로군요. 교차 검증 완료했습니다. 다소 축소된 바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사실입니다.」
심지어 과장이 아니고 그 와중에 축소까지 했다.
「보험사는 서해생명인데 보험금지불을 거듭해서 거절해 와서 더 경제적으로 힘들어졌습니다.」
"또 서해군. 아무튼 내 병원으로 당장 전원시켜서 치료받게 하고, 뭐 빚도 졌나?"
「병원비 때문에 4,000만 원 정도의 빚을 진 상황입니다.」
"쯧쯧…… 직원 의료서비스 복지 정책이 있는데 그게 아직도 제대로 홍보가 안 된 모양이구나. 이참에 전 직원들한테 알림톡 한번 꽉 돌려라."
「네, 마스터.」
"서해생명이 지불해야 할 보험금은 얼마야?"
「암 진단비 6,000만 원입니다.」
"그거 얼마 하지도 않는 거 가지고, 이러니 내가 반도체 파운드리를 할 수밖에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