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45화
84장 병원과 갑옷의 공통점(1)
오늘은 병원재단 이사장 취임환영식이 있는 날이었다.
미리 예고된 일정이었기에, 날짜가 다가올수록 병원에는 분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병원 인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오전과 오후 각각 교대로 취임환영식에 참여하기로 했다.
직원들이 그래도 이사장 얼굴 한번은 봐야 한다며 이런 식으로 짠것이다.
오전 참가팀은 취임환영식이 열릴 삼성동 코엑스 전시회장으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의사들 대부분은 자기 일에 바빠 외부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지만, 신임 이사장만큼은 조금 예외였다.
"정치하는 분이라던데. 강남구의원이래."
"청담동 부동산 큰손이래. 그렇게 돈이 많다는데."
"황비버섯라면 오너라고 하더라."
"프라임오일 알지? 빅메이저 정유회사. 우리 병원재단 자금이 모두 거기서 나온대."
"라면에 기름에 부동산에. 진짜 입지전적인 분이시네."
재단 오너가(비영리재단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지만) 돈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의사, 간호사, 일반행정직원, 경비직원들까지 모두 모이다 보니 숫자가 엄청났다. 절반은 아직 병원에 남아 있음에도.
"황 교수, 거기서 뭐해?"
"이상하게 회장님 얼굴이 낯이 익어서 말이야……."
황태수는 큼지막하게 걸린, 젊은 이사장의 포스터를 보고 턱을 쓰다듬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반갑습니다. 이사장 하수영입니다.
그때 단상에 오른 하수영이 말문을 열었다.
이사장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몰랐던 의료진과 직원들은 당황해서 술렁거렸다.
"아니, 이사장님이 언제 단상에 올라가셨지? 누구 본 사람 있어?"
"사회진행자는 그런 것도 소개 안하고 대체 뭘 하는…… 아니, 사회 진행자는 또 어디 갔어? 왜 비어 있는 거야?"
-자, 짧게 굵게 끝내겠습니다. 다들 바쁘시잖아요? 근데 저도 바쁘거든요. 집중하세요.
"……."
"……."
하수영이 마이크를 통해 다시 말하자, 의료진과 직원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저 멀리서 사회진행자가 허둥지둥 달려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제가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매너와 품격, 그리고 합리성입니다. 폭행? 태업? 왕따? 괴롭힘? 절대 용납 않습니다. 걸리면 제대로 박살이 날 줄 아십시오.
"……."
시작부터 살벌한 어조가 나오자, 다들 한껏 긴장해서 마른침만 삼켰다.
루즈하지만 화기애애하고 희망한 분위기에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 반대였다.
-모든 것은 규정과 절차에 의거해서 합리적으로, 그리고 문명인다운 매너를 갖춰서 진행하십시오. 후배가 답답하고 실수를 하더라도 애정을 대하고 가르치십시오. 여러분에게 지급하는, 타병원보다 높은 보수에는 그런 대가도 포함되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
-후배나 동료, 상급자가 용인할 수 없는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면 차라리 내부 감사에 진정을 넣으십시오. 자기가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시고, 자기 역할이 아닌 것에는 손을 떼십시오.
많은 이들의 얼굴에 묘한 공감대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차라리 훨씬 낫겠는데.'
'높은 보수에는 후배의 실수를 인내심으로 대해줄 의무가 포함된 것 이다라…….'
'정 말귀 못 알아들으면 어차피 알아서 징계받거나 잘릴 테니까, 거기에 얽매이지 말라는 건가.'
-이상입니다. 앞으로 우리 청담동을 길이길이 빛내줄, 최고의 병원을 다 함께 만들어봅시다.
그러고 하수영은 정말 단상에서 내려갔다.
약 5분이 지나도록 더 이상 아무 진행이 없자, 의사들과 직원들은 이게 정말 끝인가 하고 혼란스러웠다.
"……끝?"
"이게 정말 끝이라고? 이렇게 끝이야?"
"1분도 말씀 안 하신 거 같은데, 진짜 이대로 끝이야?"
"이 사장님 가셨답니다! 다들 식사들 하고 병원으로 돌아가셔서 오후 팀하고 교대하시면 된답니다!"
"……."
사람들은 이사장이 허례허식을 정말 불필요하게 여긴다는 것, 효율을 중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전달한 말이,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진정 어린 마음일 것이다.
신임 병원장, 최윤석이 옆에서 얼이 빠져 있는 황태수 교수를 툭 쳤다.
"황 교수, 얼굴이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이, 이이, 이이이사장님 말입니다."
"이 사장님이 왜? 너무 젊어서 놀랐나? 내가 말했잖아. 되게 젊으신 분이라고."
"그그그, 그게 아니라…… 제가 계약서 쓰러 병원 갔을 때 로비에서 뵈었단 말입니다! 같이 삼, 삼겹살도 먹었는데! 혼자서 30인분을 드셨는데!"
"혼자 30인분을 드셨다면 이사장님 맞군. 먹성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
황태수는 기가 막혔다. 왜 그 부분에서 이사장이 맞다고 납득을 하는 건데?
"이 사장님이 황 교수 자네한테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시던데, 그래서 그날 조용히 오셔서 이야기 나눴던 거구만. 근데 설마 이사장님이라는 거 오늘 안 건가?"
"그냥 재단 직원인 줄 알았습니다. 이사장님이라고는 말씀을 안 하셔서……."
"이사장님이 원래 좀 그런 경향이 있으셔. 되게 쿨해. 그래도 자네 하고 같이 식사까지 했을 정도면 자네를 참 좋게 본 모양이야."
황태수는 동공이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재단 일반직원인 줄 알았던 젊은이가 병원 이사장이었다니!
"당연히 계산은 이사장님이 하셨겠지?"
"……제가 했습니다. 그냥 직원인 줄 알고 이것저것 물어본다고 제가 사줬거든요. 50만 원 넘게 나왔어요."
"오, 이사장님한테 50만 원짜리 밥을 사드렸다니, 이거 신기록인데?"
"신기록이라고요?"
"이 사장님이 누구한테 뭐 얻어먹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야. 50만 원이나 밥을 사드리다니, 아마 그 기록 우리 병원에서 앞으로 영영 안 깨질 수도 있어. 근데 50만 원 나왔다는기 보니 소고기는 아니었고, 돼지고기 먹었나 보군."
황태수는 살짝 비틀거리면서, 비어 있는 강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이사장이었을 줄이야.
아직도 충격이 가슴에서 가시지 않았다.
***
보건복지부에서 사람이 나왔다.
"보건의료정책실장 허준혁입니다."
"부모님께서 정말 좋은 이름을 지어주셨네요."
"하하, 그런 말 정말 많이 듣습니다."
행정고시 출신 2급 공무원 실무자.
환갑을 앞둔 허준혁 실장은 손주뻘인 하수영 앞에서 깍듯하게 행동했다.
"강남구의회가 하수영 의원님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청와대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거 아십니까."
"그런가요?"
"사실 입각 논의도 한 차례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병원재단 이사장이 되시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입각하려면 이사장직은 내려놔야 하니까 그랬나 보네요."
"네, 아무래도 입각 제안을 하기에는 조심스러웠죠."
정말 입각 논의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블러핑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어차피 이사장직을 포기하고 입각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그냥 잘 보이자고 막 던지는 카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청담수영병원이 흉부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외상외과를 중심으로 기피과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셨습니다. 행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고요."
"제가 원래 룩딸파라서요."
"루, 룩딸파요?"
그게 뭐지, 하고 허준혁 실장은 당황했다. 전혀 의미를 감 잡을 수 없는 단어였다.
"아, 게임 용어예요. 캐릭터한테 예쁘고 멋진 갑옷이나 드레스 입히면서 좋아하는 유저들을 가리키는 말이죠."
"아, 가볍게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을 말하는 거군요."
"……가볍게요?"
"원래 게임이 남보다 강하고, 좋은 아이템을 장비하고, 그래서 승리를 추구하는 그런 거 아닙니까? 하지만 가볍게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은 승패하고 무관하게 캐릭터의 외형이나……."
"룩딸은 원래 더 이상 할 게 없는, 게임의 끝을 본 고인물들이 취미로 하는 겁니다."
"……."
"전설의 레전드 파이어 화염 드래곤 로드의 비늘로 제작한 아머, 이런 거 하나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드는지 아세요? 한 땀 한 땀 엮어 넣을 드래곤 로드 비늘 수량 확보해야지, 그거 담금질할 재료 구해야지, 또 비늘에 구멍 뚫으려면 마계까지 가서 대마왕 때려잡아서 나온 뿔을 갈아서 만든 바늘을 써야 돼요."
"……."
"그 뿔은 또 단단해서 갈리지도 않아서 미스릴제 숫돌이 있어야 하고요. 재봉할 때 비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도 녹지 않는, 바다 깊은 곳에 사는 전설의 대왕고래수염으로 만든 실을 써야 돼요."
"……."
"그렇게 개고생고생해서 만들어도 '방어력 조금 높은 거'말고는 도움되는 거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아머에서 계속 열이 뿜어져 나와서, 세력 재생 일정 이상 안 되는 저렙캐릭터들은 1시간만 입고 있어도 라이프 다 깎여서 죽어요."
"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대체 왜……."
"이쁘니까요!"
"……."
"이쁘니까 그 고생고생해서 만들어 입는 겁니다. 다른 유저들한테 자랑하려고, 유저들 부러워하는 거 보고 자존감 완충하려고 그 고생해서 입는 거예요."
게임은 잘 모르지만, 하수영이 하는 말의 흐름은 대충 정확하게 이해 했다.
"설마 청담수영병원이 의원님께 있어 전설의 레전드 파이어 화염 드래곤 로드의 비늘로 제작한 아머 같은 대상이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이야, 역시 행정고시 출신 브레인다운 놀라운 직관력입니다. 대단해요."
"해, 행정고시하고 이게 무슨 상관인지……."
페이스가 제대로 말린 허준혁은 혀끝이 제대로 꼬여 버렸다.
"병원과 갑옷은 공통점이 있죠. 바로 부상을 막아준다는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아무튼 다시는 룩딸을 우습게 여기지 마세요. 어디 던전 앞에서 그런 말씀 하시면 큰일 납니다. 아셨죠?"
"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시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에요. 잘못 알고 계신 것을 바로잡아드렸을 뿐이죠."
허준혁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 왜, 뭣 때문에 왔더라?
협상을 논의하기 전에 몇 마디 인사말로 머릿속이 박살이 난 걸 보면, 상대가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다.
'만약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라면…… 정말 대단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보건부에서 할 말이 없어서 나온게 아님을 미리 짐작하고, 웃으면서 카운터 견제부터 날린 것인가?
허준혁은 마음을 바로잡으며 머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병원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고 계시는데…… 혹시 영리병원 전환을 노리고 미리 준비하시는 겁니까?"
"영리병원이 허용되나요?"
"요즘 한창 논의 중이잖습니까. 모재벌그룹에서도 열심히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고요."
프라임오일이 재단을 통해 병원이 투자하는 돈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당연히 제3자 눈에는 훗날 영리병원전환을 기대하고 미리 포석을 까는 것이라고 여기기 쉬웠다.
"제가 설명을 깜빡했는데, 전설의 레전드 파이어 화염 드래곤 로드의 비늘로 제작한 아머 말입니다. 그거 귀속템이라서 한 번 만들면 어디 가서 팔지도 못해요. 파기해 봤자 나오는 쓰레기들 몇 실버도 못 받는 짜투리만 있고요."
"네?"
"돈 벌려고 병원 산 거 아니에요. 룩딸하려고 산 거라고 거듭 말씀드렸잖아요."
청담동 후원회 멤버들이 새 룩딸템을 보면서 예쁘다고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