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244화
60장 현질은 거들 뿐(1)
박호진 변호사는 의뢰인 하수영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우리 의뢰인께서 또 무슨 거액의 의뢰를 안겨주시려나.'
고등법원장 출신 변호사인 그에게 있어 15억의 수임료는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이엔드급 전관예우를 받는 이들 중에는 한 건에 수십억, 수백억을 받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15억도 상황 나름이다.
겨우 악플러 한 명을 때려잡는 데 15억을 줬으니.
어지간한 재벌 회장들도 그런 배포는 못 가질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박호진은 낯선 얼굴을 발견했다.
"인사하세요. 이분은 실비아그룹박덕준 회장님, 그리고 이분은 고등 법원장 출신의 박호진 변호사님 되십니다."
"안녕하십니까, 박호진이라고 합니다."
"박덕준입니다."
박덕준이라면 요즘 재계에서 한창 핫한 기업가 아닌가.
박호진은 비록 자신보다 훨씬 젊지만, 그에게 얼른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한편 박덕준은 다소 불안한 눈으로 하수영과 박호진을 번갈아 응시했다.
'검찰을 매수한다고?'
고등법원장 출신 변호사까지 호출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막 내지른 말은 아닌 거 같다.
고등법원장 출신 개업 변호사라면 법조계에 상당한 인맥을 갖고 있을 테니까.
하수영은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일단 변호사님께 상황 설명을 드리는 게 먼저겠군요. 해도 될까요?"
"네, 그러십시오."
박덕준의 동의를 구한 하수영은 박호진 변호사에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실비아컴퍼니가 검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으며, 그 대처 방안을 논의하고 싶다는 말에, 박호진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하수영은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설마 변호사님한테 서해그룹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달라,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의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요?"
"검찰 실세와 연결만 시켜 주십시오.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검찰 실세요?"
박호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네, 지금 실비아컴퍼니 기소를 담당하고 있는 실세가 있을 거 아닌가요? 그 사람과 연결만 해주시면 됩니다."
"……."
"꼭 실세 주체가 아니더라도 됩니다. 더듬어 올라가서 연결만 될 수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이 정도는 가능하시겠죠?"
단지 소개만 시켜주는 것이니, 박호진에게 크게 해가 될 것은 없다.
다만 대가로 얼마를 받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변호 수임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수고비 정도만 받으면 족할 일이지만…….
"따로 사례는 하지 않겠습니다. 변호사님에게는 그게 장기적으로는 더 좋으실 겁니다."
박호진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박호진이 중간에 수고를 해준 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다.
몇 푼 수고비를 받고 땡처리를 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인연이 두터워지는 게 박호진 입장에서도 낫다.
"한번 발 벗고 뛰어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박호진은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만 남자 박덕준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말 검찰과 담판을 지으실 생각 이십니까?"
"네, 원래 고양이를 잡으려면 고양이 집에 쳐들어가야 하는 법이죠.
물론 간식도 듬뿍 준비해야 합니다."
검찰을 무슨 고양이처럼 태평하게 생각하는 태도에 박덕준은 살짝 가슴이 떨렸다.
'가능하지 않을 텐데.'
서해그룹이 수십 년간 법조인 장학생을 얼마나 알뜰하게 키워왔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하수영이 협상을 벌인다 한들, 테이블에 앉지도 않을 것이다.
"수영 씨,대기업과 검찰, 언론으로 이어지는 카르텔은 매우 단단합니다. 외부의 섣부른 개입에 결코 흔들리지 않아요. 자칫 역효과만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아아, 전 그 카르텔을 부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지금 이 상황만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것뿐이에요."
"그게 그 말 아닙니까? 카르텔을 부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 상황을 없었던 것으로 합니까?"
"다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마시고 지켜보세요. 그리고 그 카르텔? 생각보다 그리 단단하지 않아요. 정석대로 이기려고 하니까 힘든 거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법으로 나가면 충분히 돌파 가능합니다."
그래도 박덕준이 불안해하는 눈치이자 하수영은 안심시켜 주기 위해 말했다.
"서해그룹이 수십 년 넘게 큰돈을 써가면서 법조인 장학생들을 육성하고, 관리해 온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 장학생들이 주요 요직을 꿰어 차고 서해그룹 오너 일가를 위해 보이지 않는 칼과 방패가 되어 주고 있죠."
"그런데 서해그룹이 검찰과 법원, 양쪽을 공평하게 대우해 주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편애는 어디든 존재하는 법이죠.
아무래도 공부를 더 잘하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더 가는 법아니겠습니까."
박덕준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표정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편애의 정도가 살짝 지나쳤던 거 같긴 해요."
"그 말씀은……."
"사실 재벌 총수입장에서 법원만 꽉 잡고 있으면 뒤탈이 날 일은 없죠. 체포영장, 구속영장 기각시켜 버리고, 설령 기소된다 하더라도 집행유예 끌어내면 그만이니까요."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지출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라면 아끼는 게 맞죠. 대기업이니까 더 착실히 그래왔을 테고요. 전 그 틈을 한 번 찔러볼 생각입니다."
"…먹힐 거 같습니까?"
"먹히게 만들어야지요. 다행히 우리 실비아컴퍼니, 요즘 돈 많잖아요."
"서해그룹을 치는 것도 아니고, 불법상속승계를 눈감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결백을 증명하는 것뿐이니 그리 출혈이 크진 않을 겁니다."
하수영은 피식 웃음으로 덧붙였다.
"물론 이런 거에 돈을 써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한 일이지만, 어쩌겠어요. 세상이 이런 것을. 그냥 참고 대충 맞춰가면서 살아야지요."
뭔가 세상을 오래 산 듯한 느낌이 묻어나는 중얼거림에, 박덕준은 입을 열 수 없었다.
***
황대호 차장검사.
박호진이 알려준 이름이었다.
하수영은 구글링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하지만 특별히 두드러지는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는 한국대 출신에 사법고시 차석, 연수원 차석의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는 엘리트였다.
임관 이후 줄곧 엘리트를 위한 고속승진로만을 걸어왔다.
"이 정도면 얼마든지 판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검사를 지원했다?"
기사 등의 정보 검색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검찰이 워낙 폐쇄적인 조직이다 보니, 진짜배기 정보는 전자상의 세계에 떠돌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박호진이 알짜배기 정보를 알려주었다.
"머리가 정말 좋고, 그만큼 야심도 큰 친구입니다."
"뭔가 많은 의미가 함축된 거 같은 말씀인데요."
"판사가 아닌 검사를 선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설명해 주시는 것은 곤란하신 모양이군요."
박호진은 난감한 웃음만을 지었다.
"제가 맞춰볼까요? 판사는 물주를 위해 항상 고분고분 몸빵을 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검사는 물주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칼끝을 돌릴 수도 있어서가 아닙니까?"
"재벌들 앞에서 겉으로는 살랑거리더라도 주도권을 놓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사실 검찰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법원 입장에서는 손가락만 빨고 기다려야 할 테니까요. 구조가 그렇잖습니까."
"……생각보다 예리하십니다."
"이 정도야 뭐. 게임 난이도로 치면 초급 중의 초급입니다. 마을 안에서 허수아비 치면서 연습하는 정도죠."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검찰 실세를 만나는 자리인데도 하수영은 조금의 위축기도 없어 보였다.
박호진은 처음에는 그런 여유가 막대한 자산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표정이나 눈빛, 말투를 보면 그의 자산이 자신감의 원동력은 아닌 거 같다.
얼마 후, 약속 상대가 룸에 들어섰다.
황대호 차장검사는 40 후반의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평범한 체격의 남자였다.
그는 박호진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오, 황 검사. 자리에 앉으시게."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제도 사무실에 언제 한 번 찾아뵈어야 하는데,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괜찮아, 괜찮아. 나랏일 하느라 바쁜 후배님이 사무실 구석까지 찾아오면 내가 다 마음이 불편해."
하수영은 둘이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선후배 사이라고 예의를 차리지만, 그다지 친해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검찰과 법원, 몸담은 곳이 서로 다른 데다가 연수원 기수 차이도 상당하다.
개인적으로 그리 특별한 친분은 없을 것이다.
건너건너 알고 지내며,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경조사 때나 얼굴을 보는 사이겠지.
"그런데 이분은……?"
"아, 본사에서 나오신 분이야. 내가 말했던."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박 회장님의 발언 그 자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차장님."
하수영을 보는 황대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고급 한정식이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누구도 젓가락을 들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일어서지. 편히들 이야기해요."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선배님, 벌써 가십니까?"
"수임 받은 사건 서류파일이나 읽어야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내가. 먹고살기 바쁘다니까."
박호진은 그렇게 자리를 비켜주었고, 둘만 남은 룸 안은 묘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하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설명을 드립니다. 박 회장님은 사실 이런 딜에 경험이 없으십니다. 초짜지요. 그래서 밀고 당기기 협상 같은 걸 잘 못 합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황대호는 천천히 술잔을 들어 입가에 갖다 대면서도, 하수영한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지금까지 얼마를 받으셨든…… 그게 50억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30억도 안 될 수도 있겠네요."
"50억? 그게 무슨 소리요?"
"장학금을 뜻하는 겁니다."
그 말에 황대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호의와는 결코 거리가 먼, 어처구니없는 노기를 분명히 담은 미소였다.
"500억으로 검사님의 남은 시간을 사고 싶습니다. 그게 회장님의 뜻입니다."
순간 황대호의 표정이 싹 변했다.
500억이라는 숫자가 겉으로 드러나는 평정심을 잠시나마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서해그룹은 차장검사 한 명을 위해서 그렇게 크게 지출을 못 합니다. 아니, 비용 절감을 위해 안 하겠죠. 법원만 꽉 잡고 있으면 아무 문제 없으니, 검찰은 최소한의보험료만 지불하면 된다는 계산일 테고요."
"물론 차장님도 그 사실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당신들은 다르다?"
"회장님 편을 들어 서해그룹과 싸워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잘못하지도 않은 것만큼은 쑤시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황대호의 숨결은 어느새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분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200억 원은 일시불로, 남은 300억 원은 20년에 걸쳐 분할 지급하지요."
오철현, 그리고 실비아컴퍼니를 지키기 위해 서해그룹과 부딪힐 필요는 없다.
서해그룹의 의뢰를 맡은 칼잡이만 확실하게 마음을 돌려놓으면 된다.
가장 효과가 좋으며, 가장 저렴하고, 가장 뒤탈이 적다.
"500억입니다. 서해그룹이 차장님께 그 반의반이라도 줄 일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