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48화
84장 병원과 갑옷의 공통점(4)
"죄송합니다."
정지심 교수는 결국 사직서를 내려놓은 채 도망치듯이 병원장실을 나섰다.
서울서해병원에서 알아주는 심장외과 교수마저 이탈을 한다니.
이현덕 부회장이 알면 아마도 불호령을 내릴 것이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정지심 교수는 평소 심장 유전력이 있는 이현덕부회장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서 영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돈 앞에 장사 없지……."
고지환 병원장은 결국 쓸쓸하게 사직서를 챙겨서 서랍에 넣어야만 했다.
이 사직서 뭉치 위에 자신의 사직서도 얹어서 제출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사직서를 낸 이들은 청담수영병원으로 가겠지만, 자신은 동네개원의로나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싫으면 은퇴를 하든가, 아니면 대학으로 돌아가든가 해야겠지.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서 급히 고지환을 찾았다.
"병원장님, 외래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기다려 봐, 내 청진기가 어디 있더라……."
의료 실무에서 손을 뗀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판이다.
잘 간직해 놓은 청진기를 겨우 찾아낸 고지환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것을 목에 맸다.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의사니까 청진기는 꼭 가슴에 매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이른바 국회의원 금뱃지 같은 아이 템이다.
"가세나. 정말 오랜만에 보는 외래진료로군."
그래도 의사이기는 한가 보다.
회장님 일가 환자를 본게 언제인지 까마득한데, 외래를 보러 간다고 하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혈액이 펌핑되며, 살아있다는 외침이 하얀 기운을 뒤덮는 듯했다.
'그래, 이참에 초심을 한 번 돌아보는 거야. 나는 병원장이기 전에 의사다.'
그리고 첫 환자를 맞이했는데…….
"비아그라 처방해 주세요."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비아그라 처방해 달라고요. 50mg10일, 한미약품 걸로 처방해 주세요."
"저기, 환자분. 한미약품 건 팔팔정입니다. 비아그라는 화이자 거고요."
"화이자 건 비싸잖아요. 한미약품걸로 처방해 주세요. 그게 더 싸단 말이에요."
"아니, 한미약품 것은 비아그라가 아니고 팔팔정, 물론 성분은 동일한 카피약이지만 약제명 자체는 엄연히 다른……."
"아, 됐고 한미약품 비아그라 처방해 주세요."
"화, 환자분, 한미약품 건 비아그라가 아니고 비아그라와 똑같은 팔팔정이라고요. 그리고 동네병원에서도 처방해 주는 걸 왜 종합병원까지 찾아와서 처방해 달라고 하는 겁니까?"
"대학병원에서 처방을 받아야 짝퉁약을 안 받을 거 아니에요! 동네 병원에서 짝퉁약 처방할지 어떻게 알아요? 리베이트 엄청 받는다고 하던데."
"……."
"빨리 처방이나 해주세요."
긴 세월 만에 맞이한 첫 환자.
내몰리듯이 보게 된 외래 진료지만, 첫 환자부터 고지환 병원장은 큰 시련에 부딪혀야만 했다.
"제가 거기에 쇠구슬 성형을 좀 하고 싶은데요……."
"포경 안 아프게 해주실 거죠?"
"요새 오줌발이 시원치 않아서…… 무슨 큰 병이 있는 건 아닐까요? 방광암인지 검사하고 싶어요."
"네? 병원에서는 브라질리언 왁싱을 안 한다고요? 아니, 여기 비뇨기과잖아요?"
***
한편, 잠실의 백두우산병원장 우석운도 정말 오랜만에 외래 진료를 보고 있었다.
서해병원 고지환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의사 인력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흉부외과 일반 진료에 그는 가슴이 한편으로는 설레기까지 했다.
'오냐, 어떤 심장 질환이라도 덤벼라. 내가 전부 다 찾아내서 치료해 주지.'
그렇게 야심만만하게 기다리는데 첫 환자가 들어왔다.
예쁘장하게 생긴 20대 여성 환자는 앉자마자 다짜고짜로 말했다.
"G-3136 삽입술 해주세요."
"……G-313b가 뭐죠?"
난생 처음 듣는 명칭에, 우석운은 어안이 벙벙했다.
병원 경영에 집중하느라 실무 진료에서 잠시 손을 놓은 사이, 환자가 자신이 모르는 수술법까지 들고 올정도로 흉부외과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인가?
역시 의사란 한시라도 환자와 거리를 둬선 안 되는 것이구나!
"흉부외과 교수님이 그런 것도 모르세요? 가슴 보형물이잖아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미국 발렌트 사가 제조했고 보형물 가격만 1,300만 원 하는 거요."
"……."
우석운 병원장은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게 꿈이고 환각인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비급여 수술인 거 아니까 그런 건설명 안 하셔도 돼요. 해주실 거죠?"
"가슴성형 수술은 강남 성형외과로 가셔야지, 왜 대학병원 흉부외과로 왔습니까?"
"전신마취하다가 죽을 수도 있잖아요. 안전하게 수술받고 싶어서요."
"아니, 가슴성형 수술은 그러니까 성형외과로……."
"며칠 전에도 성형외과에서 가슴 수술하다가 죽은 환자 이야기 못 보셨어요? 그거 보고 무서워서 어떻게 받아요. 여기서 받을래요, 수술."
우석운 병원장은 첫 환자 진료를 마친 뒤, 화장실에 가서 자괴감에 혼자 조용히 울었다고 한다.
***
청담수영병원 VIP 전용 회의실.
평소 비어 있는 게 당연한 회의실에는 오랜만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널찍한 회의실이 비좁다고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는 모인 사람들의 인종도 다양했다. 황인, 백인, 흑인이 골고루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인파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정장에 넥타이를 맨 황인과 백인, 흑인 그룹.
그리고 흰 의사 가운을 입은 한국인, 바로 병원 관계자들.
"게악하기에 좋은 날씨군요."
정장 그룹을 대표하는 50대가량의 백인 남자가 화사한 미소로 말했다.
영어였지만 이 자리에서 영어 소통이 불가능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하수영의료재단에서 나온 변호사들이 계약서를 가져와서 최윤석 병원장 앞에 놓았다.
"법률 검토는 모두 마쳤습니다. 문제 될 건 전혀 없습니다."
"……음."
"닥터헬기 이용 목적에 한해서 퀸스텔리온을 대당 1,400억 원에 10기 도입, 소유권은 재단에서 갖고 모든 운영과 정비, 보관은 주한미군에서 이행하며, 그에 대한 보증책임은 록히드마틴사가 무제한적으로 진다는 내용, 모두 확인했습니다."
병원장 뒤에 서 있던 교수들은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야, 진짜 우리 병원이 1,400억짜리 닥터헬기를 10기나 도입하는 거냐?"
"살다 살다 록히드마틴사에서 계약 하자고 한국까지 직접 찾아오는 꼴을 볼 줄이야……."
"우리 병원, 알고 보니 국정원에서 비밀리에 무기 도입하려고 내세운 위장컴퍼니 같은 건 아니겠지?"
"사람 죽이려고 만든 군용 헬기가 사람 살리러 열심히 돌아다니는구나……. 뭔가 짠하다."
"들었어? 헬기 안에서 정밀수술도 가능하대. 워낙 헬기가 정숙성이 좋아서."
"근데 저거 헬기 굴리려면 그 운영비만 해도 엄청날 텐데, 우리 병원은 이제 절대로 적자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못해도 일 년에 병원 운영적자만 수천억 원은 날 거라고 하던데 말입니다."
"시설투자에 쏟은 돈도 회계 내역으로 잡으면 일 년 적자가 수천억이 아니라 조 단위가 될걸? 당장 저 헬기들 값만 1조 4,000억 원이라고."
만년필을 쥔 채 서류를 내려다보는 최윤석 병원장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1조 4,000억짜리 닥터헬기 도입계약.
그 영광되고 부담스러운 자리를 자신이 맡게 되었다.
아마 한국의 모든 의사들이 지금 이 순간을 주목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쯤 의사들 단톡방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앞으로 닥터헬기 좀 한 번만 띄워 달라고, 도와달라고 사정사정하는 병원장들도 종종 나올 테고, 최윤석 병원장은 이사장 직무대리 자격으로 헬기도입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그 순간 교수들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록히드마틴사 코즈펠트 이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상품'을 실은 '화물선'이 경호함의 호위를 받으며 미국에서 출항했습니다."
"아, 벌써요?"
"네,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바로 출발하기 위해서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춰놓았지요. 화물선이 동해에 정지하면 헬기들이 거기서부터 서울까지 직접 비행해 올 것이고, 화물선은 다음 일정을 소화하러 돌아갈 겁니다."
교수들은 또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부산항에 입항하는게 아니고 동해? 다음 일정? 이게 무슨 말인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우리 병원이 최신 군용 헬기를 닥터 헬기로 운영하는 병원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
시간이 흘러, 마침내 헬기들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최윤석 병원장은 기분 좋게 록히드마틴사의 전화를 받았다.
-닥터 최, 지금 상품들이 독도 인근 해상에서 출발해서 450km의 거리를 날아가는 중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독도에서 출발을 했다고요?"
-네, 상품을 실은 선박 경유지가 애초에 그 지점이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바다 한복판에서 헬기들을 내려놨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문이 쾅, 하고 열리면서 교수들이 병원장실로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잔뜩 흥분한 교수들은 최윤석 병원장의 멱살을 쥐어뜯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병원장님! 지금!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이 호위함 잔뜩 데리고 동해 독도까지 들어왔답니다!"
"퀸 스텔리온 10기가 항모갑판에서 이함해서 서울로 날아오는 중이랍니다!"
"헬기들이 공중에 플레어로 이런걸 만들었답니다! 한 번 보세요! 미군에서 유튜브로 실시간 공개한 영상입니다!"
최윤석은 어안이 벙벙해서 영상을 살폈다.
영상에는 수십 척의 호위함을 거느린 최신형 항공모함에서 차례차례 이함하는 퀸 스텔리온 헬기들의 육중한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완전히 이함한 10기의 헬기들은 호버링한 채, 허공에 플레어를 발사해 불꽃 쇼를 펼쳤다.
[청담 수영 병원]
[닥 터 헬기]
[Thank you so much]
[구 매 에 감사 드 립 니 다]
[록히드마틴]
그렇게 플레어 불꽃 쇼로 다양한 글자를 허공에 만들어낸 뒤, 서울을 향해 힘차게 순항하는 모습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저희가 묻고 싶은 건데요. 박 교수가 심심해서 림팩 훈련 보다가 이거 보고 뒤집어졌답니다. 그래서 우리도 알게 된 거구요."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 헬기들, 우리 병원에서 구매한 닥터헬기 맞죠?"
"근데 퀸 스텔리온이 저렇게 큰 헬기였어요? 와, 1,400억 원이나 하는 게 어쩐지……."
"상품 싣고 온다는 화물선이 최신형 핵추진 항공모함이었어요?"
"유튜브 반응이 장난 아닌데요? 수영병원이 대체 무슨 병원이냐고 사람들 반응이 엄청납니다. 우리 병원, 홍보는 제대로 된 거 같은데요?"
"우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네."
교수들은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면서 태블릿으로 미군이 공개한 훈련 영상을 연거푸 돌려봤다.
최윤석은 혼자 눈썹을 가늘게 떨다가, 스마트폰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미스터 코즈펠트,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배송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마침 림팩 훈련이 있더군요.
"……."
-해상으로 한국에 긴급물자를 비상수송하는 시나리오 훈련 실시 일정이 있었습니다. 함대에 신고 온 물자를 헬기를 통해 오산 공군기지에 수송한다는 작전이죠.
"……허어."
-그 훈련에 퀸 스텔리온 배송을 끼워 넣자고 하니 미 해군 본부도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협상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미 해군은 최신 전략헬기를 실제 훈련에 시범 운용해 볼 수 있어서 좋고, 우리는 배송비 아끼고 배송사고 가능성도 0으로 만들 수 있어서 좋고요.
"……항모전대가 실어왔으면, 확실히 배송사고가 날 수는 없었겠네요."
-1조 4,000억짜리 상품인데 배송에 만반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윤석 병원장은 통화를 끊은 후, 스마트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게 청담동 스타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