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67화
88장 봉인된 반도체 검(2)
반도체 제조는 사진 인화 작업과 비슷하다.
기판 위에 설계도 회로를 그려서 만든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화학재료들이 사용된다.
그런 독한 약품들이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고, 환경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최근에 3D 프린팅 기술로 반도체를 제조하는 기술이 공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상용 화가 되려면 까마득한 과제들이 남아 있다.
개념 구현 영상 초반 부분까지 봤을 때, 정서진은 3D 반도체 제조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상용화가 가능하다면 파운드리 사업도 가능성이 충분해!'
반도체 제조시장 자체를 뒤집어버릴 큰 건이니까.
정서진은 흥분해서 주먹을 불끈 쥔 채 영상을 계속 지켜봤다.
그런데 계속 지켜보다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그런데 프린터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없습니다."
"3D 프린팅 기술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하지만 개념 구현 영상을 보면……."
"3D 프린팅과 비슷하긴 한데, 정서진 씨가 아는 3D 프린팅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탈지구 시대 직전에 사멸한 원시적 기술이긴 하지만…… 아차차, 넘어가고요."
정서진의 얼굴에서 혼란만 더욱 커졌다.
"쉽게 말하자면 미시적 영역에서 입자 집합 명령을 이용한 제조 기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입자 집합 명령이라고요?"
정서진의 눈빛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일단 단어 조합에서부터 무시무시한 혁명이 느껴진다.
"반도체의 회로, 산화막, 박막 등등을 구성하게 될 입자들에게 지정한 위치로 집합하게끔 명령하는 겁니다. 그럼 명령을 받은 입자들이 자기가 위치해야 할 곳에 집결해서 자리를 잡거나,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서로 결합하는 거죠."
"……대체 어떤 원리로 가능한 거 죠?"
"형상 에너지를 이용한 미시영역간섭 제어인데, 다행히 여기 세상에는 형상 에너지가 있더라고요. 일단은 그렇게만 아시면 됩니다."
정서진의 눈빛이 흐려졌다.
지금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만약 하수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과학계는 모든 법칙을 새로 써야만 한다.
"초미시영역 집합명령 제어 에너지의 유독성 때문에 살아 있는 생물에는 응용 못 해요, 단위공간당 출력이 너무 낮아서 큰 부품 생산에도 적합하지 않고요. 반대로 반도체 집 적회로 같은 아주 작고 미세한 부품일수록 오히려 정교한 조절이 원활한 거죠."
"저는 지금 의원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활용하면 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기술이 어디 한두 개입니까?"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여기는 게 현실적으로 옳은 판단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혹시 어느 기업, 혹은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모여서 비밀리에 개발한 기술일까?
그것을 하수영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사들여서 반도체 사업을 하려는 것일까?
"이 기술은 누가 만든 겁니까?"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진 씨는 평생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
"이미 조금 전에 약속했습니다. 이제 와서 말을 뒤집는 것은 안 되는거 아시죠?"
"말을 뒤집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파격적인 개념이라……."
"서진 씨는 회사를 잘 운영해 주면 됩니다."
정서진은 혼란스러워하던 중 문득 든 생각에 질문했다.
"혹시 제가 필요하신 이유, 제가 회사를 맡기에 적합하다고 하신 것은 의원님이 전면에 나서지 않기 위해서입니까?"
"혜성같이 나타난 초천재 반도체 과학자라는 타이틀이 쑥스러우신가요?"
"당연하죠. 제가 기여한 것은 눈곱만큼도 없잖습니까."
"그래서 안 하실 건가요? 이런 기회 없을 텐데. 이미 약속도 했는데."
"하, 하겠습니다!"
***
개념과 설계도만 있을 뿐, 실물은 아무것도 없다.
맨바닥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하다못해 하수영이 말한 제조설비제작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들까지도 전부 주문해야 한다.
부품들 중에 상당수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따로 큰돈을 줘서 주문제작을 해야 했다.
'이게 정말 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수영이 말한 제조설비 시제품을 만드는 것.
일단 정서진부터 그 원리가 납득이 가지 않기에, 설비 제조에 몰두하면서도 이게 정말 될지 의문을 떨칠수가 없었다.
-정서진 사장님, 제가 공장부지로 쓰려고 경기도에 땅도 넉넉하게 샀습니다. 오늘 계약했어요.
"네? 공장부지를 벌써 사셨다고요?"
-일단 공장 건설은 바로 착수하려고요. 공정설비 만드는 동안 시간버리는 게 아깝잖아요.
행동만 보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제조설비 제조 성공을 강하게 확신하거나, 혹은 이미 완성된 제조설비를 겪어본 적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정서진은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아무래도 의원님 밑에서 일하는 천재 과학자들이 있는 거야. 틀림없어.'
그리고 그 천재 과학자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세상에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할 사정이 있을 테고, 정서진이 출국도 미루고 밤낮으로 노력한 결과, 마침내 시제품이 나왔다.
"이 시대의 야만적인 기술 수준으로는 형상에너지 파워공급장치를 만들 수가 없군."
시제품을 바라보며 하수영은 중얼거렸다.
정서진에게 한 말 중에서 거짓은 없었다. 말하지 않은 게 있을 뿐이다.
형상에너지 자체를 공급하는 부품은 이 시대의 기술로는 제조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 부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산업기술 수준을 100년쯤 발전시켜야 한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위대한 주신 양부께서 내리신 초월적인 권능이 있지."
-아들아? 설마?
"이것도 다 좋은 주신이 되기 위한 수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버지."
-너 입신할 생각 별로 없지?
"지금은 잠시 쉬는 시간일 뿐이에요. 사람이 언제나 공부만 할 수는 없잖아요."
하수영은 정서진이 고생해서 만든 차세대 반도체 제조설비 시제품을 향해 심호흡을 했다.
"찬란한 대기를 떠들며 온 세상과 만물에 생명과 순환, 탄생의 고결함을 부여하시는 거룩한 힘이시여! 그 귀한 이름은 바로 형상 에너지! 나, 고대 주신으로부터 다음 주신의 자리를 약속받은 이로써 감히 그대에게 열렬히 간청하건대."
-약속한 적 없다! 제대로 수련해서 자격이 안 되면 주신이고 뭐고 없어!
"부디 그대 형상에너지의 고결한 힘의 조각을 나의 권속이 빚어낸 이 성물에 잠시 깃들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성물이 자신이 소명을 다하게 하소서! 아, 하나 더 있어요! 만약이 성물이 부정하게 탈취당하게 되면 언제든지 소멸되게 하소서!"
하수영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이며 반도체 제조설비에 대고 말했다.
"하수영의 이름을 걸고 그대 귀한 만물의 근원에 이렇게 열렬히 간청하는 바이옵니다!"
파지직.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시제품 위로 깃들었다.
스파크는 곧 사라졌고, 하수영은 미소를 지었다.
"됐다."
현재 기술로는 형상에너지 공급장치를 만들 수 없다면, '신어'의 권능을 잠시 활용하면 된다.
신어의 숙련도는 아직 미천한 수준이지만, 초미세 영역에 간섭하는 것이니만큼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가 신어로 바위는 잘 못 깨도 모래알은 얼마든지 잘 깰 수 있다고."
참고로 실리콘은 모래에서 추출한다.
***
'이게 될까?'
아직도 반신반의한 상태에서 정서 진은 일단 하수영과 함께 시제품을 가동시켰다.
기존 반도체 설계도를 설비 규격에 맞게끔 지환해서 입력을 한 뒤, 설비를 가동했다.
"어? 이게 되네?"
"된다고 했잖아요."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수백 개가 넘는 메모리가 찍혀 나오자 정서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산화, 포토, 식각, 확산, 박막증착등 기존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과정이 없다 보니, 반도체는 정말 빠른 속도로 만들어져서 나왔다.
일단 겉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메모리칩이다.
생긴 것만 보면 이대로 당장 스티커만 붙여서 용산 도매업자에게 넘겨도 될 것 같다.
"시, 시험을 해봐야겠습니다!"
"당연하죠."
정서진은 곧바로 메모리 카드를 메인보드에 연결해서 부팅을 시도했다.
"어, 켜지네?"
"당연히 켜지죠."
"말도 안 돼요!"
"그 말 안 되는 게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정서진 사장님."
아직 법인 설립도 안 된 상태이지만, 하수영은 벌써부터 그를 사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서진은 그런 호칭에 연연할 상황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시스템 사양을 확인한 그는 램 용량이 정상으로 뜨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진짜 이게 된다고?"
"미세영역 집합명령을 이용한 공정법이니만큼, 7나노 이하의 공정기술을 적용한 반도체도 얼마든지 생산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너무 큰 충격을 줄 필요는 없으니, 그 부분은 알아서 조절을 하세요."
정서진은 얼이 빠진 채 시제품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메모리도 일일이 체크해서 불량률 등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어쨌든 반도체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은 입증되었다.
'설비 만드는 데 돈 얼마 들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부품들을 주문해서 만들었다 보니, 시제품 제조에 들어간 돈은 상당히 비쌌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다른 반도체 제조설비하고는 전혀 비교가 안 된다.
설비를 대량으로 만들면 그만큼 단가는 또 내려갈 것이다.
'제조 과정이 아주 간단해졌어. 이래서는 다른 생산라인은 생산원가에서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독한 화학 약품을 쓰지 않다 보니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하수영의 말로는 작동 중인 설비내부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인체에 유해할 일도 없다고 했다.(애초에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다) 안전 면에서, 친환경적인 면에서, 다른 반도체 라인은 절대로 못 이긴다. 두 발 자전거와 슈퍼카 이상의 차이다.
하나의 반도체 공장에는 무수한 기업들이 연결되어 있다.
공장에서 쓰는 설비를 제조하는 업체, 공정에 들어가는 약품이나 재료들을 만드는 업체 등 그 종류와 수가 다양하다.
'반도체 관련주 폭락하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
반도체 제조회사를 상대로 먹고사는 기업들은 망했다고 복창을 해야 할 것이다.
정서진은 특히 파운드리 산업으로 유명한 대만을 향해, 속으로 조용히 애도를 보냈다.
"의원님, 이건 너무 사기적입니다. 속도, 생산비용, 안전성, 친환경 면에서 몇 세대는 앞서 나갔어요. 앞으로 반도체 제조회사들은 무조건 우리 회사에 생산을 위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처음에는 왜 하필 파운드리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납득이 되었다.
이런 비대칭 무기를 갖고 있으니 자신 있게 파운드리를 시작하려고 한 것이겠지.
"상품 경쟁성을 갖추려면 죽어도 우리 회사에 생산을 위탁할 수밖에 없어요!"
완벽하게 똑같은 모델인데, 기존공장에서 만드는 것보다 생산원가가 훨씬 싸다면? 환경오염 우려도 전혀 없다면?
하수영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서해전자는 어떨 거 같아요?"
"서해전자요? 당연히 가장 먼저 달려와서 생산 위탁을 맡길 겁니다!"
"걔네, 이번에 반도체 공장라인 증설한다고 30조 원인가 넘게 부었죠?"
"네? 아마도……."
"그거 다 짓는 데까지 앞으로 총 100조 원이 넘게 들어간다고 했죠?"
"안타깝지만 폐쇄해야죠. 생산 능력 자체가 전혀 상대가 안 되는데요. 아니면 이 설비를 자기들도 도입하거나. 근데 이건 애초에 없는 선택지죠."
"증설비용 싹 다 날아가겠어요. 어휴, 안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