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57화
116장 길들여진다는 것(1)
나노소프트는 정통 IT기업이다.
윈드밀이라는 굴지의 OS로 전 세계 PC 시장을 꽉 잡고 있으며, 오피스 소프트웨어 시장의 절대강자다.
최근에는 게임기, 노트북 등의 하드웨어 시장에도 진출해서 굵직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B2B 클라우스 서비스도 막대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렇듯이 누구나 최고임을 부정하지 못하는 IT 공룡 기업.
창업주인 빌 고든 회장은 옛날에 은퇴해서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데도 아직도 전 세계 대부호 순위 2위에 이름을 걸고 있다.
이 위대한 IT회사의 비디오 게임기 엑스코트 책임자 자이오든은 처음 한국 출장을 지시받았을 때, 당연히 강력한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사티아, 차세대 엑스코트에 마이크론의 그래픽 램을 넣자는 건 좋습니다. 훌륭한 회사니까요. 하지만 신생 파운드리 업체에 반도체 생산을 맡기자고요? 납품을 미끼로 마이크론을 설득해서? 말도 안 됩니다."
아직 모래알 삽질도 안 해본 파운드리 회사에 최신형 그래픽 램 생산을 맡겨서 신형 게임기에 넣자니.
심지어 마이크론을 설득해서 그들로 하여금 위탁생산을 맡기게 하자니.
자이오는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노소프트 CEO 사티아 아델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자이오든,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거부권이 없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신생 파운드리 업체가 우리 나노소프트에 매우 중요한 회사라서 그렇습니다."
"설마 우리 회사 대주주라도 됩니까?"
"아뇨, 우리 회사 주식은 한 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쯤에서 자이오든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 파운드리회사는 수영레스토랑에서 설립한 겁니다. 수영회사가 지분 전량을 쥐고 있죠."
수영레스토랑이라는 단어에 자이오든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나노소프트 본사의 사내 매점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전국구 레스토랑.
"수영레스토랑을 만나기 전, 우리 나노소프트의 최대 총매출이 1,110억 달러입니다. 그렇지요?"
"……네."
"엑스코트 작년 매출은 얼마였나요?"
"……100억 달러가 조금 넘습니다."
"수영레스토랑 일 년 매출은 얼마 죠?"
"……약 600억 달러로 예상됩니다."
사티아 아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래요. 우리가 윈드밀, 게임기, 오피스, 클라우드 서비스 등등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열심히 팔아서일 년에 1,100억 달러를 버는 동안, 사내 매점은 라면 하나 팔아서 혼자 600억 달러를 벌고 있죠?"
"……."
사내 매점이 나노소프트의 어느 사업부보다도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셈.
거기에 일 년에 100억 달러 겨우 벌까 말까 하는 게임 사업부, 너희가 할 말이 있어?
라는 표정이,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사티아 아델의 눈빛에 가득했다.
"그렇다고 너무 나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서진파운드리의 기본 자본금이 100억 달러가 넘어요."
"100억 달러나 됩니까?"
자이오든은 무척 놀랐다.
100억 달러의 자본금이라면 음식 하나로 떼돈 벌었다고 건성건성 달려든 게 아니다. 진지하게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하려고 나선 것으로 봐야 한다.
"서진파운드리도 우리 발목을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생산품의 성능이 미달되면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맡겨보세요."
"하지만 마이크론이 설득이 될까요?"
"그건 이제부터 우리 몫이죠. 이정도도 제대로 못 해내서야 수영레스토랑 본사 얼굴을 어떻게 똑바로 보겠습니까?"
"……"
자이오든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노소프트가 가진 반도체 제품 구매력을 활용해서 서진파운드리라는 것을 제대로 서포트하자는 건데, 마이크론을 어떻게 설득할지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
서진파운드리의 CEO 정서진까지 참여한 미팅은 가벼운 긴장감 속에서 이어졌다.
마이크론은 돈 말고 가진 게 없는 서진파운드리가 나노소프트와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또한 그래픽 램을 과연 잘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는지도 의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서진파운드리가 대만의 TSMC처럼 설계로 진출하지 않고 순수 파운드리 업체로만 남을 것인지도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은 말을 이렇게 해도, 나중에 말을 바꿔서 자사 개발 반도체를 내놓을 수도 있는 일이지.'
대규모 생산라인을 갖춘 파운드리 회사가 위탁생산을 실시하며 설계 기술을 차근차근 흡수, 종래에는 자사 반도체를 개발해서 출시.
그리하여 종합반도체 회사로 거듭나는 것.
아무래도 위탁생산을 맡기는 입장에서는 그런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다.
TSMC처럼 업계에서 오랫동안 신뢰를 구축한 회사가 아닌 한.
하지만 정서진은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었다.
"원하신다면 천문학적인 위약금 조항을 설정하시지요. 대충 100년 안에 어떤 식으로든 자체 반도체를 출시할 경우 800억 달러를 마이크론에 지불한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800억 달러면 우리 마이크론의 시가총액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입니다만."
"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정서진의 시원스러운 제안에 마이 크론의 카르본 이사는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무런 거래도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양측에 큰 틀에서 협의를 보자 나노소프트의 자이오든도 한시름을 놓았다.
"자, 그럼 협의가 됐군요. 우리 나노소프트는 마이크론에 GDDR6 램 1,000만 개를 주문하고, 마이크론은 서진파운드리에 300만 개 이상의 물량을 위탁생산하며, 서진파운드리는 자체 반도체 출시는 하지 않는다. 좋습니까?"
"네, 좋습니다."
"큰 틀이 협의가 됐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요."
카르본과 자이오든은 먼저 1,000만 개의 제품 납품 가격부터 결정했다.
"할인율을 적용해서 14억 달러에 드리겠습니다."
"할인율은 적용 안 해도 좋으니, 대신 서진파운드리에 가급적 많은 물량을 밀어주십시오."
"……."
원래 많이 주문하면 많이 깎아주는 게 업계 관행이다.
하지만 안 깎아줘도 되니까 서진파운드리에 신경을 잘 써달라니.
마이크론은 나노소프트가 저렇게 타 회사의 재정에 신경 쓰는 것은 처음 봤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 실리콘밸리가 발칵 뒤집히지 않을까 싶다.
'대체 두 회사가 무슨 관계야?'
아직 수영레스토랑과 서진파운드리의 관계를 모르는 마이크론 인물들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정서진은 자기 차례라는 듯 느긋하게 끼어들었다.
"지금 마이크론에 정식으로 납품제안서를 메일로 보냈으니 확인해 보시지요."
"알겠습니다."
제안서는 몇 페이지 안 되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쓰인 숫자를 본 순간, 카르본의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 가격이 정말입니까? 이 가격으로 납품이 가능하다고요?"
"네, 물론입니다."
"이렇게 하면 남는 게 전혀 없으실 텐데요?"
정서진이 제안한 가격은, 마이크론의 공장에서 찍어내는 생산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준이었다.
반도체를 찍어내는 그 순간부터 손해를 보는 가격이다.
정서진은 팔짱을 낀 채,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파운드리에 임하는 우리 회사의 각오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우리는 TSMC를 제치고,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파운드리 회사로 거듭날 생각입니다. 이건 초기 투자입니다."
카르본은 입술을 핥았다.
초반에 적자를 보더라도 계약을 따내고, 차근차근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겠다 이것인가?
"이 가격대로라면 차라리 1,000만 개 전부를 서진파운드리에 맡기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건 뭐 우리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위탁을 맡기는 게 무조건 이득이군요."
"저희야 1,000만 개를 전부 맡겨주시면 좋지요."
"정말입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적자가 더 커지지 않습니까? 경험 축적을 위해서라면 300만 개도 충분할 텐데요."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얼마든지 물량 전부를 맡겨 주십시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르본은 옳다구나 싶어 얼른 화색이 되어 약속했다.
이건 뭐 무조건 전부 떠넘기는 게 이익이다.
설령 서진파운드리가 실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부품을 못 찍어내더라도 나노소프트가 책임을 묻지 않는다 했으니.
***
며칠 뒤 그들은 정식 계약서와 변호사를 대동해서 다시 만나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은 당연하지만 3자 계약 관계로 구성되었다.
마이크론 입장에서는 절대 손해 볼일 없이, 무조건 이익만 챙기는 계약이었다.
덕분에 카르본과 맥콜린은 계약 체결하는 내내 싱글벙글했다.
"아직은 시범공장만 가동 가능한 상태이지만, 차세대 게임기 출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니 문제없습니다."
"그동안 우리 마이크론은 서진파운드리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일단 매출 180억 달러부터 찍고 시작하는 터라, 카르본은 마음이 넉넉했다.
마이크론과 헤어진 후, 자이오든 이사는 그제야 정서진을 향해 우려를 드러냈다.
"납품가가 너무 터무니없이 낮은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충분한 마진을 챙겨도 마이크론은 납득할 분위기였는데요."
"괜찮습니다. 지금은 얼마 안 되는 마진을 챙기는 것보다 마이크론을 길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위탁생산을 맡기고, 아주 싸게 생산품을 받았다.
자사 공장을 돌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생산을 했다.
그로 인한 높은 마진은 마이크론의 경영진을 중독시킬 것이고, 길들일 것이며, 결국 서진파운드리에 종속되게 만들 것이다.
'야, 우리 공장 돌리는 것보다 쟤네한테 만들어달라고 맡기는 게 훨씬 더 나은데?'
'우리가 직접 만들어서 100달러 남기는 동안에 쟤네한테 만들어달라고 하면 200달러, 300달러가 남아.'
이런 상황에서 경영진은 당연히 수익을 높이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물론 바보가 아닌 이상, 자사 공장을 없애는 짓은 하지 않는다.
자사의 생산라인을 일정 이상 운영하는 것은 경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안전장치니까.
막말로 하루아침에 서진파운드리 공장에 불이라도 나면, 그 피해는 마이크론도 나눠서 본다.
"마이크론 계약 건은 잘 끝났으니, 그럼 이제 엔비도와 미팅 자리를 마련하면 될까요?"
엔비도는 GPU 및 그래픽카드 생산을 주력으로 하는 반도체 회사였다.
"아뇨,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엔비도는 나중에 스스로 직접 찾아오게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자이오든은 이해한다는 뜻이 끄덕였다.
"반도체 회사 중에 거기와 사이좋은 회사는 별로 없지요. 원체 악랄하니. 잘 생각하셨습니다."
***
카르본과 맥콜린은 바로 한국을 뜨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
그들은 서진파운드리에 그래픽 램설계도를 전달하고, 대만에 있는 자사 공장에서 기술팀까지 불렀다. 자사의 생산 노하우를 전달해서 차질에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기술팀은 서진파운드리 공장을 방문할 수 없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만약 막히는 게 있으면 그때 우리가 물어보겠습니다."
정서진은 설계도만 챙기고, 그 이후에는 생산에 관한 문의가 일절 없었다.
'저러다가 초반에 대차게 말아먹을 텐데…… 하긴, 그런 것도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지.'
그리고 얼마 후,
"자, 시제품이 나왔습니다. 품질 테스트 한번 해주시죠."
"네? 벌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