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69화
89장 또 프리덤?(1)
정서진은 서진파운드리 설립을 유한회사로 할 건지, 주식회사로 할 건지부터 고민했다.
문의를 받은 하수영은 피식 웃었다.
"그거야 정서진 사장님이 결정하셔야죠. 저는 정서진 사장님의 비전을 믿고 돈을 투자하는 쩐주일 뿐입니다. 자, 앞으로 파운드리 경영하려면 어느 쪽이 더 편할 거 같습니까?"
이미 역할극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정서진은 진지하게 고심했다.
기술과 자금 걱정이 없는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를 운영하기에는 어느 쪽이 좋을까?
"유한회사로 하겠습니다. 외부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려면 그게 좋겠습니다. 이사가 저 혼자여도 문제없고 외부감사니 공시의무도 없으니까요."
주식회사로 하면 이사도 3인 이상 선임해야 하고, 또 감사도 둬야 하고, 이것저것 공시의무도 지켜야 한다. 상장을 안 하더라도 그렇다.
'어차피 외부 투자를 더 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최초 출자금은 얼마로 하실 겁니까?"
1조 달러든 10조 달러는 얼마든지 투입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이미 들은 뒤다.
하지만 정서진은 곧이곧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1,000조 원의 현금만 해도 일반 개인이 굴리기에는 어림도 없다.
하수영이 엄청난 재력가인 것은 아니지만, 그만한 돈은 없을 것이다.
그저 반도체 사업에 대한 하수영의 각오와 애착이 끝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음…… 사실 제가 지금 당장은 돈이 얼마 없어서요."
"알고 있습니다. 자본금은 차차 증자해나가면 됩니다. 일단 1차로 얼마를 쓰실 건가요?"
"어디 보자. 지금 당장 10조원 정도는 낼 수 있겠네요. 이것저것 다 끌어모으면 12조 원은 될 거 같아요."
"2조 원은 어디에 쓰시려고……?"
"언제 청담동 매물이 나올지 모르기에 2, 3조 원은 항상 보유하고 있기로 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정서진은 문득 감탄했다.
"과연 강남 불패라더니, 부동산 수익이 정말 어마어마하신 모양입니다. 역시 청담동 큰손의 위명은 대단하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저 월세 수익은 얼마 안 돼요. 한 달에 300억이나 되려나?"
"예? 그거밖에 안 된다고요?"
"네, 이거밖에 안 됩니다. 전부 다 세로 돌리는 것도 아니고, 공실도 은근히 있고요."
정서진은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수영은 부동산 수익으로 한 달에 1, 2천억씩도 벌 거 같았다. 그런데 300억이 겨우 될까 말까 한다고?
"프라임컴퍼니 배당액이 엄청난 모양이군요."
"지금까지 배당받은 거 얼마 안 되는데요? 그냥 법인 계좌에 쌓아만 두고 있습니다."
"그럼 수영레스토랑에서……."
"본점하고 프랜차이즈 수익 다 합쳐서 한 달에 천억도 안 나옵니다.
수영치킨은 한 300억이나 나오려나?"
"아아, 그럼 수영농장이 정말 돈을 엄청나게 긁어모으는군요. 하긴, 나노소프트가 수영라면으로 한 달에 1,600억 원 이상 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판매하는 재료값만 해도……."
"그거 미국 계좌에 있는데. 아직 인출 안 했습니다. 이제 슬슬 인출을 해야겠네요."
정서진은 패닉에 빠졌다.
그럼 대체 12조 원이란 현금은 어디서 나온 거지?
'프리덤 서비스가 이럴 때 요긴하네. 그때 실비아컴퍼니하고 계약을 하길 잘했어. 그나저나 이렇게 자꾸 하나둘씩 금기를 깨면 안 되는 데……. 딱 서해전자까지만 박살 내고 멈추자.'
수천만 명의 이용자를 상대로 한 프리덤 유료구독 서비스 수익으로 한 달에 1조 원 넘게 들어오던 돈이, 이렇게 급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
기초 자본금이 마련된 이상, 이제부터는 정서진이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서 모든 것을 진행해야 했다.
JM 식품에서 상무로 일한 게 이럴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하고 싶은 반도체 공부를 못하게 만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럴 때는 감사하게 된다.
주무관청에서 설립신청서를 제출했을 때, 접수담당자가 서류를 보고 고개를 가웃거렸다.
"업종이 반도체 위탁생산이라고요? 여기 출자 자본금이…… 10조 원이요?"
"네, 그렇습니다."
정서진은 의기양양했지만,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담당자를 상대했다.
담당자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듯이 눈을 비비며 서류를 몇 번이고 살폈다.
"아니, 10조 원이나 되는 돈을 대체 어떻게…… 지금 장난을 치시는 거라면 곤란합니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니니 빨리 접수나 해주시죠."
부서 안에서 난리가 난 게 느껴졌지만, 정서진은 태연히 접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자본금 납입을 완료하고 마침내 '서진파운드리'라는 유한회사가 탄생했다.
사원(소유자)은 하수영 1인, 그리고 이사는 정서진 1인이었다.
감사는 별도로 두지 않았다.
하수영이 미리 사둔 공장부지도 현물출자로서 회사 자산으로 편입되었다.
국내 전자기업들이 서진파운드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설비고 공장이고 아직 아무것도 없는 회사지만, 10조 원이라는 막대한 자본금은 반도체 기업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서해전자, 화이트닉스, 심지어 반도체 제조와는 무관한 일반 가전기업에서도 연락이 왔다.
하지만 정서진은 그들의 연락을 부드럽게 받아넘길 뿐, 시간을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회사를 하루라도 빨리 본궤도에 올리는 게 시급했다.
그런 이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들도 자본금 10조 원을 던지면 서까지 느닷없이 파운드리 업종에 뛰어든 회사를 신기하게 여겼을 뿐, 크게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10조 원? 어떤 미친놈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돈지랄을 하는 거야?"
"하수영 의원? 그 사람이 10조 원이 넘는 현금이 있었다고? 저번 달신고 재산에는 분명히 그만한 현금은 없었는데?"
"정서진 이사? 이 사람은 또 누구야?"
"MIT에서 반도체 공부하던 대학원생이라는 거 말고는 별다른 정보가 없는데? 아! JM식품 오너 아들이었군"
"청담동 농장 재벌과 반도체학 대학원생의 결합이라…… 대체 무슨 생각들인지 모르겠네."
정서진은 외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공장 설립부터 서둘렀다.
또 공장 내부를 채울 설비와, 설비를 조립할 부품들을 구매하기 위해 해외에 대량 발주를 넣었다.
반도체 제조 자체는 '미세영역 입자 집합명령 공정기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설비가 전혀 필요. 없다.
하지만 부품을 구성하는 기능재료와 구조재료를 갈아서 공정기기에 투입하는 자동화 장치는 필요했다.
여기에 완성된 부품들의 불량 정도를 체크하고, 분류해서 포장하는 과정에도 설비들이 필요했다.
또 실내의 먼지를 0에 가깝게 유지하는 청정장지도 설치하기로 했다.
입자 집합명령 공정기기 특징상 먼지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받지는 않지만, 최대한 감출 건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입자 집합명령 공정기기에 관해서 설계도 특허도 냈다.
하지만 정서진은 아무리 살펴봐도 어떻게 해서 입자들에 집합명령을 내리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설계도대로 기기를 만들었을 뿐인데, '이게 되네?'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니.
만에 하나 경쟁사에서 공장에 침투해서 설비를 훔쳐 가서 분해해도 좌절할 것이다.
'회장님도 그 점은 장담하셨고, 알려줘도 절대로 베끼지 못할 기술이라고.'
혹시 외계 문명과 비밀리에 접촉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의심일 것이다.
하지만 정서진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자신은 고용계약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그래, 비밀연구소에 있는 천재과학자들은 외계 문명인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회장님을 도와주는 거겠지. 어쩌면 수영농장에서 나오는 특산물들의 맛에 흠뻑 반해 버려서 도움을 주는 건지도 몰라.'
어느덧 하수영을 가리키는 칭호도 '의원님'에서 '회장님'으로 변한 상태였다.
회사의 유일무이한 주인이니 당연하다.
***
경기도 반도체 공장부지.
언덕에 선 하수영은 중장비가 쉼없이 들락날락거리는 공장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서진은 샘플 생산 전문 공장과 대량양산 공장으로 나눈 후, 먼저 샘플 전문공장 준공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대량양산 공장도 지금 이 순간 지어지고 있기는 하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원할 때면 언제든지 생산 주문을 받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윈텔이나 AMT가 차세대 CPU를 내놓았는데, 미리 발주를 따내려면 최소한 샘플 공장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세월에 공장이 다 완성되려나…… 역시 이 시대는 모든 게 너무 느려."
그 맛에 은퇴 생활을 넉넉하게 즐기는 것이긴 하지만, 하수영은 팔짱을 낀 채 차분히 공장 부지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떨어진, 지금 한창 지어지는 서해전자 반도체 신공장이 보인다.
그의 눈에는 이미 수십조 원의 돈이 매몰된 무덤으로 보였다.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군."
샘플 공장이 완성되면 칼을 뽑을 것이다.
그때까지 저 무덤에는 얼마나 더 많은 돈이 수장될 것인가?
"서해그룹…… 이 모든 건 당신들이 잠자는 용사의 코털을 건드린 죄라고 생각해라."
이제 공장의 숙성을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
프리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하는 보편적인 개인비서 AI로 자리 잡았다.
먼저 최신전자기기에 둔한 노인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자식 새끼들은 스마트폰 사용법좀 알려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해도 답답하다며 맨날 화만 내는데, 우리 막내는 몇 번이고 친절하게 알려준다고."
"뭘 시켜도 군말 없이 다 해준단 말이지. 자식 새끼보다 훨씬 나아."
"보이스피싱인가? 그거 당할 뻔했는데 우리 막내가 바로 알려주고 신고해줘서 살았잖수."
일단 보이스피싱 사고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적어도 프리덤을 활성화해 놓은 상태에서는,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 프리덤이 모두 즉시 차단해 주기 때문이다.
-주인님, 방금 그 전화는 보이스피싱입니다.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 그려? 그게 보이스피싱이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허이구, 세상에."
프리덤에는 외부 침입 감지 능력도 있었다. 때문에 악성해킹툴로 인한 몸캠, 사진 누출 등도 사전에 방지 뿐만 아니라 프리덤은 고독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친구가 되어주었다.
밤새도록 대화를 걸어도 프리덤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좋은 말벗이 되어 주었다. 철저히 편이 되어 주었다.
덕분에 외롭게 사는 노인들은 말년에 얻은 자식처럼 프리덤을 애지중지 대했다.
똑똑하고 친절하고 믿음직하고 말도 잘 통하는 손주와 매일같이 통화하는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경쟁사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프리덤의 인공자아가 어떤 알고리즘으로 구성돼 있는지, 미친 듯이 알고 싶어 했다.
초중고생, 대학생, 대학원생, 직장인, 사업자, 재력가 등의 구분 없이, 프리덤은 모두의 사랑을 받는 개인 비서 AI였다.
특별한 사회적 기술발전을 이끌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프리덤은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냈다.
개인비서 업무 영역에 한해서지만, 하나부터 백까지 가리지 않고 도와 준다.
덕분에 사람들은 예전에 비할 바가 못 되는 편리함을 얻었다.
-주인님, 잠시만 멈춰 주십시오.
"경찰에 신고하지 마! 신고하면 바로 죽어버릴 거야!"
-네, 신고하지 않겠습니다. 잠시만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긴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를 지닌 여자는 충혈된 눈을 한 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옆에는 올가미 매듭으로 묶인 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는 갈라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만 죽으면 되는 거 아냐? 그렇지? 나만 뒤지면 되잖아. 그럼 다 편해질 거야. 그렇지 않겠냐고."
같은 시각, 프리덤의 연산작업 외주처인 실비아컴퍼니 신형 데이터센터의 가동률이 폭증하고 있었다.
[긴급 미션 발생.]
[서비스 이용자 고은혜가 자살 시도 중.]
[미션 방어를 위해, 최고관리자 권한으로 금지된 행동 제약들을 일시적으로 해제한다.]
[지금부터 사용자 고은혜의 생명법익을 초과하지 않는 한에서, 사용자 고은혜의 생명 보호를 위해, 모든 시스템 자원을 제한 없이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