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274화
67장 밥 잘 사주는 부자 의원(2)
"진짜야?"
"진짜지, 그럼. 국민 배우 장효주 얼굴을 몰라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실물이 훨씬 낫네. 드라마에서는 매번 못나게 나온 거네."
"여신이네, 여신."
"싸인 좀 해달라고 하면 안 될까?"
보좌관들은 노인 지지자들이 자기 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그만 웃을 뻔했다.
돈 많고 시간 많은 청담동 노인네들이라고 해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하는 행동을 보면 그냥 노인정에 출근 도장 찍는 평범한 노인네들하고 다를 게 없다.
"우리 며느리가 장효주 엄청 팬인데, 지금 전화해서 오라고 할까?"
"아서, 김씨. 그전에 갈 기세인데 무슨."
"뛰어오면 5분이면 온다고. 안 되겠어. 전화 한 통…… 아니, 카톡으로 알려줘야겠어."
"며느리 사랑은 시애비라더니. 쯧."
노인 지지자들은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봤다.
"근데 우리 하 의원하고 여배우 장효주하고 무슨 사이지?"
"엄청 친한가 보네. 매니저도 없이 직접 화분 들고 당선 축하한다고 찾아올 정도면."
"아, 장효주가 CF 몇 번 찍었잖아. 거 머시기 라면 CF도 찍고, 드링크 CF도 찍고."
"아, 그러네. 그럼 둘이 서로 친할 만하겠어."
"근데 분위기가 너무 다정한 거 아닌가? 아무리 봐도 보통 광고주 여배우 사이는 아닌 거 같어."
"우리 하 의원이 뭐가 모자란가? 나이가 많은가, 돈이 없는가, 집이 없는가, 직업이 없는가? 다 가진 진구인데 아무리 톱스타 여배우라도 마음이 넘어가지, 안 그래?"
"장효주 배우, 이 노인네가 주책없이 오랜 팬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하수영 의원은 안 된다."
"정치하는 사람이 연예인 스캔들 나고 그러면 별로 좋을 게 없을 텐데, 걱정이네."
"정 우리 하 의원이 좋다면 청담동 노인정에 일단 면접 신청부터 해라. 그 다음에 생각해 보자."
간만에 얻은,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지역 일꾼이다.
아무래 대여배우이고 팬이라고 해도, 지역 일꾼의 미래를 망치는 문제는 타협할 수 없다.
"시어머니가 한 수십 명쯤 뒤에서 노려보는 기분이에요."
"죄다. 할아버지들입니다. 차라리 시아버지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제가 지금 시댁에 면접 온 며느리 된 기분이라는 것은 이해하신다는 거죠?"
"열성 지지자분들이라서 이것저것 참견이 좀 심하신 편이죠. 그래도 저분들 덕분에 제가 무난하게 당선 될 수 있었어요."
수십 명이 넘는 유지들이 뒤에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음에도, 장효주는 움츠러들지 않고 이야기를 나다.
"저번에 말씀드린 드라마 말이에요."
"아, 기억납니다. 24부작, 상속을 마다하고 시골 내려가서 농사짓는 재벌 딸이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이야기라고 하셨죠. CG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다고."
대체 재벌 딸의 귀농 짝사랑 로맨스에 CG 비용이 왜 그리 많이 들어가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네, 그동안 예비군 훈련이다 뭐다 바쁘신 거 같아서 일정을 못 잡았는데, 이제 날을 잡아도 될까요? 제작자분이 너무 만나 보고 싶어 하세요."
"예비군 훈련이 아니고 군사 훈련입니다만, 알겠습니다. 언제가 편하시대요?"
"수영 씨만 원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오겠대요. 스튜디오 본사가 어차피 청담에 있어서요."
"그럼 휴민트타워로 오라고 하세요."
"여기 사무실로 오라고 하면 되나요?"
"사무실은 안 되죠. 구의원 신분으로 만나는 게 아니잖습니까. 여기 19층에 레스토랑 있으니 거기서 봅시다. 프리덤, 지금 바로 예약 넣어라."
-프라이빗 룸으로 예약 잡았습니다.
"그럼 올라가서 기다리죠."
하수영과 장효주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둘이 사무실을 나서자 보좌관들은 그제야 꾹 닫았던 입을 열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의원님, 진짜 장효주 배우하고 무슨 사이시지?"
"광고주하고 배우 사이라고 하기에는 사적으로 친분이 깊어 보이는데?"
"근데 지금 식사하러 가신 거 아니야?"
"다들 입조심해야겠다. 이거 자칫 스캔들이라도 나면 난처해져.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수석보좌관님."
"……."
최고연장자 보좌관은 갑작스러운 호칭에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 왜요. 의원님께서 수석보좌관이라고 하셨으니 수석보좌관 맞는거 아닙니까?"
"됐으니까 그만 놀리고 일이나 하자."
***
휴민트타워 19층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들어선 둘은 창가에서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각각 50대 초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프라이빗룸으로 들어섰다.
"안닝하십니까, 회장님. 저는 KI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 고주환이라고 합니다."
"총괄실장 장기석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하수영 앞에서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하수영도 정중히 인사를 받았다.
"하수영입니다. 여기 밥값은 제가 낼 테니 두 분 모두 부담 없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순간 두 사람은 당황해서 시선이 흔들렸다.
얼굴을 보자마자 밥값을 자기가 낸다고 하니, 뭔가 첫인상부터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장효주가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아마 기업가들한테 접대받으면 안된다는 것 때문에 그러실 거예요. 이제 공직자이시거든요."
"공직자?"
"제가 이번에 강남구 나선거구 보궐선거에 출마해서 구의원 당선이 되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가서 함부로 밥얻어먹고 그러면 큰일 납니다. 당장 지지자분들이 이 빌딩 1층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계세요. 그러니 부담 없이 식사하고 가세요. 저, 한 끼 대접해 드릴 정도는 됩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뤄졌다.
KI스튜디오는 드라마 쪽에서 제법 유망한 제작사였다.
이미 대박을 친 드라마만 3편이 되는 데다가, 중박 이상의 작품도 5편 이상 제작한 경험이 있었다.
"지금까지 외부 투자는 얼마나 받으셨나요?"
"아직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어느 방송국에 편성이 될지도 정해지지 않아서요."
"전혀 안 받았다고요?"
"네, 사실 저희는 이번 드라마에 자신이 있어서 방송국 투자를 제외한 외부 투자는 최소한으로 하고 진행했으면 합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수영 회장님의 투자만 받고, 그 외 투자는 일절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국영화상 최초로 이천만 관객 돌파를 예측한 그 재물운을 듬뿍 받아서 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총 제작비는 500억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편성예정 방송국에서 최대 220억을 투자할 예정이고, 제작사 자체적으로도 30억 정도 투자할 예정입니다."
"그럼 제가 250억을 투자하면 딱 맞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제작비가 예상을 웃돌게 되면……."
"제가 무조건 커버하죠. 설마 1, 2조 원씩 나올 건 아니지 않습니까."
"1조 원이라니요, 그 돈이면 이런 드라마 수십 개를 찍고도 남을 겁니다."
하수영은 그 자리에서 투자계약서를 썼다.
고주환은 벌써부터 대박 시청률을 찍은 것처럼 싱글벙글이었다.
"이천만 투자자분의 기운을 받았으니, 우리 시청률도 한 30% 이상 나오는 거 아냐?"
"정말 그러면 좋겠습니다. 요즘에는 25%만 나와도 초대박인 시대라서……."
"정말 감사합니다. 꼭 좋은 드라마만들겠습니다."
"네, 재벌 상속녀의 유쾌한 귀농짝사랑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재벌 상속녀요? 귀농? 짝사랑이요?"
"네. 제가 뭐 잘못 말했나요?"
"……."
"……."
순간 두 사람의 표정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어렸고, 하수영은 의아해서 장효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쿡쿡 웃으면서 설명했다.
"대표님, 제가 장난을 좀 쳤어요. 하수영 투자자님은 원래 내용 안 보고 사람 보고 투자하시는 분이시니까, 투자 무효될까 봐 걱정 않으셔도 돼요."
"아, 그래?"
"네, 그렇죠? 수영 씨?"
옆에서 장효주가 빤히 돌아보고 말하자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지인 찍는 드라마 잘되라고 돕는 거라서 내용이나 장르는 뭐가 됐든 상관없는데…… 재벌 상속녀의 귀농 이야기도 재밌을 거 같았는데 말입니다."
"……여기 시나리오를 가져왔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고주환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하수영은 손을 내밀었다.
두툼한 시나리오 대본이 후다닥 넘어갔다. 한 페이지당 머무르는 시간이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누가 보면 한 줄도 읽지 않고 뒤로 넘기는 듯한 모양새에 두 남자는 안색이 살짝 굳었다. 하수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휘리릭 넘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 봤습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제가 원래 빨리 읽어요."
"아, 예."
"블록버스터 이순신 사극이었군요. 그러니 CG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거였네요."
"예, 임진왜란 해전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 배신과 증오를 다룬 블록버스터 사극입니다."
드라마는 불후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 부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다.
"근데 500억 가지고 되겠어요?"
"예?"
"블록버스터 사극, 제대로 만들려면 그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게 같은데요. 군대랍시고 병사 역 배우 2, 30명 정도 세워 놓고 와아 하면서 돌격하는 거, 너무 없어 보여서 전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그, 그럼……."
"제가 더 투자할 테니까 돈 아끼지 말고 팍팍 써서 진짜 웅장한 느낌 나오게 한 번 만들어주세요. 다른 인물이면 몰라도 이순신 장군 이야기인데, CG나 함대, 전투씬이 대충 엉성한 거 원하지 않습니다."
하수영은 투자계약서를 다시 가져온 다음, 맨 앞에다가 1 하나를 더 적어 넣었다.
"그래도 그 양반, 아니 그분이 너무 FM이어서 병사들이 힘들긴 했어도 나라 입장에선 참 위대한 인물입니다. 아주 웅장하고 멋있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충무공을 많이 존경하시나 봅니다. 하긴 대한민국에서 안 그런 사람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군기가 너무 빡세서 밑에서 개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빚이라는 게 있으니……. 드라마에서 아무튼 멋지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예?"
마치 예전에 그 밑에서 직접 일해본 사람인 것 같은 말투에 고주환은 잠시 의아했다.
하지만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천억이는 이천억이든, 원하는 만큼 투자하겠습니다. 이익이 꼭 안나와도 좋습니다. 무조건 아주아주 웅장하고 멋있게, 한국 드라마에서 이런 초대형 블록버스터는 다시 안나오겠다 싶을 정도로 멋있게 해주세요."
"어, 어느 정도로 할까요?"
"아바타나 빨대져스, 아니, 어벤져스 시리즈 뭐 그 이상 가는 규모로 멋있게 해주세요."
"……."
"……."
고주환은 이게 행운인지 불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요즘 뜨고 있는 제작사라고 하지만, 그런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
미팅이 끝났다.
250억이 아닌 1,000억의 '1차 투자금'을 확보하게 된 제작사는 얼떨떨해서 돌아갔다.
어느덧 야경이 내려앉았지만, 나란히 앉은 하수영과 장효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둘은 언제부터인가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효주가 먼저 물었다.
"충무공을 정말 존경하시나 봐요?"
"네, 다른 위인이라면 몰라도 그분위인전 드라마인데 할 거면 진짜 제대로 해야죠."
"마음의 빚이라고 하신 건 뭔가요?"
"글쎄요. 지금 이 땅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그분께 빚이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조금 다른 의미 같았는데, 알았어요. 더 안 물어볼게요."
잠시 야경을 바라보던 하수영이 고개를 돌리고 장효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근데 왜 처음에 귀농 드라마라고 말했어요?"
"그냥 농장에 놀러갈 핑계거리 만든 거죠. 아시면서 굳이 확인하시는 건 뭐예요."
"장효주 배우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
"아니요, 그냥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요. 왜 오해하세요?"
"아, 질문을 잘못 선택했네. 그렇게 물어볼 걸 그랬나 봅니다."
"그럼 좋아한다고 대답하려고 했죠."
하수영은 아주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입을 열었다.
"……틈 같은 건 안 주시는 여자분인 줄로 알았습니다."
"지금 안 주고 있잖아요. 빠져나갈 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