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58화
116장 길들여진다는 것(2)
설계도를 준 게 언제라고 벌써 시제품이 나와?
아니, 제대로 된 생산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텐데, 아무리 시범공장이 완성됐다고 해서 이렇게 뚝딱 시제품이 나올 수 있는 건가?
'일단 시제품이라고 가져온 걸 보면 최소한 말도 안 되는 불량품은 아니라는 건데.'
당연히 서진파운드리도 직접 테스트를 해봤을 것이다.
작동을 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점검을 해야 하니까.
작동도 제대로 안 되는, 말 그대로 벽돌 반도체를 들고 와서 품질 테스트를 해달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마이크론 앞에서 회사가 개망신을 당하는 것이니.
"알겠습니다."
카르본은 정서진과 함께 테헤란로에 있는 마이크론 한국지사를 찾았다.
성능 테스트 설비는 그곳에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정서진이 샘플로 챙겨온 시제품 200개를 테스트 기기에 넣고 성능을 테스트했다.
테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카르본은 정서진과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에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수영레스토랑에서 투자를 받으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투자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하수영이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을 하는데 적당한 인물이 필요해서 자신을 스카우트한 것이므로, 자신이 사업 아이템이 있어서 하수영을 찾아간 게 아니지 않은가.
'이 사업의 주체는 나다, 나는 좋은 사업 아이템을 구현하기 위해 하수영 회장님한테서 투자를 받은 거다…….'
하지만 정서진은 하수영의 지시를 착실히 따랐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며, 투자받은 젊은 천재 과학자에 빙의 하려 노력했다.
"투자자가 정말 통이 큰가 봅니다. 10조 원이나 되는 돈을 선뜻 안겨주다니요. 나노소프트도 그렇게는 못 할 겁니다."
"하하, 그분의 재력이 엄청나긴 하시죠. 배포도 크시고요. 10조 원쯤은 그냥 없는 셈 치고 묻어둬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실 분입니다."
카르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수영이 그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었나?
'아니, 부자는 맞지만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았는데…….'
10조 원이란 돈을 없는 셈 칠 수 있는 개인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남의 돈이나 회삿돈이라면 몰라도, 자기 돈 10조 원을 허술히 여길 수는 없을 텐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사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테스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자들이 주저하는 표정이자 카르본은 의아해서 물었다.
"왜들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입니다."
"결과가 좋은데 문제 될 게 뭐가 있다고?"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카르본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정서진에게 함께 이동할 것을 권했다.
모니터링룸으로 이동한 카르본은 가장 먼저 첫 번째 샘플 결과를 확인했다.
성능 수치를 낱낱이 훑어본 카르본은 감탄을 터뜨렸다.
"오, 성능이 아주 좋군요. 기대 이상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우리 제품 설계의 이론상 한계치 성능까지 나왔습니다."
반도체는 공산품이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절삭면이나 화학 반응을 일으킨 표면 등을 미세현미경으로 보면 차이가 있기에. 다만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즉 똑같은 공정라인에서 찍어낸 제 품들끼리도 성능이 제각각으로 나온다.
어떤 제품이 120의 성능을 낸다면, 어떤 것은 130, 140 등 저마다 성능에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제품에 일괄적으로 제한을 걸어둔다. 예를 들어 저 경우, 딱 100만큼의 성능을 낼 수 있도록.
공산품으로서 균등하고 안정적인 성능을 보장할 수 있도록, 최하위성능에 맞춰서 설정하고 판매하는 것이다.
'이번 모델은 100의 성능을 냅니다!'
이렇게 홍보했는데 80, 90의 성능을 내는 제품들이 무더기로 섞여 있다면 곤란하니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100의 성능을 낸다고 했는데, 제것은 120의 성능을 내는데요?'
'문제 있습니까, 휴먼?'
'아니오, 뽑기 운이 좋았다고 생각 합니다.'
이렇게 반대로 개별 제품이 더 좋게 나오는 것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소비자가 운이 좋았다며 신나 한다.
"오, 정규 출력 이상의 성능을 보이는 부품들이 상당히 보이는군요. 이 정도면 아예 오버클럭 전용 라인 업으로 해서 출시를 해도 괜찮을 것……."
말을 하다 말고 카르본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그는 모니터를 가득 채운 수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200개 모두 이론상 한계치에 근접한 성능을 내고 있다고?"
"네, 이사님. 그렇습니다."
기술자들이 이제야 알아봤냐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고, 카르본은 황당해서 테스트 수치를 살폈다.
놀랍게도 200개의 제품은 모두 최상등품이었다.
마이크론에서 보장하는 정규 출력을 초과하여, 최고 성능의 램 오버클럭의 성능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터 정, 혹시 가장 좋은 성능의 제품들만 선별해서 가져온 겁니까?"
"아닙니다. 딱 200개만 만들었고, 이것 외에 더 만든 것은 없습니다. 폐기한 것도 없습니다."
"폐기품이 전혀 없다고요?"
"네, 작동하는지 여부만 테스트하고 바로 가져온 겁니다. 성능이 괜찮게 나오는가 보군요?"
"놀랍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200개 모두 한계치 성능을 내고 있어요."
"고클럭 매니아들이 좋아하겠군요."
카르본은 눈이 팽팽 돌아갔다.
'비기너스 럭키(Beginner's Luck)'인가? 아니면 첫 시제품이라고 그만큼 심혈을 기울인 건가?'
마이크론이 GDDR6 제품 100개를 생산할 때, 정규 출력 이상의 양질 품은 10개 미만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녀석들을 따로 챙겨서 오버클럭전용 제품으로 판다.
"아무튼 시제품 테스트는 문제없습니다. 이대로만 생산을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시범공장만세팅이 된 상태지요?"
"네, 본공장은 아직 준공되려면 멀었습니다. 하지만 따로 할 게 없으니, 일단 시제품 공장만 돌려서 제품을 계속 만들어 보겠습니다."
"혹시 시제품 공장을 한번 구경해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공장 내부는 극비라서요. 일부러 특허도 신청하지 않은 기술이 적용된 공정설비들이 있습니다."
"아, 그럼 반도체설비 제조업체에서 따로 주문한 게 아닙니까?"
"네, 제조설비는 우리…… 아니, 제가 직접 개발한 것들입니다."
정서진은 하수영의 당부를 기억해내고 얼른 자신의 이름을 앞에 내세웠다.
'순수익의 5%를 연봉으로 받는데, 이런 가면극쯤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어야지.'
***
맥콜린은 혀를 내두르며 놀라워했다.
"200개 전부 최상등품인데? 정규 출력보다 더 높은 수준이 아니야."
"그렇지? 나도 놀랐다니까."
"비기너스 럭키치고는 대단한데. 어떻게 한 번에 이렇게 좋은 것들만 줄줄이 나왔을까?"
카르본은 정서진의 태연한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직접 개발한 반도체 설비로 찍어냈다고 했다.
'원래 설계 쪽 전공이라고 들었는데.'
설계보다는 제조공정기술 개발에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방향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설계 기술 유출을 염려할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물론 천문학적인 위약금을 설정한 마당에, 그런 걸 걱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맥콜린은 거듭 감탄했다.
"알고 보니 반도체 제조기술의 천재였군.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어. 하긴, 아무리 부자라도 10조 원이나 떡하니 투자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10조 원은 잃어도 그만이라는 것은 역시 겸손이었어. 하긴, 미스터정 입장에서는 자기가 '묻지 마 10조 원' 투자를 받을 만한 남자라고 말하기에 쑥스러웠겠지."
"원래 한국은 겸손이 미덕이라고 하더라고, 자기 가치가 10조 원이라고 해서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고 다니는 것은 투자자한테 실례라는 인식이 있나 봐."
"투자자가 현명한 거라고 말을 돌리다니. 겸손함이 너무 지나친 거 같은데."
카르본은 미국 본사에 모든 것을 보고했고, 본사도 납득하며 한시름을 놓았다.
'역시 뭔가 한가락 하는 게 있으니까 10조 원이나 투자를 얻어낸 것이다.' 라는 이미지가 단단히 박혀버렸다.
"근데 서진파운드리, 미스터 정 말고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있어?"
"그러고 보니 수행비서 한 명도 못본 거 같은데. 항상 미스터 정 혼자만 다니더라고."
"비즈니스 실무는 임원들을 시켜도 될 텐데 최고경영자가 일일이 뛰어다니다니. 그 시간에 공정기술을 하나라도 더 연구하는 게 나을 텐데."
둘은 서진파운드리가 직원이라고는 정서진 혼자밖에 없는 1인 회사라는 것을 아직 몰랐다.
***
마이크론의 놀라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카르본과 맥콜린이 한국에서의 일은 이제 그만 끝났다고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정서진이 다시 연락해 왔다.
"오, 미스터 정. 우리는 내일이면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히……."
-50만 개 생산을 완료했습니다. 이번에는 시제품이 아니라 본제품입니다.
"뭐라고요? 50만 개라고요?"
카르본은 화들짝 놀랐고, 통화 내용을 들은 맥콜린도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시범라인만 가동 중인 거 아니었습니까? 본공장은 아직 멀었다면서요?"
-아, 시범라인만 조촐하게 있긴 한데 생각보다 제품이 빠르게 만들어 지네요. 찍다 보니까 벌써 50만 개가 됐습니다.
"……."
-저도 생산을 직접 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이렇게 빠르게 나올 줄은 몰랐네요. 아무튼 50만 개는 일단 납품을 하고 싶어서요.
이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마이크론은 나노소프트에 1,000만 개 공급 계약을 맺긴 했지만, 납기 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차세대 에스코트는 아직 개발 중이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우리가 곧 회수하겠습니다."
카르본은 부랴부랴 마이크론 코리아에 지시를 내려서 생산된 제품을 받도록 했다.
본사에 연락하자, 예정보다 너무 일찍 납품을 받게 된 마이크론 경영진은 간단한 회의 끝에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엔비도에 공급해야 할 그래픽 램 물량이 있으니, 이번에 생산된 50만 개를 그쪽으로 보냅시다."
"대만으로 갈 항공편을 수배해야겠군요. 그전에 품질 테스트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50만 개나 되니까 대만의 우리 회사 공장에서 품질 테스트를 진행하지요."
"안 그래도 대만 공장에서 저번에 화재가 나서 생산 일정이 늦춰지고 있는데,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서진 파운드리와 계약하기를 잘했군요."
무엇보다 경영진은 서진파운드리가 보낸 청구서 숫자에 만족했다.
자사 공장에서 생산한 원가보다 훨씬 낮은 금액이 청구서에 찍혀 있었던 것이다.
카르본은 서진파운드리 테스트 공정라인에서 생산된 그래픽 램 50만 개를 챙겨서 대만의 마이크론 공장으로 보냈다.
덕분에 귀국이 잠시 늦어졌지만, 그는 만족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마자 대만 공장에서 놀라운 연락이 날아왔다.
-미스터 카르본, 서진파운드리는 미쳤어요. 미쳤어!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카르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품에 집단 불량이라도 발생한 것일까?
-지금까지 3만 개를 테스트했는데 모두 최상등품입니다! 한 개도 빠짐없이 전부! 우리 회사가 정한 정규 출력의 130% 이상을 내고 있어요!!
"전부 안정적인 램 오버가 가능하다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대체 공정라인을 어떻게 세팅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효율이 나오는 겁니까?
"잠시만요. 금방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카르본은 미국 본사에 전화해서 CEO 너드 파킨을 찾아 말했다.
"지금 즉시 우리 공장의 모든 GDDR6 램 생산을 중지해야 합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인가?
"됐으니까 지금 빨리 모든 그래픽램 생산을 멈추라고 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만 달러씩 증발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