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07화
75장 재벌의 합의 방식(2)
오시경은 큰 절망감을 품었다.
부회장의 지시는 분명 '가해자'에게 두고두고 인생의 쓴맛을 새겨주라는 것.
하지만 그 일이 힘들게 생겼다.
"아무튼 합의 때문에 부르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얼마를 원하는 합의를 하고 싶습니다."
오시경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미리 생각해 둔 말을 읊었다.
"합의 내용에 사고 사실을 인터넷같은 곳에 발설하지 말라는 조건도 넣으실 거죠?"
"네, 어떻게 아셨……."
"뻔하죠. 이런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요."
오시경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26억이면 합의하죠."
오시경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일반인이 그런 금액을 불렀다면 '역시 거지는 어쩔 수 없군. 합의금 장사나 두둑이 할 생각밖에 없어'라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면 하수영 같은 인물이 26억을 부르다니? 25억도 아니고 30억도 아니고, 왜 하필 26억일까?
"혹시 금액을 그렇게 산정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차량 가격이 25억인데, 수리가 안되는 모델입니다. 새 차량을 주문해야 하니 25억, 그리고 동승 중이던 대리기사님이 크게 놀라셨으니 위자료로 1억, 그래서 26억입니다."
"선생님 본인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는 책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까?"
"응? 제가 받은 스트레스를 돈으로 물어주려면 라테그룹 다 팔아도 감당 안 될 건데요?"
"……."
"그 부분은 제가 너그럽게 봐주겠다는 겁니다. 오늘 좋은 소식도 들었고 해서요."
진석현의 회복이 절망적이라는 게 좋은 소식이라는 말인가?
"그 친구, 이미 술 먹고 차 몰아서 두 명이나 불구로 만들었다면서요?"
"……."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또 음주운전했으니, 앞날이 뻔하죠. 앞으로 그 친구가 운전대 잡을 일 없고 그로 인해 죽거나 다칠 사람도 생기지 않을 테니, 이게 바로 좋은 소식이죠."
라테그룹이라는 이름이 전혀 두렵지 않은지, 저런 '폭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하지만 오시경은 생각을 다시 했다.
이 사람은 진석현이 불구가 된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천벌을 받았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앞으로는 진석현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비극이 생길 가능성이 0이 되었다는 것, 그 사실에만 순수하게 기뻐하고 좋은 소식으로 여기는 것이리라.
사고방식의 그릇 자체가, 지금까지 오시경이 알던 그 어떤 사람들하고도 달랐다.
"……알겠습니다. 합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서에 들어가서 작성하죠. 입금 확인하고 서명해 드리겠습니다."
하수영은 서에 들어가서 경찰의 중 재를 받으며 합의서를 작성했다.
그 자리에서 26억 원을 입금받고, 합의서에 서명하기까지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시경은 복잡한 심경을 품은 채 하수영을 주시했다.
함구 의무를 담은 합의를 끌어냈으니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다.
이제부터는 하수영의 뒷조사를 하고, 나중에 라테그룹이 잘근잘근 짓밟을 수 있도록 사전준비를 해둬야 한다.
'이거 잘못하다가 고래 싸움에 내 등만 터지는 거 아냐?'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하수영이 정말 라테그룹이 무섭지 않을 만한 힘이 있고, 만약 자신이 뒷조사한 걸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 보복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쏟아지고, 라테그룹은 도마뱀 꼬리처럼 자신을 내버리지 않을까?
그때 하수영이 웃는 얼굴로 오시경변호가를 향해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의가 됐군요. 변호사님도 멀리 부산까지 내려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끝일까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제 잘못은 0이고 모든 잘못은 가해자 진석현 씨한테 있다고 하지만, 과연 재벌가 회장님이 그렇게 곧이 곧대로 생각할 거냐 이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분풀이를 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
"제가 그래서 지금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거든요? 은퇴하고 힐링 라이프도 좋지만, 가끔은 무료할 때가 있는데 그걸 달래줄 좋은 자극이 곧 생길 거잖아요. 그렇죠?"
오시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하수영은 경찰서에서 나온 뒤 대리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기사님. 안녕하세요. 저 어제 사고 났던 캠핑카 차주입니다."
-아,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전화는 왜…… 혹시 서에서 증언이 필요하다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그건 다 좋게 끝났습니다. 그냥 합의했어요."
-그러시구나. 다행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네? 좋은 소식이요?
"가해자가 있는 집 자식이라서 제가 혹시나 하고 기사님 정신적 피해 보상금도 요구했거든요. 1억이요. 그런데 주겠다고 하더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1억이라니요?
"기사님도 어제 내심 말씀은 안 하셨지만 스포츠카가 달려들었을 때 얼마나 무서우셨겠어요? 아무리 긴급상황이라지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뛰어들었잖아요. 충분히 놀라셨을 거 압니다."
-그래서 정말 저에게 1억을 주시려고요?
대리기사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네, 그러니 제가 기사님을 위해서 협상을 잘 했습니다. 예의는 차리고 싶어서요. 아, 있는 집 자식이면서 그 돈 1억이 아까워서 안 주려고 얼마나 발악을 하던지요."
-원래 있는 사람이 더 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튼 1억 더 줄 거냐 합의 없던 걸로 할 거냐, 윽박지르니까 결국 깨갱하고 꼬리를 내리더라구요. 계좌번호 불러주세요. 제가 바로 넣어드리겠습니다."
-아이고,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도 워낙 큰 걸 해주셨으니 제가 식사라도 대접을 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번호나 불러주세요."
하수영은 계좌번호를 받고 곧바로 1억을 넣어 주었다.
애초에 자기 돈도 아니고, 합의를 해주는 김에 기사도 겸사겸사 챙긴 것뿐이라, 괜히 줬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호텔로 돌아온 하수영은 캠핑카 미니 차고에 람보르기니를 집어넣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타이어에 아부다비 왕가의 문양이 보인다.
"스포츠카는 이제 별로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선 제압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안살린이 본가 뒤뜰을 토양연구에 빌려줘서 고맙다며 선물한 람보르기니,안전을 위해서 대형 캠핑카를 주로, 타고 다니지만, 오늘처럼 상대를 기죽이고 싶을 때는 큰 도움이 된다.
***
서울로 올라온 하수영은 곧바로 퍼포먼스를 제작판매하는 독일 자동차 제조사 딜러한테 전화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국내 유통딜러는 전화번호가 뜨자마자 곧바로 연락을 받았다.
-지금 수영레스토랑 본점에 와 있습니다.
"아, 그래요? 오래 기다리진 않았죠?"
-저도 금방 왔습니다.
"그래요. 저도 이제 들어갑니다."
하수영은 청담 3호기 빌딩 주차장에 퍼포먼스를 세웠고, 딜러가 부리 나케 뛰어와서 살폈다.
그는 흠집이 난 부위를 여러 방향에서 사진을 찍고, 부리는 직원들을 시켜서 대형스캐너 장비로 측면을 측정하기도 했다.
20분 정도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난 후 그가 보고했다.
"사장님, 더 자세한 건 입고를 해봐야 알겠지만 차체 프레임에 균열이 생기진 않았습니다."
"문제는 없다 이거죠?"
"네, 하지만 아시겠지만 티타늄 합금으로 만든 차체라서 저희 회사 기술로는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아마 수리비용이 신차비용보다 더 나올 겁니다."
"그럼 그냥 타고 다니는 게 낫겠네요."
"혹시 원하신다면 저희가 적정한 가격에 중고로 매입해 드릴 수 있습니다."
딜러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다른 케이스라면 턱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25억 원이나 되는 특별주문제작 차량 구매자다.
그리고 차에 사고가 나자마자 또다시 신차 주문을 넣는다고 했다.
이런 구매력을 지닌 고객이라면 장기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됐습니다. 중고가로 팔아봤자 10억도 못 받을 게 뻔하잖아요. 세컨용으로 쓰다가 나중에 쓸 일 없어지면 그냥 중고나라에 올려서 팔죠, 뭐."
"주, 중고나라요?"
"아무튼 저거 흠집 고치지 않아도 타고 다니는 데 전혀 지장 없는 건 확실하죠?"
"그럼요. 개인용 차량 중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이고 최고의 방호력을 자랑할 겁니다."
"그럼 카탈로그나 보여주세요. 신차 주문 넣게요."
"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둘은 3호기 빌딩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널찍한 테이블에 앉은 뒤, 딜러는 큼지막한 태블릿을 꺼내서 열심히 차량 모델들을 보여주었다.
"저번처럼 동일하게 퍼포먼스 1 모델을 티타늄 합금으로 주문 제작을 하실 거면, 저희가 이번에 추가로 넣어드릴 수 있는 프리미엄 서비스가 보시다시피……."
"퍼포먼스 2로 갑니다."
"네?"
"저번에는 돈이 없어서 보급형 1모델로 갔어요. 지금은 그때완 다르니까 퍼포먼스 2 모델로 가야죠."
딜러는 입을 살짝 벌렸다.
하수영이 구매했던 퍼포먼스 1 모델은 원래 차량 가격이 15억 원이다.
하지만 티타늄 합금 제작이라는 특별 옵션을 넣으면서 25억으로 뛴것이다.
캠핑카 제조사는 지금껏 부자들을 상대로 다양한 특별주문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은 하수영이 유일했다.
"퍼포먼스 2는 저희 회사에서 만드는 캠핑카 중에서 가장 비싸고 호화로운 모델입니다. 기본 가격 280만 달러(28억 원)에 티타늄 합금으로 옵션 변경 비용이 최대…… 150만 달러까지 추가됩니다."
"43억까지도 나올 수 있단 거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주문 넣겠습니다."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최대한 다양한 프리미엄 옵션을 넣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받아봤으면 좋겠는데, 저번처럼 급행비 같은 건 없나요?"
"그 부분도 제가 힘써 보겠습니다."
딜러와 미팅을 끝내고, 정서희가 3호기 빌딩으로 찾아왔다.
"이야기 들었어요. 부산에서 큰일날 뻔하셨다면서요?"
"큰일 날 뻔한 건 제가 아니고 건 축사 사무소 대표님과 직원분들이었죠."
"그래도 시속 270km로 차가 박았으면 충격이 크셨을 거잖아요."
"퍼포먼스 무게가 꽤 나가거든요. 몇백 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미니카가 들이박아 봤자 간지럽기만 하죠. 아, 가해자가 라테그룹 3세라고 들었어요."
"라테그룹이요?"
순간 정서희의 표정이 안 좋게 변했다.
하수영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생에선 라테그룹하고 저는 아무래도 악연으로 이어질 팔자인가 봅니다. 이미 한 번 서로 얼굴을 붉힐 뻔한 적이 있는데, 이제 제대로 붉히겠네요."
35,000원짜리 수영라면으로 한창 성장세를 달릴 무렵, 라테백화점에서 입점 제안을 해온 적이 있다. 불과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매출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가져가고 싶다는 조건에 없던 일이 되었다.
"역시 첫 단추가 잘못 꿰이니까 두고두고 나쁘게 얽히게 되나 봐요. 옛 어른들 말씀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그래도 합의는 잘 했습니다."
"합의 잘 했다고 안심하실 게 아니에요. 어쨌든 간에 그쪽에서는 수영씨 잘못이라고 생각할 테고, 나중에라도 분명히 보복이 들어올 거예요."
"그래서 저도 고민이에요."
"역시 걱정이 되시죠?"
"제가 먼저 선빵을 칠지, 아니면 드루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카운터를 날릴지."
"네?"
"어느 쪽이 더 재미있을지 진짜 고민이에요. 오늘 같이 고민좀 해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