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238화
58장 청출어람 주객전도(5)
"박수무당?"
이현덕이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부친 이창영이 껄껄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이보게, 하 선생. 내 아들을 너무 그렇게 놀리지 말게나. 저 당황한 얼굴 좀 보게."
"요즘 제가 한남동 박수무당으로 불린다는 거 다 압니다."
"오, 알고 있었나? 다들 참 조심성이 없군. 하 선생 귀에까지 들어갔다니."
"그런 걸 굳이 직접 들어야 압니까."
"하긴, 앉은 자리에서 만 리를 내다본다는 우리 하 선생이라면 모르는 게 없겠지."
그 뒤로도 부친은 하원석을 향해 선거 결과에 대한 자세한 질문을 던졌다.
하원석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선거를 마치 과거의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었고, 부친은 그것을 진지한 표정으로 귀담아듣고 있었다.
정말 노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현덕의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저 젊은 사이비 무당이 부친을 홀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굴지의 서해그룹이 한낱 무당의 손아귀에 놀아난다니, 차기 회장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원석이 돌아가고 난 후, 부친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현덕을 불렀다.
"하 선생과 내가 이야기 나누는 거, 잘 들었느냐?"
"예, 아버지."
"속으로 내가 노망이 나서 사이비한테 그룹 경영을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아버지."
이현덕은 얼른 부정했지만, 부친은 믿지 않는다는 듯이 껄껄 웃을 뿐이었다.
"하 선생은 가짜가 아니다. 그리고 하 선생한테 그룹 경영을 많이 의존해온 것은 사실이다."
"예?"
"7년 전 국제금융위기 사태를 기억하느냐?"
"물론입니다."
후계자 수업을 받는 입장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7년 전 미국 월가에서 시작돼서 전 세계 금융경제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엄청난 경제 한파.
하지만 서해그룹은 역으로 미국 선물 시장에서 1,00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국내에 달러가 씨가 말랐을 때 해외에서 조달한 그 달러로 도산하는 알짜배기 기업을 사들여, 지금 같은 굴지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 선생은 그 금융위기 사태도 정확히 예언했었다."
"구체적인 발발 시점, 거시적인 피해 규모까지 틀리지 않고 맞췄지. 오죽하면 난 하 선생이 작정하고 일으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사실 이게 더 말이 안 되지."
"……그렇습니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부친은 정색을 한 채 말을 이었다.
"그 이후에 있었던 두 번의 대선…… 하 선생은 그 결과를 모두 정확히 맞췄다. 심지어 당선자들이 몇 표로 당선되는지, 1의 자릿수까지 전혀 틀리지 않았지."
"그,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내가 단언하는 거다."
부친은 어느 때보다 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 선생은 천기를 읽을 줄 안다."
그 뒤로 이현덕은 하원석이 예언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저택을 오다가다 하는 모습은 종종 보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부친이 그룹 비자금을 열심히 만드는 것은 돈을 빼돌리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에게 복채를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한 번은 부친이 이런 말도 했었다.
"아마 현금만 따지면 하 선생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을 거다."
"그 정도입니까?"
"우리 서해그룹에서만 복채를 받는 게 아니니까."
"……."
"다른 재벌 총수들이라고 한남동박수무당 하 선생을 모를까. 현덕아, 내가 점 한 번 볼 때마다 복채를 얼마나 줄 거 같으냐?"
이현덕으로서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턱대고 질문을 받으니 막연히 기준을 잡기 힘들었다.
"글쎄요…… 한 번에 5억 정도 주십니까?"
"5억?"
이창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껄껄 웃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최소 100억이다."
"배, 백억이라고요?"
이현덕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아무리 서해그룹 총수라 해도 100억은 절대 작은 돈이 아니다.
100% 현금, 그것도 비자금 계좌에서 내준다는 걸 고려하면 매우 큰 액수다.
심지어 점 한 번 볼 때마다 최소로 주는 돈이라니.
"너도 하 선생에게 잘 보여야 한다."
"우리 그룹을 앞으로 더욱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하 선생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 이후 이현덕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다시는 하원석을 볼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부하 임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 현덕은 잠시 잠겨 있던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앞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확인했다.
[해외자금 출납보고서]
한 장으로 요약된 보고서는 다름아니라,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룹 비자금의 큰 변동을 한눈에 정리한 것이었다.
원래 비자금은 부친이 직접 관리한다.
아무리 자신이 후계자라 해도, 부친은 비자금에 관한 것은 일절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 슬슬 비자 금 관리도 물려주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8조 원이라…….' 이현덕은 비자금 출납 내역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원석이 그간 서해그룹에서만 챙긴 복채가 무려 8조 원이 넘는다는 것을.
다른 재벌 기업들을 상대로 받은 복채까지 합치면 엄청난 액수일 것이다.
부친이 괜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사람'이라고 농담처럼 말한 게 아니었다.
이제 와서 불현듯 옛 생각이났던 것도 복채로 나간 돈을 확인한 때문이었다.
'돈을 잘 세탁해서 아들에게 물려 줬나 보군.'
어쩌면 개인비서 인공지능 프리덤을 개발한 것은 하수영이 아니라 하원석일지도 모른다.
물론 직접 개발을 했다는 것은 아니고, 복채로 번 돈을 개발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나노소프트.'
그리고 최근 하수영은 나노소프트와 제휴를 맺고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아마 나노소프트도 프리덤을 탐내고 있을 것이다.
수영레스토랑 예약 결제 기능을 탑재한 프리덤이 북미 시장에 진출했다는 소식이, 이현덕의 마음을 더욱 다급하게 만들었다.
"다음 차세대 겔드폰에 프리덤을 탑재할 수 있을 거 같은가?"
"부회장님, 개발자를 설득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인수 카드를 써야 할 거 같습니다."
이현덕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정녕 실톡을 인수하는 수밖에 없나…"
"실비아컴퍼니 덩치가 너무 커져서 정공법으로 인수합병하는 것은 아무 래도 어렵습니다. 적당히 양념을 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주의해서 실행하도록."
"예, 부회장님."
20분.
김주원과 친해지기 위해 딱 필요한 시간이었다.
즉석에서 조리한 수영라면은 김주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하수영은 대번에 그와 친해질 수 있었다.
김주원은 하수영을 당연히 자신과 같은 로열패밀리 일원으로 인식했고, 덕분에 거부감 없이 친분의 문을 연 것이다.
물론 하수영은 급속히 친해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라디에이원 빌딩을 팔라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청담동의 모든 부동산을 1개의 택지로 묶어버리는 게 제 꿈입니다."
"오, 그래요? 그러려면 청담동을 송두리째 사셔야 할 거 같은데, 그게 가능할 거 같아요?"
"돈만 있으면 안 될 건 없죠."
"돈만으로는 안 될 텐데. 청담동주민 중에서 돈이 아쉬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면 돈이 부족한 건 아닌지 조용히 생각해 보면 됩니다."
"와, 그거 명언인데."
"이런 말 SNS에서는 흔해요."
급속히 친해진 둘은 양주를 병째로 까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잠시 일어날게요. 고생한 다른 분들에게도 인사 나누고 술잔 돌려야 죠."
"아, 그러세요."
김주원이 중간에 잠시 일어났고, 장효주가 다가와서 하수영 앞에 앉았다.
"친화력이 보통이 아니시네요? 김주원 대표님이 겉보기에는 사근사근해 보여도 사람들에게 잘 틈을 내주지 않는 분이신데."
"고금을 통틀어 맛있는 요리는 사람의 경계심을 쉽게 허물어뜨리는 법이죠."
"궁금한 게 있는데, 수영 씨는 가장 자신 있는 요리가 뭐예요?"
"전 요리사가 아닙니다. 요리를 만들 뿐이죠."
"어쨌든 일반 요리사들보다는 요리를 훨씬 잘 하신다는 거 아닌가요?"
"아, 그게 저는 원래 재료빨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서."
"… …?"
"사실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조리 비법을 개발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열심히 밭을 갈아서 좋은 재료를 키워내는 데 치중하고 있죠."
"그런가요."
장효주하고도 가볍게 술잔을 부딪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파티 분위기는 자유로웠고, 스태프들은 오랜만에 가지는 휴식과 음식, 술을 즐기고 있었다.
"영화가 정말 이천만 넘을까요?"
"넘습니다. 제가 30억 투자하고 회식까지 왔으니 무조건 넘습니다."
"응원 고마워요. 덕분에 힘이 나네요."
"응원이 아니라 사실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미래를 본다, 뭐 그런 건 아니겠죠."
"미래를 보다니요. 그건 제가 입신 공부를 전부 다 마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입신공부가 아니라 부동산공부에 치중하고 있어서…"
"……?"
한창 파티 분위기가 흥겨울 때, 갑자기 새로운 손님이 한 명 더 나타났다.
어두운 고급 정장을 걸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다.
슬쩍 확인한 장효주가 조용히 말했다.
"백 대표님 오셨네요."
"백 대표?"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린 하수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저 사람은?"
"안면이 있으신가 보네요. 근데 백대표님은 가수기획사 사장이신데…"
"한때 제 세입자였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세입자라는 말에 장효주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저 양반도 영화에 투자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정 감독님하고 친분이 있어요. 소속사에서도 아이돌 몇몇 조연으로 출연시켜 주셨고요."
-건물주 바뀌었으니까 1억 3천으로 줘. 너도 성의를 보여야지.
-그럼 결정 났네. 이제 마시자.
수영레스토랑 본점이 입점해 있는 3호기 빌딩.
과거 그 빌딩의 지하 전체를 룸싸롱으로 운영했던 홍윤주의 남자이자 원스타엔터테인먼트 대표, 백호열이었던 것이다.
"청담이 좁은 듯하면서도 은근 넓네요. 이제서야 겨우 부딪치네."
"……역시 안 좋은 인연이 있나 봐요?"
"역시라는 거 보니까 효주 씨도 아는 모양이군요."
장효주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백 대표님 소문 안 좋은 거,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 없어요. 정 감독님도 마찬가지고요. 워낙 연예계 마당발에 영향력이 크니까 어쩔 수 없이 숙이는 거죠."
"전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그 정도로 심각해요?"
"그건 아니고, 괜히 다른 분들 기분까지 망칠 필요는 없잖아요."
백호열은 으스대듯이 홀에 들어서다가, 불현듯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저, 저놈은!'
순간적으로 그의 안색이 경직되며,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런 심정을 전혀 모르는 정태오감독이 다가와서 굽실거리며 인사했다.
"대표님, 어떻게 이 먼 길까지 와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정 감독, 저 친구가 왜 여기 있어? 자네, 저 친구하고 무슨 사이야?"
"아, 하수영 대표님이요? 저분도 우리 영화 투자자이십니다."
백호열은 하수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얼마 투자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