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40화
82장 로컬병원을 수호하라 (4)
비서실장이 보고를 이어 나갔다.
"개인이지만 의사는 아닙니다. 정치인입니다. 아니, 부동산 임대업자라고 해야 하나……."
"답답하군, 어서 말을 해보게."
"하, 하수영 강남구의원이 병원을 사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하수영?"
"강남구의원?"
윤태석 회장과 병원장 아들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의아함을 나타냈다.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병원 경영이라는 게 하나만 미칠듯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고, 또 정치나 재계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영역이기도 한 덕분이다.
여의도 국회의원 거물이라고 해도 잘 모르는 판인데, 일개 강남구의원이라니?
다행히 비서실장은 이미 하수영에 관해서 어느 정도 조사를 마쳐둔 상황이었다.
"하수영 구의원, 청담에서는 알아주는 부동산 큰손입니다. 아, 엘릭서 드링크를 판매하는 프라임웰빙컴퍼니의 최대주주이기도 합니다."
그제야 윤씨 일가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아아, 엘릭서드링크?"
"뭐예요, 그거 만든 사람입니까?"
"제약 쪽 사람이군요. 그럼 뭐 의사가 아니라도 병원 운영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근데 의사가 아니면 비영리 법인 설립해서 매입해야 할 텐데, 그럼 손해 아닌가? 왜 굳이 그래야 하지?"
엘릭서드링크가 언급되자, 다들 아하 하는 표정으로 어느 정도는 납득했다.
"근데 프라임웰빙이 아직 제약회사는 아닐 걸요?"
"그래?"
"네,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마케미야인가 하는 재일교포 부동산 재벌이 1억 5,000만 달러나 투자하는 바람에 제약회사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허, 그럼 1,500억 원?"
윤태석의 얼굴에 놀라운 감정이 깃들었다. 자본금만 1,500억 원이면 대단한 규모의 회사다.
제약회사도 아닌,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회사가 그 정도라니.
"요즘 우리 병원 환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더라고요. 병실 가보면 한두 명씩은 꼭 그걸 쟁여놓고 먹고 있습니다."
"고혈압, 당뇨에 효과가 좋다고 환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인터넷에서도 이런저런 평이 좋던데. 근데 그래 봤자 건강보조식품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그 회사 돈 하나는 많을 겁니다. 그런데 삼성동 병원 사겠다는 사람이 거기 창업자라고요?"
"자본금 1,500억 원짜리 회사 창업자라면 돈 문제 걱정은 전혀 없겠네요."
아들들은 이런저런 한 마디를 보태긴 했지만, 처음의 놀라움은 이제 많이 가신 상태였다.
"근데 JS건설 이상으로 값을 쳐주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그래요, 아버지. JS건설은 땅값에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준다고 하잖아요? 병원도 얼마간 더 운영할 수 있고."
"바지원장 내세워서 운영하려고 그러나? 법인 운영은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아버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딱 자르고 JS건설에 넘기면 될 거 같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회의적으로 변하자 비서실장은 조금 당황했다.
윤태석 회장은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김 실장, 뭐 걸리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해."
"……삼성동 윤병원이 대대손손 그 자리에서 의술을 펼치길 바란다면 자신에게 넘겨달라, 이 말을 꼭 덧붙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대손손 그 자리에서?"
윤태석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사람을 만나기 전, 그 사람에 관해 알아볼 수 있는 모든 걸 알아보는 것은 기본적인 사항이다.
윤태석은 당연히 그 기본을 따랐다.
"너무 젊은데, 이제 스물한 살이라고?"
처음에는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에 기가 막혔다.
이거야 원, 이제 전문의를 앞두고 있는 자기 손주들보다도 어리지 않은가?
"그런데 강남구의원이됐어? 지역이 청담동? 어디 부잣집아들인가?"
"구의회, 구청 평가는 매우 좋습니다. 젊은 나이지만 행정적 식견과 감각이 매우 뛰어나다고 합니다. 돈도 잘 쓰는 편이고 행정직원들 밥도 많이 사줘서 인기가 좋습니다."
"베품으로써 인망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무섭지."
식품회사, 요식업 프랜차이즈 오너, 그런 것들은 윤태석한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사업 규모가 꽤나 되는구나, 돈이 많긴 많구나, 신기하네, 하고 넘길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부동산 내역에서는 그도 멈칫했다.
"보유 부동산만 3조 원이 넘는다고? 아니, 기초정치인이 이게 말이 되는 재산이야?"
기초정치인이 아니라 거물정치인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된다. 재벌 정치인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될까.
"부산 해운대 옛 누리마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청담동에 위치한 부동산입니다."
"……."
"사실 부동산보다는 회사의 지분가치를 더 보셔야 합니다. 심지어 빅4에 들어가는 정유회사도 하나 갖고 있습니다. 경영은 하지 않지만요."
정유회사라는 말에 윤태석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아니, 이 친구 대체 정체가 뭐야?
정치인이야, 부동산 임대업자야, 거물투자자, 요리연구자야?
"본인은 늘 자기 정체성이 농부라고 말하고 다니긴 합니다."
"……."
"공개 자산만 따지면 우리나라 최고 개인부자가 아닐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왜 여태껏 몰랐지?"
"아무래도 돈 많은 기초의원 정치 인이다 보니 언론에서 눈치 보느라 주의 깊게 다루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광고계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큰 손이기도 해서요."
광고에도 발을 뻗치고 있다면, 언론사들이 쉬쉬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JS그룹과도 비즈니스적으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요. 프라임컴퍼니 사옥과 해운대 누리마루 '호텔'도 JS 건설이 맡아서 짓는답니다."
호텔이 아니라 펜션이지만, 비서실 장은 호텔로 오인해서 설명했다.
JS그룹 이름이 나오자 윤태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삼성동 병원 부지를 사겠다는 것은 JS건설, 하지만 하수영은 JS건설의 굵직한 의뢰를 여럿 맡긴 건축주인 데다가, 모기업과도 정유 비즈니스를 맺고 있는 파트너다.
'일이 복잡해질 수 있겠는데.'
병원 부지를 사겠다는 회사와 하필 이렇게 얽혀 있는, 돈 많은 젊은 정치인이라니.
미팅 자리에 나서는 윤태석 회장의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은 이유였다.
"반갑습니다. 하수영입니다."
"윤태석이라고 불러주시오."
윤태석이 고심 끝에 고른 말투였다.
하대는 어림도 없고, 그렇다고 공대를 하자니 상대는 자신의 손주보다도 어려서 어색하다.
윤태석이상대에게 아쉬운 게 있다면 모를까, 현재로써는 '뭐라고 하는지 말이나 한 번 들어보자' 라는 수준이다.
"삼성동 윤병원이 대대손손 그 자리에서 의술을 펼치길 바란다면 자신에게 넘겨달라,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소만."
"네, 맞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나온 거요. 늙으니까 궁금증만 늘어나더군."
"회장님, 아니, 병원장님도 의사이시니 인술을 펼치고픈 포부가 작지 않으실 겁니다. 병원 사업으로 돈버는 것도 좋지만, 환자들 치료해 주는 것도 보람 있는 거잖아요."
"물론이오. 사람이 한 가지 동기만으로 무언가를 쫓지는 않는 법이지."
"병원장님. 다른 곳에 부지를 팔면 제값이야 받을 수 있겠지만, 병원자체는 없어집니다. 수십 년간 그 자리를 지켜온 병원이 사라지는 셈이죠. 그 병원을 의지하던 많은 환자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이고요."
"의원님은 병원 부지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 병원 그 자체를 원한다는 거요?"
"네, 그렇습니다. 저에게 팔면 돈도 쟁기고 병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병원장님의 지갑과 이상에 동시 이득이 되는 선택지입니다."
"하지만 의원님은 병원을 살 수 없소. 의사가 아니니까."
"의료재단법인을 설립해서 운영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 윤태석은 멈칫했다.
의사가 아닌 사람이 병원을 사려면 그 방법밖에 없지만, 정말 그 길을 택할 줄이야.
생각지도 않은 카운터펀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알고 있소? 그렇게 하면 병원이 얼마의 수익을 내든 간에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소."
"잘 압니다."
"아, 혹시 프라임웰빙을 중심으로 메디컬 바이오산업 플래폼을 구축하려 하시오?"
개인병원이 아니고서야, 법인 병원이 번 돈을 직접 가져갈 수는 없다.
하지만 제약회사 등을 설립해서 병원을 상대로 영업하는 방식으로 간접 이익을 취할 수는 있다.
현재 서해그룹도 의료재단을 그런 식으로 운영해서 이익을 환수한다.
법의 허점이다.
"바이오산업은 손 안 댑니다. 프라임웰빙은 그냥 식품회사일 뿐입니다."
"……."
"병원장님. 저는 환자, 의사, 직원. 그 모두가 만족하고 최고로 치는 병원으로 꾸려나가고 싶을 뿐입니다. 치료와 함께 행복도 파는 병원이 될 겁니다."
"행복도 파는 병원이라……."
"강남구의원으로서 지역구민들을 위한 진정 어린 봉사라 생각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어디까지 바라보고 계시오?"
"구의원으로 만족합니다. 정치인 신분은 그저 거들 뿐이죠."
큰 정치를 위한 투자는 아니라는 것인가.
"그럼 무엇을 위해서 병원을 사는 거요?"
"저는 힐링, 평화, 안정. 이 셋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힐링이라…… 평화, 안정."
"다툼이 많은 세상이잖습니까. 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간이 한정돼 있죠.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남과 다투느니, 남에게 적당히 베풀기도 하고 칭송도 들으면서 노후를 보내는 게 제 꿈입니다."
이번 생에서는. 라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병원 운영은 그 세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죠."
윤태석의 눈빛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잘 들었소. 의원님의 제안은 내 이상 실현에는 이득이 되겠지. 하지만 지갑에도 이익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윤태석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하수영은 뭔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설마 서해병원에 넘기실 겁니까?"
"거긴 원천 탈락이오. 그런 못된 것들한테는 안 팔지. 실은 JS건설에서 제안이 들어왔소. 최대 프리미엄 75%까지 얹어서 사겠다는 거요. 병원이 아니라 그 땅이 필요한 거지."
"그럼 저도 프리미엄을 얹어드리죠."
"그렇게까지 해서 병원 운영을 하고 싶다는 거요?"
법 자체를 바꾸지 않는 이상, 하수영이 병원 운영으로는 한 푼도 벌수 없다.
법인으로서의 병원은 그 수익을 외부에 배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네, 그것이 약속이니까요."
사무실에 죽치고 있는 노인들과의 약속.
그리고 이번 생은 힐링 라이프를 즐기자는 자신과의약속.
윤태석은 헛웃음을 가볍게 터뜨렸다.
"이거 원, 듣는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 말이군요."
"병원장님이 부끄러우실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왜 지금의 부지에 병원을 올렸는지 혹시 아시오?"
"토지 가치 상승만 생각한다면 최고의 투자였겠죠. 병원을 운영한다면 여러 가지 세제 혜택도 몰아서 받을 수 있었을 테고요."
"너무 정확히 찌르셔서 내가 다 민망해지는구만."
윤태석은 고심에 잠겼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회장 윤태석'이지만, 사명감을 소중히 여기는 '병원장 윤태석' 이기도 하다.
그 둘은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가끔씩 저울질을 통해 한쪽이 좀 양보를 해야 할 때가 있을 뿐.
'설마 그래서 계속 나를 병원장이라고 꼬박꼬박 부른 것은 아니겠지.'
기초의원이기는 하지만, 역시 정치인이기는 한가 보다.
'병원장 윤태석'은 기분 좋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은, 나도 정말 큰마음 먹고 하는 거요. 아들들이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크게 좋아하지도 않을 거거든. 와이프도 바가지 긁어댈 거고."
"경청하겠습니다."
"프리미엄은 필요 없소. 시세대로 넘길 테니, 병원 운영만 잘해 주시오."
"감사합니다. 아, 땅 명의만큼은 제 이름으로 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