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97화
49장 부족한 것은 절실함(1)
"이게 뭐야. 무서워."
박정식은 부르르 떨었다.
정전 자체야 대단한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도 어쩌다가 한 번씩 겪곤 하는 일이니.
대부분은 길어봤자 1시간 이내로 복구가 된다.
하지만 한밤중에 온통 암흑으로만 뒤덮인 거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마치 서울이 아니라 어디 오지의 산골에 원룸으로 날아간 듯한 기분이다.
이렇게나 새카만 서울의 밤거리라니.
박정식의 경험, 기억에는 없는 광경이었다.
낯섦의 크기만큼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수수떨어지는 우박 알갱이 소리가 공포를 더욱 부채질했다.
"아차."
그는 부랴부랴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서 전등을 찾았다.
"프리덤, 태풍이 대체 언제쯤 가실 예정이야?"
「일기예보에 따르면 태풍은 적어도 3일 이상 한반도에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예정입니다.」
"3일이나?"
「최소 3일입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변수가 많습니다.」
박정식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지금 태풍, 우박이 서울만 때리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때리고 있는 거 맞지?"
「예, 그렇습니다. 전국적인 피해 사례가 속출해서, 재난본부의 제대로 된 구조지원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날씨에는 헬기도 제대로 못띄울 테니까."
박정식은 남은 식량을 살폈다.
라면과 계란, 햇반.
2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식량이다. 먹을 게 없어서 굶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앞으로도 3일 내내 라면만 먹어야 한다니.
"아니, 그보다 정전은 언제 복구되는 거야? 프리덤, 지금 정전 사태에 관해서 정부 알림 같은 거 없어?"
「서울 일부 지역이 현재 대규모 정전 사태입니다. 원인이 송전탑 파손인 까닭에, 현재로써 복구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뭐? 송전탑 파손?"
* * *
"그게 말이 돼? 송전탑이 어쨌다고?"
허진 차관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채 거듭 물었다.
부하 직원은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송구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강풍에 날아간 철제 구조물이 송전탑을 덮쳤습니다. 그 바람에 해당송전선의 전력 공급이 차단되었고, 다른 송전 라인에 과부하가 걸린 모양입니다."
"……."
"마침 또 다른 송전 라인도 긴급 점검을 위해 일시적으로 전력 공급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때문에 부하가 더욱 몰렸습니다."
"두 개의 부하가 한 라인에 동시에 몰렸다는 말이군."
"네, 그래서 모니터링 시스템이 자동으로 전력 공급을 차단했습니다."
허진 차관은 작게 신음했다.
"이대로는 조만간 서울 한강 이북전 지역이 정전 상태로 돌입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대통령은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
해외 순방 중이니,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미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났다.'
행정안전부 장관도 문제였다.
몇 차례나 긴급 상황이라고 보고를 올렸지만, 아직까지 재난본부에 얼굴도 비추지 않고 있으니.
그때였다.
상황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야전복 차림의 행안부 최중헌 장관이 안에 들어섰다.
"본부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서울이 정전이라고?"
"정확히는 아직까지 1/3 정도가 정전입니다."
"멀쩡한 송전탑이 왜 무너진 거야?"
"무너진 것은 아니고 철제 구조물이 덮쳐서 라인이 끊어진 겁니다."
"그럼 빨리 복구해야지. 전기 없이 어떻게 주민들이 생활을 할 수 있겠어."
세상모르는 발언에 허진 차관은 기가 막혔다가, 순간적으로 납득했다.
이 사람, 알아주는 책상머리였지.
현 대통령의 측근이라 장관 자리를 꿰찼을 뿐, 실무 행정에 관해서는 전혀 모른다.
하물며 이런 대규모 재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탑 복구는 불가능합니다. 전력을 우회해서 끌어오던가 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 언제까지 이 상태로 놔둘 순 없잖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직원 한 명이 새하얗게 질린 채 급히 들어왔다.
장관과 차관(본부장)을 두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장관을 향해 보고했다.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전력이 끊겼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중부 발전소 지대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경기도는 물론, 서울까지 들어오는 전력망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서울은 온 도시가 암흑 상태입니다."
서울은 전력자급률이 2%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 전력은 병원이나 관공서 등 필수순위 기관부터 돌아간다.
외부 전력 공급이 끊어지면 주거, 상업지역은 암흑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
최우석 노인은 옆집으로 피신해 있었다.
작년에 죽은 오랜 지기의 집이자, 지금은 하수영을 주인으로 맞이한 청담동 대저택.
피신을 하게 된 이유는 하수영의 전화 때문이었다.
-어르신, 지금 짐 싸들고 저희 집으로 오시죠.
"이 날씨에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그냥 집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해."
-지금 강북 지역이 블랙아웃으로 난리랍니다. 여기도 언제 전기 끊어 질지 몰라요. 그러니 상황 좋을 때 미리 짐 싸서 건너오세요.
"블랙아웃이 뭔가?"
-대규모 정전이요. 위험하니까 빨리 넘어오세요. 제가 모시러 갑니다.
반신반의하던 최우석은 결국 간단하게 짐을 꾸렸고, 얼마 후 하수영이 집으로 그를 데리러 왔다.
차를 통해서 주차장 사이를 이동한 덕분에 우박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최우석이 짐을 내려놓자마자, 주변 일대가 암흑으로 뒤덮였다.
"뭐야? 왜 갑자기 죄다 캄캄해졌어?"
"중부지역 발전소지대가 간단간당하다고 하더라고요. 이미 강북 지역도 맛이 간 상황에서는 치명타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죠."
"근데 자네 집은 왜 멀쩡해?"
최우석은 여전히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저택을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보았다.
"저희 집이야 자체 발전시스템을 달아서 그렇죠."
"자체 발전?"
"전력공급을 남의 손에만 마냥 맡겨두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거든요."
하수영이 짐을 챙기는 걸 보고 최우석이 물었다.
"이 날씨에 어딜 가려고? 온 사방이 난리인데."
"건물들 좀 살펴보려고요. 날씨가 이 모양이니 더 살펴야 하지 않겠어요?"
"허참, 자네처럼 지극정성인 건물주는 아마 없을 거야."
"여기 편히 계세요. 아무래도 금방 전기가 돌아올 거 같지는 않으니까요."
최우석은 하수영의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한밤중에 전기가 끊어진 집에 꼼짝없이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다.
"TV는 안 나오니까 트실 필요 없어요. 지금 방송이고 통신이고 죄다 엉망이거든요. 휴대폰도 안 터져요."
그러면서 하수영은 큼직한 폰을 하나 내밀었다.
"무슨 일 생기면 이걸로 전화하세요. 저장번호 1번으로 하시면 됩니다."
"휴대폰 안 터진다면서?"
"위성폰이라서 이건 터집니다."
"……자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친구일세."
하수영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보인 채 저택을 나섰다.
거리에는 사람이나 차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친 우박 세례가 내리고 있지만, 튼튼한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캠핑트레일러는 끄떡없었다.
"덤벼라, 우박들아. 이건 창문도 초강화유리라고."
하수영은 어둠 속에서 트레일러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저 멀리 청담동 3호기 빌딩이 보인다.
아이돌 가수 강훈으로부터 430억에 매입한, 시가 550억짜리 빌딩.
수영레스토랑 프랜차이즈 본점이 입주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온통 암흑인 다른 상가 빌딩과는 달리, 3호기는 홀로 찬란히 조명을 내뿜고 있었다.
"응, 발전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네."
장시간 전력 공급이 끊어지면 아무 래도 좋지 않다.
상가 내부의 냉장고라든지, 정화시설이라든지, 24시간 전력 공급이 필요한 설비들이 있기 때문이다.
"블랙아웃으로부터 소중한 세입자들의 자산을 지켜주는 것도 건물주의 성스러운 사명이지."
하수영은 자가발전시스템을 점검한 후, 곧바로 다른 빌딩으로 이동했다.
차례차례 이동하며, 빌딩들에 설치한 발전시스템을 점검한 후, 그는 수영라면 CF모델인 여배우 장효주가 임차한 아파트로 향했다.
전력망이 끊어진 덕분에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비상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가야 했다.
동 출입정문은 그의 얼굴을 아는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수동으로 열어 통과했다.
아파트에 도착한 그는 인터폰을 눌렀지만, 전력이 끊어진 관계로 반응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누구세요?"
잠시 후 겁에 질려 있는 장효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주인입니다.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 수영 씨?"
장효주의 목소리가 반색으로 바뀌었다.
대번에 문이 열리며,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하고 있는 장효주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아니, 그보다 지금 날씨가 지구 종말 직전이지 않아요?"
"블랙아웃 때문에 혹시나 해서 점검 왔어요. 소중한 임차인이 어둠속에서 공포에 떨게 놔둘 수는 없죠."
"네?"
"잠시만 들어갈게요."
하수영은 안에 들어간 후, 신발장옆 벽에 나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손전등에 의지해 안을 살피던 그는 손을 넣고 뭔가를 조작했고, 장효주는 의아해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후 아파트 전체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와, 어떻게 된 거예요?"
"비상발전장치를 수동으로 작동시켰어요. 원래는 정전되면 자동으로 작동해야 하는데 오류가 있었나 봐요."
"그럼 이거 해주려고 이 날씨를 뚫고 오신 거예요?"
장효주의 목소리에 묘한 기색이 깔렸다.
하수영은 손을 가볍게 탁탁 털면서 웃어 보였다.
"임차인님이 여기 안 계시면 그냥 돌아가려고 했죠. 점검차 온 겁니다. 그런데 마침 있으셨네요."
"안 오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손전등이나 촛불 같은 것도 없어서 무서웠거든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집집마다 비상발전기도 설치돼 있고 그런 거예요?"
"아뇨, 이건 제가 직접 설치한 겁니다. 단지에 비상발전기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무래도 전기 아끼려고 필수설비에만 공급하는 거 같네요."
하수영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위험하니까 섣불리 나오진 마세요. 혹시 먹을 거 없으시면 이거 드시구요."
그는 인스턴트 식료품이 담긴 큼지 막한 종이봉투를 내밀었고, 장효주는 묘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벌써 가시는 거예요?"
"점검해야 할 곳이 더 있어서요."
"……안녕히 가세요."
장효주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그를 배웅했다.
하수영은 마지막으로 휴민트타워를 찾았다.
8,000억 원에 매입한 휴민트타워는 건물 외벽에 설치된 붉은 항공장애등만 간헐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자가발전시스템을 설치하지 않은 터라, 블랙아웃 상태에서 최소한의 전력 운용만 하는 것이다.
"우리 14호기, 조금만 기다려. 우박 그치고 나면 주인님이 멋지고 튼튼한 비상 심장을 달아줄 테니까."
하수영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중얼거리고는, 휴민트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비팀장이 오너를 알아보고 얼른 다가왔다.
"안전사고 위험은 없습니까?"
"네, 현재로써는 없습니다. 우박이 내릴 때부터 이미 모든 출입문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이거 쉽게 그치지 않을 거 같으니까 근무에 조심해 주세요. 안전사고가 나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하수영은 빌딩 옥상으로 올라갔다.
H마크가 찍힌 둥근 헬기 비상착륙장에 올라선 그는, 쏟아지는 우박알갱이를 맞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몸이 날아갈 듯한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는 하늘에 대고 힘차게 외쳤다.
"머나먼 대해에서 이 좁은 반도까지 크고 수고로운 걸음을 하신, 전능하신 대자연의 위엄이시여! 위대한 고대 주신의 권능을 이어받을 예정인 후보자가 감히 귀하에게 고하노니, 이만 분노를 다스리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콰아아앙! 번쩍! 콰아앙!
"부디 청량하고 맑은 하늘을 돌려주시어, 이 하수영이로 하여금 활짝웃는 얼굴로 농업에 힘쓰게 할 수 있도록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콰아아아앙! 쏴아아아!
-아들아, 너의 신어에는 절실함이 빠져 있구나.
"아니, 여기서 얼마나 더 비굴하게 빌라고요? 저딴 눈먼 바람 따위한테요."
-아무튼 너의 절실함은 정말이지 형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