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22화
107장 농사짓는 트롤(2)
"선배님 같은 분이 이렇게 좌천되시다니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조성만 검사가 분개를 터뜨렸다.
임탁정 검사는 그저 허허롭게 웃기만 했다.
자신을 배웅 나온 동료 검사는 조성만 한 명이지만, 그는 조금도 기분 상하지 않았다.
"죄다 재벌가 눈치만 보는 겁쟁이 들만 모여 있는 골에, 백로가 쫓겨나야지 별수 있나? 그래도 난 만족해. 그 약쟁이 그룹이 나 때문에 이천억 넘게 손해 봤다며?"
삼화제약 대표도, 그 마누라(라테딸)도 감옥에 보내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오너 일가 개망신 덕분에 라데그룹에 발생한 이천억 원이 넘는 손실.
임탁정으로서는 나름 뿌듯한 성과였다.
'이건 벌금 이천억 원을 먹인 거나 다름없지.'
라테회장이 길길이 화를 내면서 모두 다 뒤집어엎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룹 내에 흉흉한 분위기를 만드는데도 성공했으니, 뭔가 큰 이정표를 찍은 느낌이다.
"내가 검사 생활을 더 오래 했어도 이보다 더 큰 실적은 못 냈을 거야. 어느 정도는 만족해."
"그래도……."
"제주도에도 마약하는 놈들은 있을테니, 이제 부지런히 그놈들이나 잡으러 다녀야지."
제주도 좌천은 라테 일가에서 손을 쓴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탁정은 오히려 기꺼워하는 듯이 보인다.
자신도 한 방 카운터를 맞았지만, 그 전에 열 방 정도 때려준 것 때문인가 보다.
그때였다.
"우리가 안 늦었군. 다행이야."
"법원장님?"
놀랍게도 전 고등법원장 박호진 변호사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것이다.
임탁정은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서 조성만을 바라봤다.
"설마 자네가 연락드린 거야?"
"네, 제가 연락드렸습니다."
"법원장님, 어떻게 이런 곳까지……."
까마득한 기수와 연배 차이 덕분에 임탁정은 박호진 변호사와 그리 깊은 친분은 없었다. 공석에서 마주치면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정도다.
"하수영 의원님이 내 주요 클라이언트셔서 말이야. 자네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배웅은 한 번 해야겠다고 하셔서. 곧 이리로 오실 걸세."
"그것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술 한 잔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신다고 의원님이 서운해 하셨습니다."
"그분이 여기 오신다고?"
임탁정은 뭉클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처음 핀익스 클럽에서 하수영을 마주쳤을 때만 해도, 그냥 돈 많은 철부지가 세상을 우습게 본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가 준 결정적인 제보 덕분에 라테그룹이라는 배후도 밝혀내고, 이천억이 넘는 한 방도 먹일 수 있었다.
진세주가 대한민국에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다니게 개망신을 준 것도 한몫했다.
그런데 공항까지 자신을 배웅하러 온다니,
"아, 이제 도착하셨군. 비행기 시간은 괜찮은가?"
"탑승 수속을 하려면 늦었습니다만, 까짓거 다음 비행기 타죠. 비수기라서 좌석은 많습니다."
"잘 생각했네."
이윽고 거대한 흰 캠핑카가 위풍당당하게 공항 로비 출입구를 향해 다가왔다.
좀처럼 보기 드문 차종에 공항 관리요원들도 신기해서 멍하니 쳐다봤다.
하수영이 운전석에서 내리자, 캠핑카는 운전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저절로 스르륵 움직여 주차장으로 향했다.
"임 검사님, 제주도로 좌천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거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늘 있는 일입니다. 재벌들 심기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가는 남은 인생이 두고두고 고달프죠."
"그런데 알면서도 용감히 칼을 휘두르셨군요."
"약쟁이들을 때려잡는 것만큼 통쾌한 일은 없거든요.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같은 선택을 하면 안 되죠.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라테그룹 진씨 일가를 모조리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 셔야죠. 검사님을 제주도로 쫓아낸 놈들인데요."
"하하,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
하수영은 미간을 가늘게 찌푸린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심오한 분위기에 임탁정은 억지웃음을 그치고 조용히 눈치만 살폈다.
"잠시 오실까요? 제가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전 공직자입니다."
"저도 공직자입니다. 그걸 모를까요."
"……."
"탈 날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임탁정은 궁금증이 머릿속에 가득찬 채 조용히 하수영의 뒤를 따랐다.
하수영이 향한 곳은 공항 내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복권 코너로 향한 하수영은 임탁정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로또 몇 게임 하시죠."
"네?"
"몇 게임만 하세요. 혹시 알아요? 당첨이라도 될지?"
임탁정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로또 용지를 꺼내 들어 마킹할 준비를 했다.
"제가 한 번 찍어볼게요. 2, 3, 4……."
임탁정은 하수영이 불러준 6자리 숫자를 모두 마킹했다.
하수영은 흘끗 보고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한 게임 가지고 되겠습니까? 10게임 정도 하시죠."
"전부 같은 숫자를 적으란 말입니까?"
"네, 제가 오늘 아침에 꾼 꿈에서 나온 숫자입니다. 검사님께 제 꿈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임탁정은 픽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탈이 날 일이 없다는 선물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좋은 꿈 한 번 꿨다고 당첨될 리가 없을 테니, 그냥 꿈 선물을 빌미로 친분을 쌓자는 의미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의원님이 주신 꿈,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확실하게 제가 꿈 넘겨드렸습니다."
"꿈 확실하게 얻으려면 제가 커피라도 한 잔 사야겠네요. 부정을 타면 안 되니까요."
시간을 보니 저녁 7시 55분, 판매 마감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앞두고 있었다.
동일 숫자로 10게임을 구매한 임탁정 검사는 하수영과 캔커피를 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아쉽습니다. 다른 시간 축에서 만났더라면 라테일가를 어떻게 제주도에 몰아넣을까 함께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었을 텐데, 제가 요즘에는 예전처럼 막 열정적이지가 않아서……."
"네?"
"그래도 이놈들 하는 거 보니 조만 간에 제 코털을 뽑을 거 같아서요. 그때는 제가 검사님께 SOS를 치겠습니다. 한걸음에 달려와 주시리라 믿습니다."
"라테그룹이 괴롭힌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미력한 힘이지만 멀리서나마 의원님을 돕겠습니다."
물론 임탁정은 자신이 도울 일이 진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수영과 라테그룹이 서로 얽힐 일도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하수영이 가진 힘이나 인맥에 비하면 자신이 가진 것은 초라한 것이었으니.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아무래도 졸부 집안 하나 상대하는데 대행성 병기를 사용했다가는 자칫 다 태워 버릴 수가 있어서 걱정이었는 데……."
"네?"
"아무튼 제주도에서도 몸 건강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제가 우리 농장 특산물을 틈틈이 생겨드릴게요."
하수영과의 대화는 아리송함만을 남긴 채 그렇게 끝났다.
임탁정은 조성만, 박호진과 다시 한번 인사를 한 뒤 탑승수속을 마쳤다.
다행히 다음 비행기로 티켓을 새로 끊을 필요는 없었다. 약간 아슬아슬했지만 무사히 예약한 비행기편에 탑승할 수 있었다.
제주공항에 내리자 시간은 저녁 9시 30분을 조금 넘겨 있었다.
출국 게이트를 통과한 임탁정은 공항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스마트폰 비행기모드를 고기가 무섭게 아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도착했어?
"어, 지금 비행기 내렸어."
-이제 가면 얼마나 있는 거야? 3년? 그 정돈 있어야 되지?
"3년 일 수도 있고, 13년일 수도 있고, 그거야 윗분들 마음이지."
-내가 못 살아. 맨날 마약쟁이들만 실컷 쫓아다니느라고 집안일을 등외시하더니, 이제는 제주도까지 쫓겨나? 당신이 라테그룹에 단단히 찍혀서 앞으로 출셋길 막혔단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그만해. 나중에 이야기하자. 애들은 자?"
-이 시간에 자겠니? 아직 열 시도안 됐는데, 응?
귀청이 터질 듯한 잔소리가 다다다다. 쏘아지자 임탁정은 스마트폰을 얼른 뒤에서 10m 이상 떨어뜨렸다.
-내가 어제오늘 당신 짐 싸면서 얼마나 우울했는지 알아? 공항에 동료 검사들은 한 명도 안 나왔지?
"그래도 몇 명 나오긴 했어."
-내 팔자야. 나라도 갔어야 하는데 애들 땜에 그러지도 못하고, 내가 속상해서 안 사던 로또까지 샀는데 죄다 꽝이야. 번호가 하나도 맞는 게 없어. 번호가 뭐 이 따위야? 2, 3, 4, 5로 시작하는 게 말이 돼?
순간 임탁정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내 팔자가 사나워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고시 뒷바라지해서 검사 만들어놓은 서방은 약쟁이나 쫓다가 좌천되지, 애들은 아프지, 팔자에 없는 장거리 부부는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지…….
"잠깐만, 잠깐만."
임탁정은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벌써 번호 4개가 맞아버렸다.
4개 일치라고 해봐야 5만 원씩 25만 원, 하지만 아직 남은 번호 둘은 확인을 못 했다.
임탁정은 진화를 잠시 끄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당첨 번호를 조회했다.
타이핑을 치는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폰을 떨어뜨릴 듯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당첨 번호를 확인하고, 용지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임탁정의 두 커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이, 1등! 1등 10게임! 맙소사! 신이시여! 아니, 하수영 의원님!"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확인했지만 틀림없었다.
하수영이 꿈에서 봤다는 번호 여섯개가 모두 일치했던 것이다.
1등 10게임.
한 게임당 겸손하게 10억으로만 잡아도 100억이다.(물론 세금은 별도)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 있던 임탁정은 부리나케 등을 돌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하루 쉬고 내일 출발할걸!"
누가 김포공항에서 산 로또가 제주공항으로 날아가는 동안 당첨될 줄 알았겠냐고.
어차피 당첨금을 수령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
용지를 오래 갖고 있으면 불안하기만 하니, 다음 주 월요일에 연차 내고 재빠르게 수령할 참이었다.
부리나케 공항으로 돌아간 임탁정은 비행기편이 없다는 대답에 좌절했다.
"야간발은 더 이상 없다고요?"
"네, 없습니다. 가장 빠른 비행기는 내일 새벽 6시 30분입니다."
"그럼 그거라도 빨리 끊어주세요. 어서요!"
티켓을 즉석으로 발권한 임탁정은 떨리는 손으로 로또용지를 꺼내 다시 한번 숫자를 확인했다.
아예 폰으로 사진을 찍은 뒤 용지 2장을 지갑 안에 깊숙이 넣고, 지갑은 다시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단주까지 잠갔다. 이러면 절대로 잃어버릴 일은 없으리라.
사진에 찍힌 회차번호, 숫자, 그리고 당첨 번호를 스무 번은 더 확인한 후,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새벽에 바로 서울 올라가."
-내려가자마자 왜 다시 올라와? 뭐 중요한 거 빠뜨린 거야?
"그게… 놀라지 말고 들어, 여보. 내가 오늘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타기 전에 로또를 샀는데…… 그게 당첨이 됐어."
순간 스마트폰 너머로 사람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진 후,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당신 이거 거짓말이면 진짜 죽는다! 내가 당신 죽여 버릴 거야! 거짓말 아니라고 말해!
"거짓말 아냐. 당첨이야. 어차피 그거 찾으려면 서울 가야 되니까 지금 다시 올라가는 거야."
-세상에! 1등이라니! 그럼 우리 집 대출 이번에 한 방으로 정리할 수 있는 거지? 맞지? 어머어머, 지금 인터넷 보니까 이번 1등 당첨금이 42억이래!
"뭐? 42억?"
-세금 제해도 28억이야! 꺅! 검사박봉 인생에 드디어 살길이 피는구나! 당신, 이제 와서 거짓말이라고 하면 이혼이야, 이혼!
"……."
임탁정 검사는 수동 10게임 당첨이라는 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