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09화
103장 음지에서 피어난 (1)
"근데 반도체 파운드리에는 얼마나 투자하신 거예요?"
호텔 룸에 들어와서 룸서비스를 깔고 자리를 잡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이었다.
"적당히 부족하지 않게 넣었습니다."
"파운드리라는 게 1, 2조 원 가지고 되는 게 아닐 텐데요. 괜찮겠어요?"
"저도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저희 오빠가 엄한 말로 수영 씨속여서 투자금 날리는 게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시고요."
"외국에서 대학원 생활 잘하는 서진 씨를 감언이설로 제가 꼬드긴 것이니, 그런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아, 진짜 궁금하네요. 파운드리 해서 정말 크게 성공할 자신은 있는 거죠? 투자금만 날리면 안 되는데. 제가 수영 씨 볼 면목이 없어요."
"걱정 마세요. 그나저나 요즘 프라임오일이 번 돈이 죄다 빠져나가서 가슴 아프시죠?"
정서희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조금 배가 아프긴 했어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 죄다 병원 운영으로 바져나가니까요. 아, 사실 거저 얻은 기름 팔아서 번 돈이니 열심히 일한 건 아닌가?"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건가요?"
"이번에 이상 기변 때문에 나라가 엄청 혼란스러웠잖아요. 우리 수영병원 아니었으면 최소 수백 명에서 천 명 이상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도 많고요. 그 이야기 들으니까 저도 가슴이 뿌듯하더라고요. 비극을 잘 막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병원이 우리 프라임오일자식 같아서 기특해요. 혹시 부족한 최신형 의료설비 같은 것은 없나 하고 해외 메디컬 시장을 자주 뒤져봐요."
"부사장님이 신경 써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근데 왜 자꾸 부사장님이라고 불러요? 저는 수영 씨라고 꼬박꼬박 부르는데? 수영 씨, 장효주 배우한테는 안 그러시잖아요?"
"……."
"저도 장효주 씨처럼 이름 불러주세요."
하수영은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정서희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내내 가슴이 콩닥거렸다.
오늘 클럽을 탐방하며 함께 보낸 시간, 자신이 몰랐던 의외로 단단하고 단호한 그의 모습, 그리고 혈관을 유영하는 알콜의 기운…….
그 모든 것이 힘을 합쳐 지금 그녀에게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그러죠. 앞으로는 서희 씨라고 부를게요."
그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하수영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이제부터는 핀익스 위주로 탐방을 할 건데, 서희 씨는 어떻게 하실래요?"
"저도 따라가도 되죠? 혼자 가면 너무 모양새가 안 나잖아요."
아까 술 동냥하던 그 기집년들 같은 것들이 또 달라붙을 수도 있고, 물론 이 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가수 아이리스는 자기 클럽에서 그런 거래가 벌어지는 것을 알까요?"
"알 리가 없죠. 그리고 아마 투자 조금 하고 간판 역할 맡은 바지사장일 거예요. 원래 그런 대형 클럽은 강남 지하 큰손들이 힘을 합쳐서 설립하거든요. 혼자 해 먹기에는 위험부담이 크죠. 경찰에 기름칠도 해야 하고 하니까."
"이야, 서희 씨가 그쪽으로 잘 아시네요."
"수영 씨도 아주 모르지는 않잖아요?"
정서희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반박했고, 하수영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일단 핀익스 진짜 소유자들이 누구인지부터 먼저 체크해야겠습니다."
"아이리스한테 가서 물어봐도 안알려줄걸요? 아마 본인도 자세히는 모를 거예요."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죠."
"아이리스보다는 소속사를 찾아가서 담판을 짓는 게 나을 거예요. 그쪽 소속사가 원래 약국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그런 지저분한 쪽으로는 유명하거든요."
"어디 소속사인데요?"
"원스타엔터테인먼트요."
"……."
하수영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 무슨…….'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인가.
원스타엔터테인먼트.
지금은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백호열이 설립하고 운영한, 국내 최대의 대형 연예기획사.
그리고 백호열의 첩인 홍윤주가 운영하는 텐프로가 하수영의 3호기 빌딩 지하에서 영업하기도 했었다.
하수영은 키득거리면서 비어 있는 정서희의 잔을 채워주었다.
"아이리스를 찾아갈 필요는 없겠네요. 괜히 풀 쳐서 뱀만 놀라게 만드는 꼴이 되겠어요."
"맞다. 그러고 보니 수영 씨가 원스타엔터테인먼트하고 살짝 얽힌 적이 있다고 전에 들은 것 같은데."
"네, 거기 사장의 애인이 질 나쁜 세입자라서 제가 내보내려다가 가벼운 트러블이 있었지만, 잘 해결됐죠. 그런데 이렇게 또 얽히네요."
"근데 백호열 사장은 감옥 갔잖아요?"
하수영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원스타엔터테인먼트는 백호열의 오른팔이었던 정동준이 운영하고 있다.
수영레스토랑 영업정지 처분에서 시작된 비리 스캔들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끝에 백호열을 감옥으로 보내놓은 것이다.
당시에 여당 대표 보좌관이 당 대표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물론 백호열은 어떻게 해서 일이 그렇게 크게 번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지만, 지금 백호열은 감옥에서 정동준을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정동준은 이미 등을 돌린 지 오래다.
백호열이 배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아마 출소한 이후가 될 것이다.
수감 생활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하라는 정동준의 배려였다.
그리고 홍윤주는 사실관계 남편이나 마찬가지인 스폰서가 수감 중이지만, 여전히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것이다. 워낙 가진 게 많으니까.
"그 회사는 주인이 감옥에 갔는데도 여전하군요."
***
화이트 스카치 판매 정산.
원래 홍윤주는 일일 정산이 아니라, 일주일이나 2주에 한 번 중간 정산에 관여한다.
하지만 오늘은 판매량이 워낙 컸다.
11억 원이 넘는 매출이 갑작스럽게 포함되었으니.
"큰손은 큰손이네. 오늘이 첫 구매는 아니지?"
"며칠 전에 한 번 구매를 했었는데, 그때는 천만 원어치 단위로 구매를 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구매고요."
"효과가 마음에 들었나 봐."
홍윤주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얼굴로 현찰 다발을 세면서 그리 말했다.
"차는 뭘 탔다고?"
"국산 세단이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있더군요."
"괜찮네. 진짜 알짜배기들이 그런 차를 자주 타지. 이쪽 사람은 아닌가 봐."
음지에 몸을 담고 있는 이라면 자신의 부를 한껏 과시하기 위해 수입차량을 선호한다.
홍윤주는 새 VIP가 아마도 양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차를 타는지는 중요해. 그게 허세는 실속이든 가짜든,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니까."
"네, 사장님."
"숫자 맞네. 일어나자."
홍윤주가 일어나자 남자는 김광수는 현찰 다발을 몇 개의 큼지막한 백에 쓸어 담았다.
덩치 좋은 남자 부하 몇몇이 백을 나눠서 짊어진 채 홍윤주와 김광수의 뒤를 따랐다.
대기 중이던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탑승한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윤주야.
"회장님, 지금 수금 끝났어요."
-그제인가 수금하지 않았나?
"오늘 큰손이 하나 생겨서요. 혼자서 11억어치 넘게 구매했대요. 젊대요. 이십 대 초반?"
-좋아, 좋아. 이제 슬슬 재벌 2, 3세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나 보구만, 물량을 좀 더 준비해야겠는데.
"광수대는 좀 어때요? 잠잠한가요?"
-경찰이야 아직 감지 못 했지. 강남하고 역삼에서 커버 쳐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단속 뜨면 박형사가 제일 먼저 알려줄 거야.
"이제 슬슬 물량 채워야 되는데. 오늘 바닥 쳤어요."
-김 실장한테 내가 연락하지. 참, 이번 주말에 쇼핑간다고?
"네, 한정판 버킨백 공수해서 진열한대요. 구경이라도 하러 가야죠."
-사고 나한테 영수증 보내.
"어머, 4억이 넘는 건데. 고마워요."
-지금 집에 바로 가지? 나도 곧 갈 테니까 기다려.
"알았어요. 씻고 기다릴게요."
김광수가 맞은편에 앉아 있지만 홍윤주는 태연히 남자와의 대화를 마쳤다. 마치 그가 사람이 아닌 장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핀익스는 요즘 문제없지?"
"네, 수질 관리도 잘되고 사고도안 나고,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애들이 놀러 가면 잘 좀 봐줘. 혹 애먼 사고 안 휘말리게. 얼굴 모르는 애들은 없지?"
홍윤주가 운영하는 텐프로 아가씨들을 말하는 것이다.
김광수는 알았다는 듯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사장님."
"회장님 지금 우리 집 오신다니까 저녁에 모시러 오는 거 잊지 말고, 정동준 대표 내일 일정은 어떻게 돼?"
정동준은 현 원스타엔터테인먼트대표였다. 지금은 감옥에 간 백호열의 오른팔이었다가 그의 공백기를 대체하는 중이다.
"지방 출장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아마 서울에만 있을 겁니다."
"아이들 좀 수급해야 되는데, 요새 영 통발이 시원치 않네. 돈 좀 필요한 지망생들 없어? 무명 중고신인도 괜찮고."
"정 대표가 그런 것에 매우 민감해서요. 지금도 걸핏하면 아이리스더러 클럽에서 손 떼라고 은근히 압박한답니다."
홍윤주는 가볍게 혀를 찼다.
"사람이 능력은 좋은데 너무 샌님이라서 별로야. 큰돈 되는 게 뻔히 눈앞에 있는데 왜 그렇게 질색을 하는지 몰라."
"원래 사람은 각자 쓰임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홍윤주는 어느덧 저택에 도착했다.
그녀의 집은 한남동 고급 빌라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24시간 삼엄한 보안을 자랑하는 빌라 단지 다수가 묶여 있는 동네이다 보니, 사생활 노출을 꺼려 하는 연예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곧 도착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약 2시간 후, 아침이 밝아오는 무렵 검은 국산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홍윤주는 미소를 지은 채 창문을 통해 뒷좌석에서 내린 풍채 좋은 60대 남성을 내려다보았다.
몇 분 후 픽픽 버튼음이 울리며 60대 남성이 들어섰고, 그녀는 활짝 웃으며 달려가서 안겼다.
"우리 윤주, 오늘따라 얼굴에 물이 올랐네?"
"이게 다 회장님이 매일 좋은 것만 먹여주셔서 그런 거죠. 감사해요."
나이로 보면 부녀뺄이지만, 둘은 오랜 연인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재킷을 받아 들던 홍윤주는 남자의 스마트폰이 진동하자 발신자를 보고 흠칫했다.
"회장님, 받아보셔야 할 거 같아요."
"대충 꺼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택양 실장 전화예요."
60대 남자, 곽철태의 안색이 잔뜩 구겨졌다.
정택양은 오랫동안 그를 수행한 비서였다.
그가 이렇게 이런 아침에 전화를 해서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작은 일이 아니었던 적도 없었다.
"택양아, 무슨 일이냐?"
-회장님, 저 지금 삼성동 오피스텔입니다.
"네가 왜 거기 있어? 준용이가 또 사고 쳤어?"
정택양이 삼성동 오피스텔이라고 하면 칭하는 것은 딱 하나, 그의 19살 늦둥이 아들이 아지트로 쓰는 집이었다.
친구들하고 놀 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놀라고, 18살에 생일선물로 사 준 수십억짜리 오피스텔이었다.
그래도 아지트랍시고 오피스텔에서 사고를 친 적은 한 번도 없었는 데…….
-친구들하고 약 파티를 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이제는 약까지 손을 대? 안 되겠어. 당분간 오피스텔도 출입 못 하게 하고 집에만 있게 해. 친구들도 만나게 하지마."
-여자애 한 명이 죽었습니다. 급성마약 중독인 거 같습니다.
"……."
잠시 침묵을 흘리던 곽철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지시했다.
"청장한테 연락, 아니, 그건 내가 직접 하지. 택양이 너는 현장 깨끗이 처리해. 명심해라. 죽은 사람은 없는 거다."
-그런데 여기에 스카치가 있습니다. 준용이가 클럽에서 구매한 모양입니다.
"말이 돼? 그걸 먹었는데 왜 죽었다는 거냐?"
-이거 말고도 이것저것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다른 마약을 먹고 발작한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