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229화
57장 낭비는 비극이다(1)
"이만 움직이죠."
이사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앤서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벌써 타겟의 위치를 확보했나?"
"이거 군사 작전 아니에요. 비즈니 스라고요."
"그 둘은 공통점이 많지. 첫째, 이 기기 위해서는 많은 실탄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
"어서 움직이죠."
이사벨이 냉정하게 말을 자르자, 앤서니는 피식거리며 뒤따라 일어났다.
나노소프트.
전 세계 PC 운영체제를 휘어잡고 있는 글로벌 공룡 기업이며, 하드웨어의 오랜 명가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NS가 윈드밀만 만드는 줄 알지만, 노트북과 게임기, 마우스와 키보드 등 다양한 종류에 걸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IT 분야라면 손을 대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단 소리다.
"그래도 스마트폰은 안 돼. 이미 그쪽 시장은 답이 없어. 레드 오브레드 오션이라고."
"아니라니까요."
개인비서 인공지능, 프리덤의 등장은 NS를 포함한 첨단기술 회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인공지능 비서도 프리덤처럼 정확하게 말을 알아듣고, 사람 이상으로 적절한 조언이나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오죽하면 전파 너머에 사람이 직접 대사를 쳐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쿠글 쪽은 어때?"
"거기는 아직 알아내지 못한 거 같아요."
"그렇게 탐욕스럽게 사용자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이터 탐식자들이 프리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여태 못 알아냈다고?"
"그만큼 프리덤 개발자가 외부 활동이 적었던 거죠. 물론 어디까지나 '개발자'로서 말이에요."
"무슨 말이지?"
"개발자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참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더군요. 물론 한국 내에서 이긴 하지만."
"개발자가 아닌 다른 분야?"
"네, 개발자로 활동한 건 딱 한 번 뿐이었어요. 그게 바로 프리덤이었죠."
"말이 안 되는데. 그런 엄청난 AI를 개발할 때까지 존재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불가능해."
"우리가 확실히 확인했어요. 프리 덤 개발자는 해커 활동, IT 분야 취직 등, 프로그래머로서 일체의 활동을 한 적이 없어요."
앤서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답은 하나로군. 그 사람은 진짜 개발자가 아니야."
"어째서죠?"
"바둑을 생각해 봐. 전 세계 챔피언을 단숨에 찍어 누를 수 있는 실력자가 있다고 쳐. 그 사람이 그만한 실력을 쌓기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게 가능할까?"
"그건 그렇네요."
"평생 바둑을 한 번도 두지 않았다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럼 그런 실력을 쌓을 수 없어. 그러므로 "
"상관없어요. 프리덤 소유권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히 확인했으니까."
"……."
"그 사람이 진짜 개발자가 아니라면 우리를 안내해 줄 소통 창구는 되어줄 수 있겠죠."
하수영은 눈앞의 불청객을 지그시 바라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남자들의 시선을 빼앗을 것 같은 미모의 젊은 백인 여성, 그리고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백인 남성.
통역을 대동한 그들은 차례차례 자기소개를 했다.
"이사벨…… 앤서니 ……."
하수영이 명함을 확인하며 중얼거리자, 통역가가 얼른 말을 이어 붙였다.
"협상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먼 미국에서 왔습니다. 부디 유익하고 진지한 소득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먼 미국에서 수영레스토랑까지 찾아온 손님들.
'언제고 한 번 부딪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저들의 움직임이 느렸다.
프리덤이 출시된 게 언젯적 일인데.
달리 생각하면 실비아컴퍼니에서 그만큼 보안을 철저히 관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라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곤란합니다. 정리를 하고 나올 테니 30분 정도만 기다려주세요."
하수영이 유창한 발음으로 발언하자, 이사벨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영어를 하시는군요."
"웬만한 언어는 다 할 줄 압니다."
그 말에 앤서니의 눈빛이 살짝 꿈 틀거렸다.
이사벨은 동행의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여러 언어에 능통하신 분이었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통역을 구한다고 시간을 잡아먹지 않아도 됐을 거 같네요."
"무슨 언어를 제일 잘하시오?"
그때 앤서니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자바? C++? C#? 아니면……."
"그거 전부 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요. 물론 제일 잘하는 건……."
앤서니는 물론이고, 이사벨까지도 숨을 죽인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기계어죠."
"……!"
"원래 심심할 때 숫자 연산으로 시간을 보내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기계어가 가장 좋습니다. 얼마나 깔끔해요. 0과 1로만 이뤄져 있으니."
앤서니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그게 깔끔하다니!'
이 청년은 혹시 두개골 안에 뇌세포 대신 실리콘으로 뭉쳐진 CPU가 들어있는 건가?
"저기, 프리덤은 그럼……!"
"30분 뒤에 봅시다."
하수영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매장 안은 여전히 바빴다. 쉴 새없이 손님이 들어오고, 또 쉴 새 없이 요리가 나간다.
"무슨 라면 한 그릇에 35불이나 한다는 거지?"
"그만큼 맛있다나 봐요. 기왕 기다릴 겸 우리도 한 그릇 먹어보는 게 어때요?"
이사벨과 앤서니는 호기심에 수영라면을 시켜보았다.
그리고 면발과 국물에 담긴 깊이 있는 맛에 전율했다.
"이사벨! 우리 NS 본사 사내식당에도 반드시 이 메뉴를 넣어야만해!"
"한 그릇에 35불이나 하는 라면을 넣었다가는 회사가 파산하고 말 걸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사벨도 수영라면이 가진 품격과 중독성을 자랑하는 맛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지구상에 어떻게 이런 라면이 존재하고 있었을까?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수영이 다시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빙 유니폼을 벗고 평상복으로 입은 그가 다가와서 말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이만 움직이실까요?"
"네, 그래요."
하수영은 3호기 빌딩 안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 알바가 하수영을 알아보고 밝은 웃음을 진 채 인사를 건넸다. 신입으로 보이는 알바가 옆에서 수군거렸다.
"누군데 그렇게 환하게 인사해요?"
"쉿, 여기 건물주셔."
"어머, 저렇게 젊은데?"
"그러니까. 인물 훤하시고 마음씨도 좋으신데 이런 건물까지 갖고 있으니, 얼마나 대박이야?"
"어머, 어쩜."
둘의 주문 의사를 확인한 하수영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 뒤 자리에 돌아왔다.
"어떻게 제 가게를 알아냈는지는 안 물어볼게요. 별 의미는 없는 거 같으니까요."
"혹시 언짢게 해드렸을까요."
"특별히 그런 건 아닙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무거운 원자 주위로 전자가 몰리는 거야 어쩔 수 없죠."
"NS에서 오셨다고 했죠?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가요?"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본론을 열어버린다.
이사벨은 상대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차세대 윈도우에 프리덤을 기본 탑재했으면 합니다."
옆에서 앤서니가 '내가 그거일 줄 알았다.'라는 표정을 한껏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이사벨은 그런 반응을 무시하며 꿋꿋이 말을 이었다.
"우리 NS에서는 현재 모든 분야에서 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차세대 운영체제를 개발 중입니다.
"모든 분야?"
"네, PC는 물론이고 스마트폰, 데 이터센터 서버, 수퍼컴퓨터, 나아가 민항기와 인공위성, 군함과 전투기까지 제어시스템이 필요한 모든 분야에 설치할 수 있는 통합 OS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아니, 사티아가 나한테는 그런 말전혀 안 했는데?"
"극비 사항이니까 개별 개발자들한테 일일이 설명하지 않은 거예요."
"낭비도 그런 낭비가 어디 있어! 개인 전자기기야 운영체제를 미리 통합해 두면 좋겠지만, 왜 전투기까지 넣는다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미스터 앤서니? 제 생각에는 모든 전자기기를 제어할 수 있는 극단적인 범용성을 지닌 운영체제 개발에 대한 욕심 때문인 거 같은데요."
이사벨이 그 말에 환한 미소를 보였다.
"맞습니다. 역시 프리덤 개발자이 시라서 바로 알아보시네요."
"뭐, 기술이 계속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운영체제 같은 것도 결국 통합이 되겠죠. 핸드폰에 온갖 기능을 다 때려 박아서 통합을 이뤄낸 것처럼요."
"우리는 프리덤에서 구체적인 가능성을 봤어요."
그제야 앤서니는 정확한 내막을 이해했다.
정말로 전투기에 윈도우를 설치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PC용으로 만든 운영체제가 전투기에 설치해도 무방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궁극형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실 쿠글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런, 설마 이미 접촉을 하신 건가요?"
"아니오, 실비아컴퍼니 통해서 손편지를 받았어요. 저한테 꼭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물론 답신을 하진 않았습니다."
이사벨의 눈동자가 긴장으로 물들었다.
언뜻 보기에도 하수영의 태도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사실 제가 본업이 따로 있다 보니, 코딩 작업에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어서요."
"본업이요? 아!"
"그런 깊이 있는 라면을 개발하고 만들어서 손님들이 즐거워하는 반응을 보는 게, 바로 제 낙입니다."
"…."
"우리 가게에서 파는 라면에 들어가는 거의 대부분의 재료는 전부 제가 직접 키우는 것들입니다. 농장관리하랴, 종자 개발하랴, 메뉴 개발하랴, 그러면서 매장이 입주할 빌딩도 매입하고 관리하랴, 바빠요, 바빠."
"음, 확실히 그런 훌륭한 맛을 지닌 음식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신성한 일을 코딩 작업 따위에 비교할 바는 아니…"
"앤서니, 설득하러 왔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하지만 사실이잖아? 이사벨도 맛보지 않았어? 그런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셰프에게 어떻게 코딩 따위에 투신하라고 권유할 수 있단 말이야?"
"…."
이사벨은 기가 막혔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 같은 프로 그래머로서 통할 게 있을 거 같아 데려왔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이런, 미스터 앤서니가 제 자식 같은 음식의 가치를 알아주니 정말 기쁘네요."
"세계를 상대로 그 라면을 판다면 아마 윈도우 따위로는 벌지 못할 천문학적인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을 겁니다. 이사벨, 우리 회사도 이참에 요식업계에 진출하는 건 어때? 수영라면의 맛을 전 세계에 널리 퍼뜨려 보자고."
"사실 프리덤은 심심해서 한 번 만들어본 겁니다. 처음에는 손님들이 예약, 주문, 결제를 간편하게 할 수 있게끔 할 목적에서 만든 거죠."
"오, 그렇습니까? 역시 과학자들은 심심할 때 뭔가 걸작을 내놓는군요."
"네, 주문과 결제가 간편하다면 매장 매출 증가를 기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과는 어떻습니까?"
"보다시피 대박 났습니다. 지금 서울에만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50개가 넘었어요."
"혹시 우리 미국 본사에 가맹점을 내실 마음은 없나요? 허락만 하신다면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지고 진행하겠습니다."
"먼 미국에서까지 제 라면을 드시러 오신 분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죠."
"승낙하신 겁니다?"
"콜입니다."
어느덧 두 남자는 죽이 맞아서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영라면에 들어가는 재료들의 특징과 재배 방법, 그밖에도 하수영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 이 빌딩에서 횟집도 운영하신다고요?"
"중금속 무공해 참치라고 들어보셨나요?"
"아, 동료가 한 번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아요. 얼마 전 일본 호텔 행사에서 맛본 적이 있다고…….
"그 참치도 제가 기른 겁니다."
"오, 정말입니까!"
그렇게 두 남자는 꼬박 두 시간이 넘도록 음식에 관한 수다로 시간을 하얗게 불태웠다.
그 자리에서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SNS 메신저 친구추가까지 했다.
"조심히 들어가게, 친구!"
"앤서니 당신도 차 조심하고, 한국출발하기 전에 또 한 번 연락해요!"
하수영과 헤어지고 난 뒤, 이사벨은 희희낙락해하는 앤서니를 팔짱을 낀 채 지그시 바라봤다.
"프리덤을 사오랬지, 누가 레스토랑을 영입하랬어요?"
"이사벨, 당신도 그 라면 맛을 봤잖아. 그런 맛을 개발할 수 있는 사람이 전투기 운영체제 개발 따위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정말 비극적인 낭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