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94화
48장 AI와 태풍(2)
"빨리빨리 행사 준비해. 시간 없어."
만천면 지역행사 책임자, 김대식 과장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행사 물품이 왜 발주량보다 훨씬 많이 도착했는지, 주문하지도 않은 품목들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확인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프리덤, 아무래도 업체들이 주문내역을 제대로 확인 못 한 거 같다. 일단 항의 메일 보내 놔."
「알겠습니다.」
김대식은 프리덤이 고의로 발주 물품을 추가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행사와는 전혀 무관한 물품들까지 섞여 있을 줄은.
물품 박스들은 군청에서 나온 직원들까지 합세해서 체육관 창고로 옮겨졌다.
"이거 기름통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한나절 행사치고는 너무 많지 않아?"
"내버려 둬. 다른 데 쓸 모양인가 보지."
그리고 다음 날.
예상보다 훨씬 많은 군민들이 참석했음에도, 지역행사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면장은 군수를 포함한 군청 관계자들 앞에서 행사 준비 미비로 망신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국회의원까지 올 줄은 몰랐네."
"원래는 안 올 예정이었는데, 참가자 숫자 보고 급히 일정 빼서 서울에서 내려온 거랍니다."
"우리 군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거의 참석했으니까. 여의도 밥 먹는 양반도 눈치 안 볼 수가 없었겠지."
체육관의 규모가 쓸데없이 컸던 덕분에, 행사는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 체육관 처음에 지을 때 너무 과도하게 예산 낭비한다고 욕 엄청 먹었었는데, 그래도 크게 짓고 나니까 이렇게 다 쓸모가 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면에 이렇게 큰 체육관을 지을 필요가 있었나요?"
"거기엔 다아 사연이 있지."
김대식은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설명했다.
"이거 체육관 지은 건설업체가 전대 군수 친척이 하는 곳이었잖아."
"그랬어요?"
"예산 뻥튀기 해서 몰아주기 한 거지, 뭐. 애초에 우리 면에 이런 큰 체육관을 지을 이유가 뭐가 있어."
"허어…… 세금 살살 녹았겠군요."
"어차피 중앙정부 지원금으로 지은 거니까. 아무튼 저번 지방선거에서 그거랑 몇 개 엮여서 공격당하는 바람에, 전대 군수가 재선 포기하고 사퇴한 거잖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건설 비리 때문에 골칫덩어리였는 데, 그래도 이렇게 한 번은 제대로 쓰이는 날이 오는구나."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 트로트 가수 공연, 나눔 행사, 도시에서 출장을 온 의료진의 무료 진료까지.
무료 진료까지 다 마치고 나자, 어느덧 저녁이 가까워졌다.
행사 책임자는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끼다가, 불현듯 생각나서 프리덤한테 질문했다.
"프리덤, 어제 물품 배송된 건 어떻게 된 거야? 업체들이 수량 잘못 보낸 게 확실해?"
「지금 상대방 프리덤과 사실관계를 확인 중입니다.」
"뭐? 상대방 프리덤?"
「상대방도 주인님처럼 '프리덤'을 통해서 일을 진행한 모양인데, 어디에서 주문 내역이 꼬였는지 지금 사실관계를 확인 중에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딨어? 네가 발주 잘못한 게 아니라면 무조건 저쪽 잘못이지."
「그래서 조사 중입니다. 확인되었습니다. 제 쪽에서 발송한 주문 정보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뭐? 네 잘못이라고?"
「일시적인 통신 장애 때문에 전송과정에서 정보가 손상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가 주문 정보를 잘못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이거 어떻게 하냐?"
「주문 취소를 시작하겠습니다. 취소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비용은 실비아그룹의 비용으로 보험처리하면 됩니다. 주인님이나 업체들은 손해 볼 게 전혀 없습니다.」
"AI도 실수라는 걸 하는구나."
「제 실수가 아니라 통신 장애로 인한 오류입니다.」
행사 책임자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잘못되더라도 실비아 측에서 책임진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전혀 쓰지도, 뜯지도 않은 것들이야. 그냥 가져가라고 하면 그만이지."
「회수 비용과 그로 인한 손실까지 실비아 측에서 부담하면 됩니다.」
"그래, 알았다. 그래도 깔끔하게 해결돼서 다행이구나."
책임자는 손을 탁탁 철면서 기지개를 켰다.
체육관 안에는 많은 군민들이 남아 있었다.
몇 시간째 무상 진료를 해주던 의료진도 이제는 피로감이 보이고 있었다.
"과장님, 지금 날씨 상황이 안 좋습니다."
그때 부하 직원이 다가와서 조심스레 말했다.
책임자는 창문 밖 하늘을 잠시 내다본 뒤 대답했다.
"눈이라도 온대? 이렇게 하늘이 맑은데?"
"남쪽에서 지금 심상찮은 게 하나 올라옵니다."
"뭔데?"
"태풍입니다."
"뭐? 아니, 지금이 1월인데 무슨 태풍이야?"
김대식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꾸했지만, 부하 직원의 표정은 진지했다.
"얼마 전에 필리핀해에서 생성된 태풍 말입니다. 그게 원래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슬금슬금 북상을 하더니 내일쯤에는 한반도가 영향권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거 큰일이네. 역시 이 행사는 취소했어야 했어. 한겨울에 무슨 지역축제야."
애초에 겉치레를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행사다.
겨울 내 심심하고 활동량 많은 소수의 군민들을 달래주고, 예산도 쓰고 할 겸 해서 마련한 행사였다.
느닷없이 노령층 군민들이 잔뜩 몰려드는 바람에 진땀을 빼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날씨까지 말썽이다.
"겨울치고 따뜻하고 맑아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에휴, 내가 속앓이하면 뭐 답이 나오냐.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
"네, 과장님."
김대식은 부하 직원을 데리고 체육관을 나서서 조용한 뒤뜰로 돌아갔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빨아들이는데, 무언가 차가운 것이 훤칠한 정수리 두피에 톡 하고 떨어졌다.
"뭐야?"
김대식과 부하 직원은 황당해서 담배를 빨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새하얀 알갱이가 하늘에서 무수히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 오네?"
"눈 옵니다."
"야, 지금 태풍이 올라온다고 그랬지?"
"네, 과장님."
"이럴 때가 아니다."
책임자는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꺼서 담배쓰레기통에 버린 뒤, 부리나케 면장을 찾았다.
다행히 면장은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다급히 말했다.
"김 과장, 군수님 지시야. 오늘 행사 참가자분들 귀가 막고 하룻밤 정도 여기 체육관에서 머물게 해."
"네? 하지만……."
"지금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귀가하다가 잘못해서 인명 피해라도 나오면 군수님 체면이 뭐가 되나. 군민들한테는 안전을 위해서 그런 거니 양해 구하고 설득해."
"일단 해보겠습니다."
다행히 군민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큰 홍수나 태풍 등 재난이 발생하면 안전한 장소로 피신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득이 쉬웠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지금 날씨가 매우 나쁩니다. 하루 정도는 이곳에서 상황을 보는 게 좋습니다. 어차피 날씨가 악화되면 내일이라도 당장 이곳으로 피신하셔야 합니다, 주인님.」
"이거 봐, 김씨. 우리 '바둑이'가 날씨 안 좋으니까 군청 말대로 여기서 하루 머무르라네. 자네도 집에 가지 말고 오늘 나랑 바둑이나 둬."
"잠깐 밖에 봤는데 눈 오는 게 장난 아니더만. 박씨 말대로 일단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
"암, 이런 날에 잘못 움직였다가는 큰 사고 난다니께."
군민들 중 프리덤을 이용하는 노인들이 프리덤에 권유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지인들에게 같이 머무를 것을 요구하니, 큰 혼란 없이 군민들을 체육관에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설득 작업이 무리 없이 이뤄지자 면장은 일단 안심했다.
하지만 한 가지 근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은 드려야 할 텐데, 이거 어떡하나……."
그 말을 듣고 한 직원이 잽싸게 말했다.
"면장님, 지금 쌀과 조리기구는 충분합니다. 장기보존식품도 상당히 있구요."
"뭐? 그런 게 왜 있어?"
"김 과장님이 주문을 해두셨어요. 정확한 재고는 저도 모르지만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김 과장, 언제 그런 준비를 다 했어? 오늘 날씨 안 좋을 거 알고 있었던 거야?"
졸지에 칭찬을 들은 김대식 과장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제 자신 있는 웃음을 보였다.
"면장님, 제가 누굽니까. 우리 만천면 토박이 중의 토박이, 김대식이 아닙니까. 군민들이 예상외로 많이 참석해 주셔서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두었습니다."
"역시 우리 김 과장이 최고라니까."
날씨는 심상치 않았다.
밤이 되자 바람이 거세지는 게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군수와 지역구 국회의원도 체육관을 떠나지 않은 채, 보좌관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거 태풍이 심상치 않은데요. 내일 상륙이라지만 오늘 밤부터 이미 영향권 안에는 들어갔답니다."
"군민들을 아까 보내지 않은 게 잘한 거 같습니다. 지역행사가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어요."
"미리 군민들이 체육관에 모여 있었던 덕분에 오늘 밤의 혼란을 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물자는 충분합니까?"
국회의원의 질문에 군수는 가슴을 팡팡 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제가 아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왔습니다. 여기 모인 군민들 며칠은 거뜬히 버틸 수 있겠던데요.
돗자리와 기름도 충분해서 밤새 난 방도 문제없습니다."
"오, 언제 그런 준비를 다 하셨습니까."
"이곳 체육관은 평소에는 각종 군청 행사로 쓰이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비상대피소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에 대비한 생존물자를 비축해 두고 있습니다."
군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서류상으로만 그렇게 되어 있을 뿐, 비축창고는 먼지 보관소가 된 지 오래라는 것이 달랐을 뿐.
프리덤의 '실수로 주문된 것은, 원래 이 체육관에 비축되어 있어야 했을 물자들이었다.
***
쨍그랑!
한밤중에 울린,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박정식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깨진 유리창을 통해서 차가운 바람에 세차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깨진 부위를 확인하러 다가간 박정식은 큰 모래알 같은 게 얼굴을 때리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우박이잖아?"
작은 우박 알갱이가 깨진 창문을 통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일단 라면 박스를 찢어서 테이프로 붙여 응급처치를 마친 뒤, 박정식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는 곧바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태풍경보발령에, 우박경보 발령이라고?"
겨울이니 우박이야 그렇다 치지만, 느닷없이 태풍이라니.
관련 기사를 검색하니, 이미 며칠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는 내용들이 나왔다.
전문가들도 낮은 확률을 뚫고 태풍이 살아남아 북상한 것에 놀라운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거 내일 출근할 때 문제나 없으면 좋겠는데."
바람에 날아온 물체가 또 창문을 깰까 두려워, 박정식은 라면 박스를 찢어서 멀쩡한 창문에까지 모두 붙였다.
잠을 설친 박정식은 다음 날 회사로부터 단체 문자를 받았다.
[서울에 통행자제 권고가 내려진 상태이니, 금일 업무는 재택으로 대체합니다.]
"나이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박정식은 창문이 깨진 것도 잊고 기뻐했다.
기쁜 감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변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