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74화
42장 위기는 곧 기회다(5)
퇴원을 한 하수영은 다시 한옥이 있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최우석이 따라붙었지만 굳이 밀어내지는 않았다.
귀가한 우형신한테는 짧게나마 톡메시지를 남겨서 자신이 무사함을 알려주었다.
밤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곳곳에 켜진 은은한 조명이 저택의 정원을 청량한 느낌으로 감싸준다.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지만, 을씨년스러운 느낌은 전혀 없다.
하수영은 한옥 앞에 서서 물끄러미 주시했다. 옆에는 최우석이 조용히 앉아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뜨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없나? 김형신이는 그런 말을 종종하곤 했었는데."
"아뇨, 그냥 한옥이구나, 집이구나, 그런 생각만 듭니다. 밤이라서 조금 춥네요."
"희한한 일이야. 기절한 걸 보면 형신이하고 완전히 똑같은데……."
"잠시 좀 둘러보겠습니다."
하수영은 한옥의 주변을 뚜벅뚜벅 걸으며, 은하신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이곳 세상에는 영기라는 게 정말 존재하나요?"
'이곳 세상에는.'
하수영은 무의식적으로 그 부분에 강조를 실었다.
-인간은 자기들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신비니 뭐니 해서 온갖 단어를 붙이기 마련이지. 영적 기운이란 것도 뭐 그렇게 해석할 수는 있겠구나.
"제가 왜 기절했던 걸까요?"
-요새 몸이 허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그러니 부지런히 엘릭서를 복용하거라. 너, 어제도 빼먹었지?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깜빡했습니다. 제가 요즘 일이 많아서 바쁜 거 아시잖아요."
-어제 일을 오늘로 미뤄서는 안된다. 그나저나 뭔가 익숙한 게 느껴지기는 하는구나.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버지가 꽂으신 잔소리 안테나에 영상 정보 송수신 기능은 없나요?"
-어허, 신성한 신어의 권능이 잔소리 안테나라니. 그 무슨 망발이냐.
신어를 통해 하수영은 멀리서도 은하신목과 자유로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부친의 말로는 아직 풍경이나 소리 같은 건 전해 받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걸 어떻게 곧이곧대로 다 믿어.'
-근데 이상하긴 하구나. 꾸준히 엘릭서를 복용했다면 지금쯤 몸이 허해서 기절하는 경우는 없어야 정상인데. 아들아, 제대로 복용한 게 맞긴 한 거니?
"물론이죠. 제가 얼마나 열심히 복용했는지는 아버지가 잘 아시잖아요."
'그걸 또 이렇게 훅 들어오시네.'
-그나저나 아까부터 뭔가 자꾸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언제는 아직 풍경 감각 같은 건 공유가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네가 부지런히 신어 권능을 가다듬어야지. 그리고 느껴진다고 했지, 보인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냥 한옥 한 채와 소나무 한 그 루예요. 전에 살던 집주인이 한옥에서 가끔 기절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미래를 봤다나 어쨌다나 그렇다네요."
-미래를 보는 것쯤이야 그리 대단 치도 않은 신적 권능 중 일부일 뿐이다. 아쉽구나. 네가 신어를 조금만 더 가다듬었으면 너의 눈을 통해 그곳을 볼 수 있을 텐데. 근데 한옥이라고?
"네, 전통 한옥인데 기와가 푸른색 이네요. 청와대를 본떠서 만들었나? 생김새도 은근 닮았네."
-잠깐, 청와대를 닮았다고?
"네, 왜 그러세요?"
-…….
"아버지?"
-중심에 있는 가장 큰 기둥을 찾아 보거라. 거기에 혹시 FG라는 푸른 글씨가 쓰여 있지 않니?
"FG? 프랜차이즈 갓의 앞글자를 딴 건가요? 근데 기둥이 여러 개라서 어느 걸 말하는지 모르겠네."
-지금 보고 있는 그거 말고 바로 오른쪽에 있는 그거 말이야! 딱 봐도 굵잖아!
"아버지, 진짜 안 보이시는 거 맞아요?"
-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무튼 빨리 뒤져보거라.
"아, 이거구나. 찾았다. 오, 진짜 FG라는 서명이 있네요? 근데 언뜻보면 알파벳이 아니라 무슨 기하학적인 무늬로 오해하게끔 써놨네."
-……역시.
은하신목이 가벼운 탄성을 흘리자 하수영이 물었다.
"짚이시는 게 있군요?"
-그 한옥, 내가 예전에 지었던 거다. 소나무 한 그루가 함께라고 했지?
"네."
-그 소나무와 한옥이 세트야. 소나무밭을 베어서 그 나무들로 그 자리에 한옥을 만들고, 마지막 남은 한 그루 소나무는 정원수로 남겨두었지. 그게 평창이었나, 경주였나? 헨갈리는구나.
"평창과 경주를 헷갈릴 수가 있나요? 서로 완전히 정반대 방향인데?"
-인석아, 이 나이가 되면 과거를 기억한다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나 저나 그 집이라면 네가 기절을 했던게 납득이 되는구나.
"어째서죠?"
-집에 배어 있는 나의 기운이 엘릭서로 강화된 너의 신체와 반응을 일으킨 거다. 보통 사람이라면 잠잘 오고 피로가 잘 풀리고 끝났을 텐데, 네 신체에는 신적 기운이 강하게 깃들어 있으니 공명 현상을 일으킨 거지.
"그럼 저는 저 집에 갈 때마다 기절하는 건가요?"
-에이, 그건 아니다. 아마 처음이라서 익숙하지 않다 보니 기절을 한 거고, 금방 적응할 거야.
"전 주인이 여기서 미래를 봤다는 건요?"
-아주 드물게 태생적으로 영적 기운을 강하게 타고 난 이들이 있어. 남들과 달리 신 후보자의 자질을 지닌 이들이지.
"신의 자질이요? 그럼 만약 일찍 아버지를 만났다면 저처럼 후보자수업을 받았을까요?"
-너의 자질이 1그램이라면, 그 전 주인은 아마 1나노그램쯤 될 거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언제는 남들과 달리 자질이 있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1나노그램이라고 해도 0은 아니지 않느냐.
"유의미한 자질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래, 1그램 정도는 되어야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사실 우주전체로 보면 1나노그램쯤의 자질을 가진 이들은 아주 넘쳐난단다. 물론 여기서 그램 어쩌고 한 것은 비유니까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예전에 만든 집이라…….'
하수영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한 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제대로 알고 나서 다시 바라보니, 뭔가 상서로운 기운마저 느껴지는거 같다.
-아들아, 여기 밀고 빌라를 올릴 거라고 했지?
"네."
-밀지 말고 그대로 둬라. 네 서울 집으로 써.
"아니, 아버지? 여기 평당 가격이 얼마인데 이걸 아깝게 저 혼자 씁니까? 고급 빌라 지어서 세놓으면 100가구는 거뜬히 받을 수 있는데요."
가구당 전용면적 대충 250제곱미터 잡고, 100가구한테서 세를 받으면 그게 다 얼마야?
-내가 보기에, 아니, 내가 느끼기에, 이 한옥하고 소나무가 여기에 오래 터를 잡으면서 완전히 적응을 했다. 여기 대지 자체가 어느 정도 영기가 깃든 토양이 된 거야. 이런 좋은 땅을 왜 철근콘크리트 덩어리로 뒤덮으려 하느냐?
"좋은 땅이라고요?"
-그래, 머무르기만 해도 심신이 맑아지고 건강해지는 성지가 된 거지. 내가 한옥을 지을 때 살짝 넣었던 기운이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강화된 것 같구나.
"그럼 한옥과 소나무는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잖아요?"
-이사가 어디 보통 일이냐. 한 번 옮길 때마다 그간 뿌리내렸던 기운이 초기화되는 법이다. 이거 다른 데로 옮기면 지금 만큼의 효능이 안나요.
"그래도 너무 아까운데……."
-여기 살던 친구가 아흔이 다 돼서 죽었다고 했지? 토양의 기운이 워낙 좋으니 그런 천수를 누린 거 아니겠니?
"……."
-그냥 이참에 네 집으로 써. 안 그래도 서울 올 때마다 그 비좁은 캠핑트레일러에 끼어서 자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는지 아니?
"그래도 좀 아까워서……."
-애비 말 안 들으면 앞으로의 수업이 고달파질 것이야.
부친이 평소보다 강경하게 나오자 하수영은 할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알았어요, 여기 안 밀고 그대로 두고 서울집으로 쓸게요. 됐죠?"
-탁월한 선택이다.
"에이, 별 필요도 없는 집을 1,800억이나 주고 샀잖아. 돈 낭비도 이런 돈 낭비가 없네, 정말."
더군다나 안 줘도 될 550억까지주고서 말이다.
하수영은 투덜거리며 한옥을 마저 둘러보고는 최우석에게 다시 돌아왔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한옥을 팔겠다는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대신 여기 집을 밀지 않고 그대로 둘게요. 어르신이 애초에 바라던 게 그거였잖아요? 벽돌 하나 안 건드리고 제가 서울집으로 쓰려고 합니다."
그 말에 최우석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하지만 그러면 자네가 너무 큰 손해를 봤잖아. 나 때문에 550억이나 더 웃돈을 주고 샀는데."
"그거야 할 수 없죠."
"가만 있자……."
최우석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내가 태준이 놈을 찾아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봄세."
"네? 아니, 그러실 것까지는……."
"애초에 나 때문에 뻥튀기된 거니까 내가 책임지고 다시 돌려놓지.
걱정 말고 나한테 맡기게."
"아무리 그래도 가능할까요? 이미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었는데 그분이 굳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수영은 은근한 기대감을 품은 채 슬쩍 물었고, 최우석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팡팡 쳤다.
"그래도 내가 그놈한테는 친 백부나 다름없어. 내가 책임지고 돌려놓을 테니 염려 말게."
"이제 와서 말을 들으실 거면 제가 1,800억 원에 사겠다고 한 걸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걱정 말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가 본 손해는 전부 바로 잡겠네."
"만약 어르신이 그 문제만 해결해 주시다면 여기 한옥은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됩니다."
그 말에 최우석은 더욱 힘이 난다는 표정을 보였다.
다음 날, 최우석은 점심이 막 지나자마자 매도인을 데리고 하수영을 찾아왔다. 매도인의 표정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보였다.
"하 사장, 지금 바로 계약서 수정하세나."
부랴부랴 우형신과 상대 중개사도 불러서 계약서를 수정하는 자리를 가졌다.
수정 내용은 바로 총거래금액이었다.
초기 액수였던 1,250억보다 200억원 많은 1,450억 원으로 수정한 것이다.
"200억 더 주는 건 계약파기 손해 배상금이라고 치고, 그건 내가 물어 주겠네."
결과적으로 하수영은 본래 액수였던 1,250억을 부담하게 되었고, 매도인은 1,450억에 팔게 되었으며, 최우석은 200억을 내는 대신 한옥자유 출입권을 얻게 되었다.
매도인은 350억이 하루아침에 깎이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큰 불만은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이 워낙 강하게 나오시는데 너무 뜻을 거스를 수도 없고, 약 파기금 180억 받고 처음부터 새로 거래하는 것보다는 200억이라도 더 받는 게 나으니까……."
"암, 태준이 네 입장에서는 그게 낫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매도인이 최우석을 진심으로 가족처럼 여기지 않았으면 이뤄질 수 없는 합의였다.
"저도 내내 조금 찝찝하긴 했습니다. 간밤에 아버지가 꿈에 나오셔서 호통을 치시면서 숙부님 말씀대로 따르라고 하셨거든요. 어찌나 생생하던지, 정말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줄 알았어요."
"뭐? 그놈이 나를 숙부라고 했어?"
최우석은 길길이 뛰었다.
숙부라는 것은 최우석이 동생이라는 의미다. 서열을 중시하는 남자로서 당연히 펄쩍 뛸 만한 일이다.
하수영은 캠핑트레일러에 있던 짐을 저택으로 옮겼다. 아직 잔금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매도인은 상관치 않았다.
"아, 활주로도 없는 집이 무슨 1,250억 원이나 해."
하수영은 결국 태어나지 못하게 된 신축 고급 빌라 대단지가 눈앞에 자꾸만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