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29화
80장 동네마트는 디폴트(1)
"아버지가 석현이 많이 아끼신 건 압니다. 석현이 그리됐을 때는 저도 가슴이 아팠고요. 하지만 아버지, 이건 아닙니다. 석현이 하나 때문에 지금 백화점 사업이 거덜나게 생겼어요."
"끄응……."
"혹시나 해서 다시 알아봤는데, 그쪽 잘못은 전혀 없었습니다. 석현이가 술 먹고 운전하다가 도로도 아닌 곳에 뛰어들어서 자기가 혼자 캠핑카에 들이박은 거예요."
100% 손주 과실이라는 것은 진철진도 물론 안다.
다만 아끼는 손주가 불구가 되었다.
는 것에, 보복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애초에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모르고 움직였던게 불찰이었습니다.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네 형이 석현이 데리고 직접 찾아가서 사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느냐? 이번에 크게 손해본 건 우리인데, 그 녀석이 설마 정유까지 움직여서 우리를 건드릴까?"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 친구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도 아니니까요."
진철진은 다시 입을 꾹 다문 채 고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그만 덮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경영자가 아닌 재벌 회장은 때로는 감정적인 결정을 내려도 무방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결국 그는 차남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
진세호는 하수영에게 은밀히 김진명 부사장을 보내, 사죄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김진명이 가져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진석현 군을 만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만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네, 얼굴 부딪쳐봐야 서로 속만 불편해질 텐데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식이었습니다."
"안 되겠다. 내가 만나봐야겠어."
진세호는 다시 약속을 잡고 하수영을 만났다.
상대가 귀찮은 둥 마는 둥 하는 태도라서 약속 날짜를 잡기가 다소 힘들었다.
라테그룹으로서는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진세호는 개의치 않고 만나러 나갔다.
"이렇게 금방 다시 보게 되는군요."
"제가 사장님을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백두와 뉴월드에서 제시한 조건이 또 이미 비즈니스를 추진 중인 상황이기도 했고……."
"그러시군요."
속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진세호로서는 문제 삼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제 조카가 직접 사죄드리고 싶어 합니다."
"사죄하고 말고 할 게 뭐 있나요. 저는 다 잊었습니다. 신경도 안 씁니다."
"그래도 그게 예의인 것 같다며, 조카가 내심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사과받아야 할 사람이 사과받는 게 불편하다잖아요."
"……."
나긋나긋한 말투지만 분명히 딱 선을 긋는다.
진세호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꿈틀거렸지만, 애써 억눌러 참았다.
불편한 상황을 종료하려고 온 것이지, 2차전 선전포고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저희로서도 매우 송구합니다. 뭐든지 좋으니,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하수영은 물끄러미 진세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라테가문이 성격은 참 막장이라고 들었는데, 이 사람은 처음부터 깍듯하고 예의 바르네.'
재벌 회장의 아들이나 되는 사람이, 아들뻘인 자신 앞에서 철저히 존댓말을 쓰는 것도 그렇다.
'보통 이런 경우는 속에 칼을 품고 있는 게 많지. 신경 좀 건드리면 나중에 폭발해서 풀악셀 급발진하는 것도 재미있겠…… 아차차,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수영은 얼른 반성했다.
이번 생은 평온한 힐링 라이프를 즐기며 지친 영혼을 쉬게 하겠다고 계획한 게 언제인데!
'하수영, 네가 요즘 좀 편하다고 잠든 유트롤 흑염용제를 해방하려고 하는구나, 정신 차려, 한 천 년 정도는 휴양을 해줘야 무한전생도 오래 해먹지.'
"나중에 진석현 씨한테 전해주시겠어요? 당신 음주운전 때문에 불구된 피해자들 마음을 생각하면서 평생 반성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론 진세호는 곧이곧대로 전달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다가 형의 귀에 들어가면 그룹의 통제를 벗어난 폭주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하수영도 그걸 알면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혹시 라테마트 청담점을 제가 좀 살 수 있을까요?"
"라테마트 청담점을 말입니까?"
라테마트라면 라테유통(백화점, 마켓, 마트 사업을 총괄하는 그룹 계열사) 소유로, 진세호의 통제 아래 있다.
"네, 마침 거기 부지가 필요한 상황이라서요. 시세대로 드릴 테니 제게 파시죠."
진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테마트 청담동점이라면, 적자폭이 가장 큰 매장 중에서 손꼽히는 곳이다.
애초에 매장매출보다는 부동산 투자를 목적으로 구매해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법인이 업무 외의 목적으로 부동산을 보유하면 이런저런 세금이 과다 하게 나오니까.
'줘도 큰 손해는 없겠군. 앞으로 더 오를 땅값이 아쉽긴 하지만.'
100미터x150미터, 15,000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이지만, 정작 마트손님을 위한 주차장 면적이 70%이나 된다. 마트 장사로 흑자를내겠다는 계산은 애초에 없었다.
사실 진석혁 때문에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자신이다.
정작 형은 건재하고, 애꿎은 백화점만 피해를 봤으니까.
하지만 진세호는 그 손해를 마냥 손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부친도 시간이 지나면, 후계 구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다시 하게 될 것이다.
장남에게 그룹을 물려주면, 결국 백화점 사업을 말아먹은 손주가 그 뒤를 잇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친형 정태호가 10년 넘게 경영 실적에서 부진한 모습만 보여 와서, 부친의 고민이 깊은 판이다.
이런 판국에 동생이 맡은 계열사에 큰 손해를 끼쳤으니…….
'잘만 활용하면 판을 뒤집을 수 있어.'
"그 마트 부지는 우리 회사가 예전에 평당 2,000만 원에 매입했습니다. 지금은 평당 5,000만 원 정도 할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향후 가치를 생각하면 평당 7,000을 부른다 해도 넘기지 않을 땅입니다. 우리 회사가 당장 현금이 아쉬운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가지 부탁을 들어드린다면, 평당 4,500만 원에 드리겠습니다."
"라테 백화점이 가맹점주 자격으로 운영한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본사 규정을 따라야겠지만, 그거야 다른 가맹점들도 마찬가지지요."
순간 진세호는 멈칫했다.
"내가 뭘 부탁할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까?"
"수영레스토랑이 라테백화점에 가맹점을 낸다면 강화 협정을 맺었다는 표시는 되겠죠. 사장님도 회장님께 보여드릴 만한 실적은 필요할 테고, 그렇다고 머쉬룸 서비스는 물건너갔으니 더 건드릴 구석은 없고. 안 그런가요?"
"……."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한 대답에 진세호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물론 임대료 조건은 저번과는 다르겠지요?"
매출 퍼센티지에 기반한 수수료.
명품 브랜드나 지불할 법한 매장임대료 방식에 당시에는 거래 자체가 무산됐었다.
"가맹점주 자격을 주시는 것만 해도감사한데, 임대료까지 받을수는 없지요. 임대료는 무상으로 하겠습니다."
"오우, 화끈하시네요. 좋습니다."
그렇게 진세호는 하수영과 더 이상 서로 칼을 겨누지 않겠다는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실제로 그런 조항을 넣은 것은 아니다)
15,000제곱미터짜리 청담동 라테마트 부지와 수영레스토랑 임대료면제.
대신 수영레스토랑 입점이라는, 부친이 보기에 화해의 표시로 충분한 대가를 얻었다.
이 강화 조약서를 가지고 이제 부친을 찾을 것이다.
다음 왕좌에 어울리는 이는 자신이라는 입증을 위해서.
한편 하수영은…….
'간판만 수영마트로 바꿔 달고 운영을 하면 되겠어, 역시 요식업 쪽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트욕심이 날 수밖에 없구나.'
***
날을 잡고, 진세호와 계약서를 썼다.
라테마트 이전과 수영레스토랑 입점, 이 두 가지였다.
"사실은 제가 전부터 마트를 하나 운영하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네. 뭐 여기저기 많이 낼 생각은 없고, 청담동에 한 개 매장 정도만 운영할 생각이었어요. 분점을 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강남구를 벗어나진 않겠죠."
진세호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속으로 의아했다.
"마트를 운영하려면 결국 소비자 판매상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업체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런 쪽 인맥은 도통 없어서요."
진세호는 조용히 끄덕였다.
프라임컴퍼니, JM 식품이 있긴 하지만, 어디 마트가 식품만 취급하던가?
칫솔, 수세미, 키친타올, 휴지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생필품 및 주방용품 등을 취급해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요, 라데유통에서 그전에 했던 것처럼 필요한 판매물품들을 공급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렵지 않지요. 당연히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급 조건은 뭐 다른 라테마트 지점보다 좀 더 마진을 붙이셔도 됩니다."
"그러면 적자 폭이 더 커질 텐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라테마트 청담점은 적자폭이 상당한 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칫솔이나 인스턴트식품 따위 팔아서 수익 내려는 게 아니라, 부동산을 장기적으로 묵혀 두기 위한 곳이다.
"괜찮습니다. 저도 돈 벌려고 마트운영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시다면야……."
진세호는 하수영도 라데그룹처럼 장기적인 부동산 가치 상승을 노리고 투자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하수영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이제 나만의 마트가 생겼으니, 내 마음대로 커스터마이징해서 운영할 수 있겠네.'
수영농장에서 대량생산에 집중하는 것은 밀과 버섯류다.
하지만 고추, 쌀, 감자, 보리 등처럼 소량만 생산하는 다품종 품목도 존재한다.
황비버섯라면처럼 상품화해서 팔기에는 애매한 생산량. 취미로 이것저것 조금씩 키우다 보니 그렇다.
'하는 김에 마트에서 참치도 조금씩 팔고.'
그런 상품들을 고급 유기농이라고 선전해서 팔면, 은근히 쏠쏠하지 않을까?
물론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마트 하나 정도는 있다!
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한 게 큰목적이다.
***
매매 계약을 마치고, 하수영은 곧바로 라테마트 청담동점을찾았다.
이미 본사에서 소식을 들은 지점장은 직원들을 데리고 뛰쳐나와서 이마가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숙였다.
"아, 허리 펴세요. 전 이런 과도한 예의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요. 직원은 고용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고용주는 월급으로 그 노동력을 매입하는 것 뿐입니다. 상호직급과 인간관계에 필요한 기본적인 예의 정도면 충분한데, 지나치게 넘어가지는 맙시다."
지점장은 새 마트 주인이 상당히 독특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강남구의회에서도 이런저런 다양한 말이 많으시다더니…….'
그러고 보니 나쁜 이야기는 별로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청담동 매장이니만큼 지점장도 하수영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지역구 기초의원이기도 하니까.
"여기 지점은 앞으로 수영마트로 간판을 바꿔 달 겁니다. 당연히 라테그룹과는 상관없지만, 판매물품은 기존처럼 라테유통에서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예, 들었습니다."
"일반 직원들은 전원 고용승계를 할 겁니다만, 관리직 이상과 지점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자신의 처우 이야기가 나오자, 지점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