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랜차이즈 갓-452화 (452/1,270)

프랜차이즈 갓 452화

114장 병원을 벗어나면 안 돼(1)

-아들아.

"……."

-아들아. 대답해야지?

"……네, 아버지."

-자, 묻겠노라. 오늘이 무슨 날이지?

"음…… 직원들 월급 전날이죠. 빨리 집에 들어가서 내일 나갈 월급 결산해야겠네요."

-어허, 그런 식으로 회피하기냐? 사람이 도망을 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어요. 두렵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몸소 부딪치고 극복할 줄 알아야지!

"오늘 컨디션이 영 별로인데 그냥 한 번 건너뛰면 안 돼요?"

-그렇게 컨디션이 별로여서 죽기 싫다고 병원에 눌러앉은 늙은이랑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떠셨어?

"으으……."

-자, 즐거운 엘릭서 복용일이다. 어서 준비하거라.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엘릭서 복용일.

하수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엘릭서 병을 꺼냈다.

처음에는 한 방울, 두 방울씩 복용했던 엘릭서는 이제 적응이 돼서 그 정도로는 별로 안 아프다.

아버지 말로는 몸이 적응을 한 것이라나?

따라서 이제 예전과 같은 효과(같은 아픔)를 느끼기 위해서는 복용량을 늘려야 하고, 지금은 소주 한 잔 정도의 용량을 마셔야 한다.

-아픔은 성장의 밑거름이다. 아픔없이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엘릭서를 수영장에 채워놓고 들이마셔도 맹물 맛이 난다고 느낄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신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야.

"주신이요?"

-아니, 최하위 신이지. 어딜 그 정도 가지고 감히 프랜차이즈 갓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럼 어느 정도가 되어야 주신이라고 할 수 있나요?"

-태양 부피 정도의 엘릭서를 하루에도 여러 번씩 쉼 없이 마셔도 맹물 맛이 난다 싶을 정도는 되어야 프랜차이즈 갓 초입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지.

"그건 제가 엘릭서를 마시는 게 아니라 엘릭서가 저를 마시는 거잖아요."

-후후, 위대한 프랜차이즈 갓이 되는 게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아들아?

하수영은 한숨을 쉬여 소주잔에 담긴 엘릭서를 주시했다.

'두 방울 마시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소주 한 잔을 어떻게 다 마셔.'

사실 아버지가 보고 있어서 소주 한 잔 용량을 마시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두 방울 용량이다.

아직 복용량이 두 방울을 초과할만큼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맨날 마시는 척만 한 까닭이다.

아직까지 별말 안 하는 걸 보면 아버지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일까?

'본체가 너무 먼 우주까지 나가셔서 와이파이가 잘 안 터지는 건가.'

-자, 쭉 들이키거라. 어서.

"네. 으으으아아아악!"

희석 엘릭서를 들이키자마자 곧바로 목구멍이 타는 듯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한참 동안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하고 난 하수영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머리야. 으으으……. 아직도 골이 깨질 거 같은……? 이게 뭐지?"

-아들아, 왜 그러느냐? 혹시 뭐가 보이니? 그렇지? 그렇지? 지금 뭐가 보이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흰도자기 그릇이었다.

얼마 전에 장효주가 선물이라고 주고 간 것.

놀랍게도 그릇 위에 홀로그램 같은 생소한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인간문화재 장영솔 장인이 182시간 동안 정성껏 빚어낸 고급 도자기]

-전통 조선백자를 장영솔 장인의 가문이 4대에 걸쳐 복원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매매 가격 : 123만 원(37일 전 거래 완료)

-최초 매입자 : 장효주

-현재가치 : 97만 원

-미래 예상가치 : 520만 원(장영솔 장인 사후 20년 후를 기준)

-특이점 :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한 처녀가 애정을 듬뿍 담아서 직접 고른 제품이다.

-남은 수명 : 약 19,200년, 파손누적 충격이 쌓이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도자기를 바라보며 의식을 집중하자, 도자기가 담고 있는 정보들이 더욱 자세히 줄줄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도자기…… 이 도자기 그릇에 대한 정보가 보여요."

-어떻게 보여? 막 너 자신이 도자기가 모래일 때부터 시작해서 반죽되고 가마에 들어가고 그래서 마침내 네가 도자기로 탄생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겪고 있느냐?

대충 들어도 아버지 은하신목의 목소리는 다급해 보였다.

"그런 걸 제가 직접 겪으면 멘탈 나가죠. 부서지고, 반죽되고, 구워지고,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냥 도자기가 가진 정보가 보여요."

-영상으로 보이냐? 막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나 가마의 모습 같은 게 보여?

"아뇨."

-그럼 소리?

"그냥 글자로 주르륵 보이는데요. 대충 간단하게 도자기가 어디서 누가, 어디서 만들었고 누가 샀고 남은 수명은 얼마고 그런 게 보여요."

-……이제 막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린 개안 단계로구나. 초입 중의 초입이다. 에휴.

"이게 뭐죠? 혹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 그런 건가요?"

-그런 하찮은 게 아니다!!

"그게 왜 하찮죠? 그리고 아무리봐도 맞는 거 같은데요? 이 도자기가 담고 있는 정체성이 주르륵 보이고 있어요. 그럼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눈, 뭐 그런 게 아닐까요?"

-어허, 아니래도, 내가 설명을 하마. 이 권능으로 말할 거 같으면…….

"앞으로 이 권능은 통찰안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본질을 통찰하는 눈, 캬, 어감이 입에 착 감기네요."

-그런 시시한 게 아니래도! 이놈아! 너는 지금 바로 내가 보유한 지식의 보고, 무제한의 정보집합에 접근할 권한을 얻은 것이야!!

하수영은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

"혹시 아카식 레코드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구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구나.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게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근사한 것이지.

아버지 은하신목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우쭐함이 깃들었다.

-일단 우주라고 하마. 아무튼 나, 프랜차이즈 갓의 권능이 닿는 모든 영역 내에서 존재했거나, 존재하거나, 존재할 예정이거나, 혹은 존재하지 못할 모든 정보를 투영하는 지식의 창고가 존재하고 있지.

"그게 아카식 레코드 아니에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기록된 초월적인 무언가요. 초우주 대도서관."

-말했잖느냐. 그보다 더 대단하고 근사한 것이라고. 인간의 인지가 닿을 수 없고, 닿더라도 해독 불가능한 것들투성이가 담긴 고대 주신의지식의 보고…….

"설마 더미 데이터(쓰레기 정보)만 가득하다는 말씀이에요?"

아버지 은하신목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 뒷목을 잡고 있는 모양이 한참 후에 아버지 은하신목이 입을 열었다.

-아들아, 너 지금 엘릭서 먹였다고 반항하는 거니? 아직도 사춘기 안지났어?

"아무튼 아카식 레코드 하이엔드버전이라는 거네요."

-……그래, 그렇다고 해두자. 개안을 해나가다 보면 너도 차차 알게 되겠지.

진한 피로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아무튼 글자로 보인다고 했지?

"네, 정신을 집중하면 더 많은 정보가 보이네요."

-짤막한 요약식이냐, 그림까지 첨부된 설계도 설명서 같은 식이냐? 장문의 논문 같은 거 말이다.

"짤막한 요약 서술형이네요."

-초입 중에서도 진짜 초입이구나. 하긴, 일단 눈을 뜬 것만 해도 그게 어디냐.

"별로 안 좋은 거예요?"

-나쁜 것도 아니지. 후계자 자질 10조 분의 1에서 이제 9조 분의 1은 되는 셈이니.

"이거 만렙 찍으면 어떻게 되나요?"

-네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자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 관해 통달하게 되지.

"통찰안이라고 부르길 잘한 거 같아요. 딱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그렇죠?"

-네 맘대로 부르려무나. 어차피 개안하다 보면 오늘의 이 날을 흑역사로 여기고 발버둥 치게 될 게다.

하수영은 한껏 재미있다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도자기 그릇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장 마지막에 뜬 문구.

-소유자 : 하수영

(현재 788,312,092,931 지구의 출생자이며 대한민국의 농민이자 부동산임대업자, 식품업 종사자, ……중 략… 132지구의 지구 황제의 환생혼 …… 중략… 1872지구의 최고 지배자이자 앱서버의 환생혼……중략…… 20,351지구에 불시착한 미래인 우주탐험자 ……중략마지막에 뜬 소유자 정보는 끝없이 줄줄이 나열되고 있었다.

그 전까지 나온 도자기의 일반적인 요약 정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길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아서 읽다가 중간에 정신 집중을 멈출 정도였다.

"틀린 게 하나도 없네. 이 권능, 진짜가 맞군요."

-그렇지? 쩔지? 대단하지?

***

왕세경은 오늘도 병원 1층 로비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인사를 나눌 만한 신참 입원자 탐색에 열심이었다.

그는 가급적 병원의 모든 신참 입원자와 인사를 나누려고 하지만, 병상이 800개가 넘다 보니 그게 쉽지가 않다.

오래된 임원들은 왜 그러냐고 잔소리를 하지만, 왕세경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다.

"하루 종일 병원에 있어 봐, 할 게 없어, 할 게."

회사야 워낙 잘 굴러가도록 시스템구축을 잘해놔서, 중요한 큰 사업을 제외하고는 그의 판단을 필요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웬만한 것은 전무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된다.

부회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아들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지만, 그때 병원 정문을 막 들어서는 하수영의 모습에, 왕세경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한달음에 하수영을 향해 다가갔다.

"이보게, 하 코다. 오랜만이야."

"아, 환자분. 안녕하셨습니까. 좋아 보이시네요."

"크흠! 그렇다고 날 쫓아낼 생각은 하지 마시게! 죽을 때까지 여기 눌러 붙어 있을 거니까!"

"병원 적자 해소에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인데 왜 쫓아냅니까. 얼마든지 머무르세요. 그런데 지루하시진 않을까 모르겠네요."

"울타리 밖을 못 벗어나니 조금 지루하긴 개뿔, 언제 심장 멎을지 몰라서 조마조마하는 것보단 훨씬 낫네."

왕세경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매일 새로운 사람들 만나서 직접 부딪치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고, "

"세경그룹 회장이시면 항상 많은 사람들을 접하셨을 텐데요."

"나한테 굽실거리는 놈과 나를 이용하려는 놈들, 딱 그 두 분류뿐이었지. 하지만 여기는 적어도 그런 사람은 없네. 날 환자 왕세경으로 대해주지."

하수영을 보는 왕세경의 눈빛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자네 왜 진짜 신분을 말안 했나?"

"무슨 말씀이신지?"

"다 들었네. 자네가 이 병원 이사장이라면서? 청담동 부동산 큰손이며, 프라임그룹 오너이고, 강남구의회 의원이자, 우리나라 국민들의 식탁을 움켜쥐고 있는 최고의 농민 재벌이라고 말이야."

"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병원 코디네이터라고 소개한 건가?"

"병원 코디네이터도 맞는데요."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환자분은 비즈니스 자리에서 본인을 세경그룹 회장이라고 소개하실 겁니다. 그렇지요?"

"당연하지."

"사모님의 친구들을 만날 때는 누구누구의 남편이라고 소개하십니까, 세경그룹 회장이라고 소개하십니까?"

순간 왕세경은 말문이 막혔고, 하수영은 거듭 물었다.

"절친의 손주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너희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라고 소개하십니까, 아니면 세경그룹회장이라고 소개하십니까?"

왕세경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저는 그때 병원 코디네이터로서 환자분을 만난 것이니, 당연히 코디네이터라고 소개한 것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적 명함은 불필요한 자리였지요."

"허허, 이거 참……."

이야기를 섞으면 섞을수록 마음에 든다.

내가 이런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심장이 그렇게 아팠던가 하는 망상까지 스칠 정도다.

"알았네. 내가 엉뚱한 소리를 했어. 주책 맞게시리."

"아닙니다."

"자네 말이 옳아. 나도 여기서는 세경그룹 회장이 아니라 2001호 입원 환자일 뿐이지."

"우리 병원에서 가장 많은 병원비를 내는 VIP환자시죠."

"자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병원의 주인이고 말이야."

둘은 어느덧 병원 야외 휴게실로 이동해서 자판기 캔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수영은 캔커피를 입에 대고 왕세경을 가만히 살피다가 가볍게 정신을 집중했다.

왕세경에 관한 요약 정보가 줄줄이 떠올랐다.

[왕세경]

이름, 성별, 나이, 출생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가족 관계, 자산 내역, 범죄 유무 등 다양한 정보가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하수영의 눈을 가장 잡아끄는 정보가 있었다.

-남은 수명 : -4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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