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280화
68장 슬기로운 의정 생활(3)
"휴민트타워에 우리 본사가 들어갈만한 공실이 없을까요?"
정서희도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하수영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휴민트타워는 공실이 거의 없습니다. 있더라도 개인사업자나 작은 매장 정도나 입주할 수 있을 사이즈예요. 실비아컴퍼니가 입주하면서 공실을 꽉꽉 채워 버렸거든요."
프리덤 서비스 유통권.
실비아컴퍼니는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하수영의 마음을 얻어야 했고, 그 수단이 바로 휴민트타워 공실 채워주기였다.
애초에 실비아컴퍼니 같은 대형 IT 업체는 판교 쪽에 자리를 트는 게 유리하다. 굳이 청담에 입주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 실비아컴퍼니 경영진 및 주요 연구개발인력은 청담동 휴민트타워 사무실에 출근했다.
본사 소재지는 판교지만, 정작 일은 청담동에서 하고 있는 분리 형태가 된 것이다.
"한번 제가 장소를 알아볼까요?"
"아니면 우리가 따로 사옥을 매입해도 될 거 같은데? 난 청담보다는 압구정동이 더 좋아서 말이야."
"압구정동으로 오서도 문제없습니다. 거기도 제 선거구거든요. 지역구민들에게 어필하기 좋아요."
하수영 입장에서는 청담, 압구정, 둘 중 하나면 된다.
지역구민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하수영이 자기 소유 회사를 지역구로 이사시킨 것이니까.
"저는 기왕이면 청담이 좋아요."
"청담은 우리가 살 만한 매물이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고…… 일단 한 번 알아보지."
"사세 확장을 생각하면 사옥은 큰 빌딩으로 구해야 합니다. 나중에 괜히 또 이사한다고 그러면 곤란해요."
프라임컴퍼니의 가장 큰 효자 상품은 뭐니 뭐니 해도 라면이다.
JM식품 등 여러 라면회사와 제휴한 것까지 포함해서, 연간 약 1.6조원이 넘는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
해외업체가 사가는 것까지 포함된 수치다.
하지만 라면 외에도 겁밥, 도시락등 다른 식품에도 열심히 투자하고 있는 중이다.
궁극적으로는 과자, 아이스크림, 식자재 유통 등 모든 영역을 섭렵해, 최강의 식품회사로 거듭나는 게 목표점이었다.
"걱정 말게. 10년 뒤에도 이사를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크고 넉넉하게 구입할 테니까. 아니면 땅만 사서 아예 새로 짓든가 해도 되고."
"그나저나 우리 본사가 서울로 옮겨온다면 경기도청에서 펄쩍 뛰겠네요. 우리 회사, 올해 귀속분 예상법인지방소득세만 400억 정도거든요."
"이사 못 간다고 발목 붙잡고 늘어지는 거 아닙니까?"
"공장 옮기는 것도 아니고 본사만 옮기는 건데요, 뭐. 사실 들고 나갈 짐도 그다지 많지 않아요. 개인용품제외하면 아예 새로 구매해도 되고요."
"이미 임원들은 강남사무소에 출퇴근하고, 공장은 출장 개념으로 방문하고 있잖나."
"400억…… 경기도청 입장에선 확실히 순순히 놓아주기는 싫겠네요."
프라임컴퍼니가 경기도에 내는 돈은 400억이 전부가 아니다.
주민세, 사업소세, 재산세, 자동차세, 공장 운영 과정에서 내는 다양한 종류의 세목을 부담하고 있다.
그래도 가장 으뜸인 항목은 역시 법인지방소득세.
본사를 옮기면 공장 관련 지출(인건비 등)은 그대로 남지만, 법인관련세목은 몽땅 없어지게 된다.
"이런 건 협의하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진행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하지만 공장이 경기도에 있잖아요? 인질이나 마찬가지인데 심기 불편해진 도청에서 이런저런 압박이나 괴롭힘이 들어오면 어떡하죠?"
"인질 잡힌 건 경기도도 마찬가지야. 공장직원들 상당수가 경기도민인데 무슨"
막말로 공장까지 옮겨 버리면 경기도청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물론 경기도 용수시에 제2공장을 짓느라고 큰돈을 쏟아부은 프라임컴퍼니 입장에서도 손해겠지만…….
"어차피 본사를 경기도에 계속 유지해 달라는 조건은 우리가 못 들어 줘, 그러니 처음에 냉정하게 끊어내는 게 나아. 어설프게 붙잡혔다가는 두고두고 골치 아프다고."
"아무래도 이별은 단칼에 해치우는 게 낫겠지요."
하수영은 두 사람의 표정을 잔잔히 살폈다.
경기도청과 갈등이 빚어지게 될 상황인데, 두 사람은 어쩐지 신이 나보였다.
"두 분 혹시 경기도청과 밀당하는 걸 즐기시는 겁니까? 얼굴이 너무 밝아 보여서요."
"이정욱 도의원 말이야. 이수문 지사 사촌이자 오른팔이라던."
"아, 기왕 공장 지을 거면 용수시를 선택해 달라고 하셨던 그분이요?"
"뭐 좋은 혜택 좀 베풀어줄 줄 알고 용수시를 선택했는데 막상 경기도에서 해준 게 전혀 없거든."
"우리 입장에서 큰 손해 본 건 아니에요. 용수시도 어차피 공장 후보지 중 하나였으니. 하지만 공장 출장 나오는데 살짝 곤란함을 겪긴 했죠. 아무래도 지리적 접근성이 좀 차이가 있어서요."
"두고두고 괘씸했는데, 상대가 정치인이라 우리 쪽에서 먼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이참에 합법적으로 한 방 먹여줄 수 있게 돼서 기분이 좋네."
"너무 티 나지만 않게 하세요. 정치인들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세무조사가 내립니다."
"걱정 말게. 선은 지킬 테니까."
***
전성렬은 압구정동 위주로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서 사옥으로 쓸 만한 빌딩을 알아보았다. 여차하면 아예 오래된 빌딩을 허물고 새로 지을 마음도 있었다.
정말 발품을 팔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쪽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부동산업체를 찾아서 매물이 있는지 문의만 했다. 뭐, 압구정동까지 왔다 갔다 한 것도 충분한 발품이다.
"대표님, 지금 압구정동에는 프라임컴퍼니 같은 대기업이 본사 사옥으로 쓸 만한 빌딩 매물은 없어서요. 입지 면에서도 차라리 삼성동이 더 나을 겁니다."
"압구정동이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물론 청담동도 상관없습니다만."
"네? 청담동은 더더욱 비효율적입니다. 그 동네는 명품 브랜드나 슈퍼카 브랜드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그냥 쇼핑윈도우 동네입니다."
"아무튼 압구정, 청담 아니면 이사할 생각 없으니 그렇게 알아주세요. 기왕이면 압구정동으로 올인해서 알아보는 게 나을 겁니다. 청담은 이미 우리도 충분히 알아볼 만큼 알아봤어요."
정확히는 청담 매물은 하수영이 자세히 꿰뚫고 있기 때문에, 굳이 탐색 수고를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압구정동 본사 탐사 미션을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예상했던 일이 터졌다.
"대표님, 이정욱 도의원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미팅 약속을 잡았습니다."
"음. 그래요?"
"네, 서울까지 직접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피할 수 없겠군요. 알겠어요."
아침 일찍 강남사무소에 출근한 전성렬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경기도청에서도 드디어 프라임컴퍼니 본사 서울 이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그래도 너무 빠르긴 하네.'
직원들이 말을 흘렸을 리는 없고, 어디에서 새어나갔을까?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전성렬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기다렸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이정욱입니다."
이정욱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40대인 그는 연배로 치면 전성렬보다 많이 어린 편이다.
하지만 상대는 광역자치단체 의원, 게다가 강력한 대권주자인 이수문지사의 친척이자 오른팔이다.
"어서 오십시오, 이정욱 의원님."
"갑작스러운 만남 제안에 당황하셨을 줄 압니다. 먼저 그 점을 사과드리겠습니다. 너무 놀라운 소식을 들어서 예의를 지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충분히 젠틀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요?"
"네, 프라임컴퍼니가 서울로 이전을 한다면서요?"
"아, 본사만 이전하는 겁니다. 공장같은 생산시설은 현재 그대로 유지 될 겁니다. 울산공장단지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프라임컴퍼니 같은 대기업이 빠져나가면 우리 경기도 입장에서는 타격이 큽니다. 부디 재고를 해주시지요. 도에서 지원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저번에도 그런 말로 용주시에 공장을 유치했으면서 입을 싹 씻은 것은 누구더라?
물론 전성렬은 그 말을 입에 내뱉지 않았다.
"우리 프라임컴퍼니가 더 큰 종합식품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이미 라면 시장 분야에서는 한국의 그 어떤 기업도 넘보지 못하는 슈퍼회사 아닙니까?"
"라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요. 과자를 포함한 모든 식품 시장에까지 진출한다는 게 회사 목표입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만 이미 이사회 의결로 결정이 난 사항이라 이제 와서 제가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대표님!"
이정욱은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릴 듯한 기세였다.
이런저런 권유를 하기도 하고, 당근을 마구 던지기도 하고, 애원을 하기도 했다.
경기도의 한 해 수입(예산이 아님)은 약 16조 원에 달한다.
그에 비하면 400억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방정부 입장에서 보면 하루아침에 예산 400억이 없어지는 일이다.
매년 400억 이상을 갖다 바칠 수 있는 기업이 짐을 싸서 나가겠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프라임컴퍼니는 지금도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다.
저 400억의 세수가 나중에는 4,000억이 될지 누가 아나?
"차라리 판교로 옮기시지요. 도정부에서는 그곳에 입주한 기업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실비아컴퍼니, 네이탑, 쿠글코리아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은 상태입니다."
"거기는 테크노밸리 시티 아닙니까? 우리 같은 식품제조회사하고는 맞지 않는 거 같은데요."
"식품제조야말로 첨단 기술과 공정과정이 필요한 영역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IT기업들만 득실거리는 곳에 식품회사가 들어가는 것은 뭔가 모양새가 이상합니다."
아마 다른 기업들 사이에서 좋은 구경거리가 되지 않을까?
"대표님, 한 번 더 생각해 주십시오!"
"일단 판교 이전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프라임컴퍼니의 올해 예상 매출과 이익은 20조 원과 1.6조 원이다.
영업이익만 따지면 국내 최고 기업인 서해전자의 약 1/16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이정욱 의원 입장에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거위였다.
***
전성렬은 판교 입주의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경기도정부의 매달림을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판교는 입지를 알아보는 척만 했을 뿐, 눈과 귀는 항상 압구정동을 향해 있었다.
이미 작년에 벌어둔 돈의 일부만 써도 번듯한 새 빌딩 하나는 뚝딱뚝딱 짓고도 남는다.
"아무래도 압구정동에서 이사할 빌딩 알아보는 게 소문이 난 거 같아. 그게 흘러 흘러 경기도정부까지 들어간 거지."
"그래도 정보가 상당히 빠르네요."
하긴, 부동산 업자들 사이에서 말 흘러가면 그거 퍼지는 거 순식간이다. 매수인을 위한 좋은 매물을 추려내기 위해 업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흘러나가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휴민트타워가 참 아깝단 말이야. 거기가 우리 회사 사옥으로 쓰기에는 딱인데."
"실비아컴퍼니가 이미 입주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저도 전속중개사달달 볶고 있는 중이니까 좋은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그분이 청담, 압구정뿐만 아니라 강남3구 전체에서 발이 넓으신 분이거든요."
인내의 끝은 달콤했다.
압구정에서 적당한 매물이 나타난 것이다.
아주 썩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당장 입주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건실한 빌딩이었다.
빌딩을 살피러 온 전성렬은 희색이 돼서 하수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어떤가, 괜찮지? 소유권이나 등기 부도 아무런 하자 없고 건물도 아주 상태가 좋아. 오늘 당장에라도 계약 할까?"
"글쎄요. 이상합니다."
"무슨 말인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요. 왠지 이 빌딩을 사면 안 될 거 같은… 그런 설명하기 힘든 예감이 듭니다."
전성렬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빌딩이나 땅에 우리가 예상치 못한 하자가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