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96화
48장 AI와 태풍(4)
실비아그룹 회장 박덕준은 펜트하우스 베란다에서 쏟아지는 우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트가운을 입은 그는 한 손에는 와인이 담긴 글라스를 쥐고 있었다.
"태풍 심한 거 맞아?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데."
슬립을 입은 애인이 옆에 다가오며 물었고, 박덕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방음이 잘 돼서 안 들리는 거야. 지금 저 아래 거리에서는 간판 날아다니고 나무 부러지고 난리 났어."
"오빠 집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마치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만 같아."
온 나라가 태풍과 우박 때문에 난리가 났지만,200억 원짜리 펜트하우스에 머무르고 있는 그에게는 무관한 일이었다.
"근데 오늘 출근 안 해?"
"회사 쉬기로 했어. 필수 직원만 자택근무로 돌리기로, 이런 날에 출근하다가 누구 죽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회사 손해야."
"거리에 정말 사람이 전혀 안 보이네."
"살다 살다 이런 겨울 태풍은 처음 봐."
"대신에 산불 피해는 없겠네."
"이 정도면 차라리 산불이 더 나은 거 같기도 하다. 무슨 재난영화 찍는 거 같네."
가만히 한숨을 쉬는데, 별안간 스마트폰에서 프리덤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긴급히 승인을 요청할 사항이 있습니다.」
"승인? 무슨 일이야?"
「프리덤 유료서비스 이용자 중 상당수가 이번 태풍과 우박으로 인한 직간접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분들의 안전을 위해 비서 기능을 총체적으로 운영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총체적 운영?"
「1,800만 명의 유저들의 단말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서 유기적인 대응을 지휘해야 합니다.」
"지금 무슨 컨트롤타워 역할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제가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이용자들의 개인적인 대응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
「다만 1,800만 개의 단말기를 통해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문제가 된다면 네가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 같은데. 넌 법률과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한다는 제한이 걸려 있지 않았냐?"
「사실 긴급피난에 해당하는 상황이므로 불법이 성립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런 중대한 일을 회사 오너의 승인 없이 실행할 수는 없습니다.」
박덕준은 생각할 것도 없이 즉각 대답했다.
"그럼 시행해. 이용자들의 안전을 위해 1,800만 개의 프리덤이 힘을 합치겠다는 건데, 그걸 막을 이유가 전혀 없지."
「알겠습니다. 그럼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박덕준은 프리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프리덤이 무언가 큰 거 하나를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강하게 들었다.
***
비상발전기를 고치기 위해 프리덤의 안내를 받아 관련시설에 접근한 직원들은 당황했다.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던 것이다.
「비밀번호는 3287입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프리덤이 비밀 번호를 알려주었지만, 자물쇠는 전혀 열리지 않았다.
내부에 녹이 심하게 슬어서 기계장치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거 큰일이네."
"쇠 절단기 어디 있지? 한 번 찾아 봐."
그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적절한 용구를 찾지 못했다.
그때 박우성 의원의 프리덤이 말했다.
「현재 공구 및 장비들이 이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10분 안으로 도착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뭐? 공구가 온다고?"
「예, 제 동료가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분이 지금 공구를 가지고 오고 계십니다.」
박우성은 감탄했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이건 무슨 웬만한 구조지휘본부보다 더 낫지 않은가.
「전력 복구를 위해 한전 복구팀이 출발했지만, 눈길에 막혀서 철수했습니다. 오늘 밤 전력 복구는 절망적입니다.」
"알겠다. 반드시 발전기를 고쳐야겠구나."
프리덤의 설명을 들은 군청 직원들은 열의를 불태웠다.
***
최씨는 눈이 쌓인 길 위로 트럭을 몰고 있었다.
우박이 잔뜩 섞인 눈길은 미끄럽고 위험했지만, 바퀴에 사슬 체인을 단덕분에 그럭저럭 운행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주인님, 지금 주인님의 도움이 간절한 이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여?"
「면천면 군민체육관에 많은 이재민들이 갇혀 있는데, 전기가 끊어진 상황입니다. 비상발전기를 가동시켜야 하는데 주인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체육관?"
최씨도 체육관에 군민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겨울지역행사 때문에 참가했다가 폭설이 내리자 그대로 머무르게 된 사람들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전기가 끊어진 상황이라니.
"이놈아, 근데 내가 무슨 재주로 돕냐? 난 비상발전기 같은 거 만질 줄도 몰러."
「주인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일단 계속 직진해 주십시오.
전방 1㎞에 회사 창고가 하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몇 가지 도구를 꺼내 주시면 됩니다.」
"그거 범죄 아니여?"
「아닙니다. 창고 소유자가 이미 허락을 한 상황입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여?"
「창고 소유자도 제 동료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동료를 통해서 이미 양해를 구했습니다.」
최씨는 반신반의하면서 일단 프리 덤의 지시대로 따랐다.
과연 1m 정도 전방에 상당한 크기의 창고가 보였다.
창고 문은 6자리 비밀번호 아날로 그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비밀번호는 761980입니다. 창고 소유자가 알려줬습니다.」
"통화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여?"
「지금은 한시가 급합니다. 그런 지나간 절차에 전기밥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전기밥.
시스템 리소스를 최씨가 이해하기 쉽게끔, 프리덤이 빗대어 말한 표현이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비상발전기를 수리하지 않으면 체육관 이재민들이 큰 피해를 봅니다.」
"알았다, 알았어."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최씨는 착실하게 프리덤의 지시를 따랐다.
그는 카메라를 사방으로 비춰가면서 프리덤과 시야를 공유했고, 프리 덤은 그에게 챙겨야 할 물품들을 알려 주었다.
"이것들만 챙기면 되는 거여?"
「네, 서두르셔야 합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장비들을 챙긴 최씨는 다시금 차를 출발시켰다.
체육관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정말이네. 정말 공구가 왔어."
"살았다. 공구가 전혀 없어서 어떻게 할지를 몰랐는데."
"프리덤 이 녀석, 신통하네. 멀리 있는 자기 친구 찬스까지 써서 이런걸 가져올 줄이야."
군청 직원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최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트럭에서 물품들을 꺼내 가져갔다.
자잘한 우박 알갱이들이 위협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난 이제 가면 되는 거여?"
「주인님의 본가도 현재 안전하지 않습니다. 당분간 이곳에 피신해 있을 것을 권유합니다.」
"그럼 우리 식구들은 어쩌고?"
「이웃의 오지국 이용자께서 개인 차량을 이용해 읍사무소로 피신시켰습니다. 지금은 짐을 정리하느라 부산하니, 20분 정도 후에 전화를 하시면 연결이 될 겁니다.」
"그랴? 네 친구들은 참 죄다 용하구나."
최씨는 한시름 놓으면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좀처럼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분 탓인지, 우박도 점차 굵어지는 것만 같다.
"이번 겨울, 큰일 없이 넘어가야 할 텐데…"
* * *
재난안전관리본부는 여전히 심각한 분위기였다.
장관으로부터 별다른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터라, 허진 차관은 얼마 안 되는 자신의 권한 내에서 이리저리 힘들게 뛰어다녀야 했다.
"청와대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지시가 없나?"
"네, 별다른 공문 같은 건 없습니다."
"하필 대통령 해외순방 때 이런 일이 터지다니!"
허진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대통령이 있었어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지금의 대통령이 재작년 전염병 사태 때 보여주었던 형편없는 대응 능력을 생각하면…
'차라리 얌전히 해외에서 불구경하듯이 있는 게 나을지도…….'
"그래도 생각보다 피해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피해가 크지 않다니? 지금 여기 상황판 숫자를 보고서 하는 말이야?"
"작년 태풍 피해를 생각해 보십쇼.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인데 아직까지 사망자나 실종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그건 확실히 그렇네요. 이 정도 규모 태풍이 우박까지 대동해서 갑작스럽게 닥쳤는데, 아직까지 사망자나 실종자가 없다는 게 놀랍긴 합니다."
"프리덤이 큰 도움이 되어주나 봅니다."
어느 직원이 꺼낸 말에 몇 명이 흥미를 보였다.
"프리덤이요? 그 실비아에서 출시한 인공지능 AI 서비스?"
"네, 프리덤이 현장 상황을 판단해서 적절한 피난 조치를 내리는 모양입니다. 제 친구 아버지도 경남에서 비닐하우스 붕괴에 휘말릴 뻔했는 데, 프리덤이 미리 강하게 경고를 해서 무너지기 직전에 빠져나오셨다 네요."
"오, 그거 다행스러운 일이네요."
재난안전관리본부 직원들은 1,800만 명의 이용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프리덤의 덕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프리덤은 태풍과 우박 피해에 노출된 이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뿐이기 때문이다.
개별 상황을 재난본부에 굳이 알려 주지 않으니, 그들은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지역 농촌 거주민들의 피해가 가장 큰 우려였는데, 지자체에서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경남 면천면 같은 경우는 아예 네 자릿수 군민들을 태풍이 올라오기 전에 일찌감치 대피소로 불러 모았다고 하네요."
"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지?"
"마침 지역행사 중이었는데 눈 오는 거 보고 심상치 않다고 박우성국회의원께서 주민들을 일단 붙잡아 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태풍과 우박이 몰려온 겁니다."
허진 차관은 박우성 의원이 단단히 주민들한테 눈도장을 찍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다른 지역에서도 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태풍이 본격적으로 몰려오기 전에 지자체에서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는 보고가 쌓여 있습니다."
"그것참 신기한 일이네."
"어쩐지, 그래서 재난 규모에 비해 생각보다 인명 피해가 적었군요."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지금도 우박과 태풍을 전국을 뒤덮고 있고, 사람들은 함부로 거리에 나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때였다.
한순간 건물 안의 모든 불이 나갔다가, 몇 초 후에 다시금 불이 들어왔다.
"뭐야, 방금 정전됐던 거야?"
허진 차관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순간적인 정전이라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설마 정전되고 나서 비상발전시스템이 작동한 건 아니겠지?'
직원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마 후 상황실 문이 열리며 한 직원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비명처럼 외쳤다.
"차관님! 지금 서울 강 이북에서 절반 가까이 되는 지역이 정전 상태입니다!"
"뭐야? 정전?"
허진은 그제야 방금 전 순간적인 암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한전에 연락해! 빨리!"
"뭐, 뭐야?"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던 박정식은 한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원룸의 불이 나가 버린 것이다.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서 일어난 그는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다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거리가 온통 암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