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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갓-162화 (162/1,270)

프랜차이즈 갓 162화

39장 기꺼이 팔아야지요(3)

휴민트타워는 매각책임자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애초에 그만한 고가 빌딩이면 당사자끼리 직접 거래를 하지, 중간에 중개사를 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형신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연락처로 연락을 취했지만, 당연한 듯이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락이 잘 안 되네요."

우형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하수영을 돌아봤다.

하수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끄덕였다.

"뉴월드나 라테그룹과 한창 협상중일 테니, 잔챙이들은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겠죠."

"잔챙이라니요. 하 사장님이 어떻게 잔챙이입니까. 청담에서도 이제 크게 소문난 부동산 큰손이신데요."

일단 연락이 되어야 어떻게 이야기라도 해볼 텐데.

하지만 뉴월드와 라테 등 대기업들과 한창 협상 중인 금후그룹 측에서는, 개인 매수자한테까지 관심을 줄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10, 20층짜리 상가 빌딩도 아니고, 이런 초대형 매물을 개인 투자자가 소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문자라도 한 번 넣어 보시죠. 이쪽은 최소 7,000억 원 이상을 생각하고 있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우형신은 곧바로 정성들여 장문의 문자를 작성해서 보냈다.

하지만 문자를 보내고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장난 문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형신이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 하수영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아니, 어차피 매매 협상 진행하는 건 담당자일 텐데, 이런 좋은 조건 입질 왔는데 잘 알아보지도 않고 장난 전화겠거니 넘겨짚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사장이라면 바로 잘랐어요."

"저라도 당연히 잘랐을 겁니다."

"문자 내용이 이렇게 정중할 수가 없는데, 이게 어딜 봐서 장난으로 보인다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정말."

일단 얼굴을 만나봐야 고백을 하든 대시를 하든 할 거 아닌가.

'뉴월드나 라테에서 어지간히 좋은 조건을 내밀었나 보네. 그래서 다른 곳에는 눈을 돌릴 이유가 없던가.'

하수영의 근심이 깊어졌다.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충분한 실탄을 확보해 두었지만, 이러다가는 총 한 번 쏘아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게 생겼다.

* * *

박정선은 금후그룹 본사 사장으로, 휴민트타워의 매각 전권을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그룹의 자랑거리인 휴민트타워를 매각하게 되는 것은 눈물이 날 만큼 아까웠다.

하지만 요즘 경영 및 자금 사정이 워낙에 나빠 어쩔 수 없었다.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팔아 현금을 확보해야 했다.

항공사업마저 매각한 상황에, 수익도 별로 안 나고 비싸기만 한 청담동 대형 빌딩을 갖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매각 협상은 순탄하게 잘풀리고 있었다.

"뉴월드가 6,250억, 라테그룹이 6,860억 원을 불렀군."

"기준 시세가 5,000억 정도인데, 이 정도면 괜찮은 가격을 받은 셈입니다."

"조금 아쉬워, 아트락 타운이 팔리기 전이었으면 프리미엄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아트락타운이 팔리고 난 다음이어서 우리가 손해를 보게 됐어."

마라톤협상 끝에 최종적으로 얻어낸 최고가는 라테그룹의 6,860억원.

별 이변이 없는 한 이 가격으로 진행이 될 것이다.

오히려 아트락 부지를 매입하느라 돈을 다 쓴 뉴월드그룹에서 6,250억원까지 부른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라테가 뉴월드에서 조달 가능한 자금 한계선을 비교적 잘 짚어냈습니다. 딱 510억 원을 더 얹은 가격을 제시했군요."

"진짜 아트락 타운이 팔리기 전이었으면 8,000억 원 이상은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운이 없었습니다."

"그럼 라테그룹에 그 가격에 파는 것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박정선 사장은 안타까운 눈으로 휴민트타워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아름다운 건물이 이제 곧 금후 그룹의 품을 떠나 라테그룹의 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렵사리 부지를 매입해서 세계 최고의 건축가를 동원해 멋들어진 건물을 지었을 때만 해도, 세상을 다가진 것 같은 기분을 가졌었는데.

대기 중인 세단에 오르려고 할 때,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대형 계약을 몇 번 맺었던 JS그룹의 사장이었다. 박정선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박정선입니다. 오랜만입니다, 홍기백 사장님."

-반가워요. 그동안 별일은 없었습니까?

"별일이야 많았지요. 요즘 워낙 신문에 오르락내리락 많이 했잖습니까."

-아, 유감입니다.

박정선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동시에 홍기백 사장이 무슨 일로 연락을 한 건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뜬금없이 연락하지는 않았을 텐데.

-청담동 휴민트타워를 매각하신다면서요.

"그렇게 됐습니다. 현금이 한 푼이라도 아쉬운 처지라서요."

그제야 박정선은 상대가 왜 연락을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혹시 JS그룹에서도 흥미를 갖고 있는 겁니까?"

-휴민트타워에 흥미를 가진 분이 있어서요. 그런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돌고 돌아서 저한테까지 부탁이 왔습니다. 연결 한번 시켜달라고 말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박정선의 눈이 빛났다. 어떤 인물인지 모르지만, 매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모양이다.

"홍기백 사장님이 주선에 나설 정도라니, 대체 어떤 분인지 궁금하군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우리 그룹정유 사업에 한 발 걸친 회사 인물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정유 사업에 한 발 걸쳤다니.

그 말 한 마디에서 박정선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분이 휴민트타워에 관해서 당장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저희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매수경쟁자가 나타난다면 좋지요. 그만큼 제값을 받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럼 지금 번호를 알려드릴 테니까, 이 번호로 연락을 한 번 걸어보세요. 연락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린다고 하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상대로부터 문자가 왔다.

"아직 출발하지 말고 있어."

"네, 사장님."

박정선은 세단 뒷좌석에 앉은 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다음, 문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혹시 박정선 사장님이신가요?

"네, 제가 박정선입니다."

-반갑습니다. 하수영이라고 불러주세요.

생각보다 상대의 목소리가 너무 젊은 터라, 박정선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지만, 홍기백 사장이 허튼소리를 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JS그룹 홍기백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전화를 드린 겁니다만……."

-네, 도저히 연락이 안 돼서 제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했더니 그분이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저도 그분이랑 통화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이거든요.

"JS칼텍스와 정유 사업을 같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그쪽에 한 발 걸치긴 했는데, 어차피 제가 직접 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제가 휴민트타워에 관심이 있습니다.

"네, 그러시다고 들었습니다."

박정선은 조금씩 긴장감을 품으며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가 마침 청담에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지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까요?

시간이 다소 늦긴 했다.

하지만 매물을 비싸게 사줄 바이어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 나야 하는 법. 박정선은 곧바로 마음을 결정했다.

"어디서 뭘까요?"

즉석에서 정한 약속 장소에서 15분 정도 기다리자 낯선 청년이 나타났다.

박정선은 한눈에 그가 하수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젊은데?'

목소리만 젊은 줄 알았는데, 외모도 무척 젊다. 이 정도면 동안이라 기보다는 그냥 어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우형신 중개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하수영입니다."

"박정선입니다."

부잣집 장손인가? 박정선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차를 주문하기 무섭게 하수영이 말을 꺼냈다.

"사장님의 귀한 시간을 뺏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휴민트타워를 사고 싶은데, 얼마면 됩니까?"

"글쎄요. 지금도 워낙 이곳저곳에서 매입 의사를 많이 보이고 있어서요. 당장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바이 아웃이란 게 있을 거 아닌가요? 이 가격이면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무조건 팔겠다는. 그게 얼마죠?"

바이 아웃이라는 말에 박정선은 속으로 가벼운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이 청년은 라테그룹에서 얼마를 불렀는지는 알고 있을까?

"글쎄요, 만약 8,000억을 부르신다면 더 이상 협상의 여지 없이 이 자리에서 전권으로 결정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좋아요, 8,000억에 사겠습니다."

"예?"

순간 박정선은 황당해서 표정 관리가 풀린 채 반문했다.

8,000억은 그냥 무심코 생각난 액수를 던진 것이었다. 설마 상대가 이 가격에 살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가 단번에 받았다.

"그럼 지금 바로 계약을 할까요? 계약서는 제가 준비를 해왔습니다만."

"자, 잠깐만요!"

박정선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무심코 던진 숫자를 상대방이 냉큼 받았다. 자, 이제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거 8,000억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불러도 될 거 같은데?'

주저없이 콜을 외친 태도를 보라.

상대는 8,000억 이상을 생각했거나, 혹은 어떤 숫자가 나오든 간에 콜을 외칠 생각을 가지고 나온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8,000억에 파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조금 더 가격을 올려도 되지 않을까?

8,500억…… 아니, 9,000억은 어떻습니까?"

결국 욕심을 지우지 못한 박정선은 은근슬쩍 가격을 올리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상대의 시원스러운 태도와 어린 나이 덕분에 낼 수 있었던 욕심이었다.

하수영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

"방금 바이 아웃이 8,000억이라고 하셔서 제가 콜을 했는데, 거기서 다시 금액을 올리시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비즈니스 협상에서 이런 경우는 없을 텐데요."

박정선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서글서글한 미소로도 이렇게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저는 얼마나 됐든 휴민트타워를 사야겠다는 각오를 품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만, 사장님은 제가 오케이를 외칠 때마다 가격을 더 높여서 부르실 건가요? 그럼 제가 9,000억을 받아도 다시 가격을 올리시겠군요?"

"죄송합니다."

박정선은 순간 머리를 숙였다.

어차피 6,860억 원에 팔아야 할 매물이었다. 거기에 1, 240억이라는 행운이 추가로 붙었음에도 자신이 만족을 못 해서 과욕을 부린 것이다.

"제가 농담으로 내뱉은 말에 너무 쉽게 응하셔서 그만 과욕을 부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농담으로 8,000억을 부르셨단 말입니까"

'어휴, 저런 식이니까 그렇게 사업대차게 말아먹고 부동산까지 처분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네.'

"정말 죄송합니다. 말을 잘못한 벌로 7,900억 원, 아니, 7,800억 원에 팔겠습니다."

1분도 안 되는 말 실수로 200억이 대번에 날아가게 된 셈이다.

하수영은 마땅찮은 시선을 숨긴 채 그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그냥 200억을 깎든가, 그 와중에 또 아까워서 100억부터 부르는 것 좀 봐.'

"그냥 8,000억에 하시죠. 대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체결했으면 하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변호사를 부르고 당장 계약에 필요한 관련 서류를 구비하느라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지만, 하수영은 무사히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비록 4호기는 잠시 뺏기고 말았지만, 바로 붙어 있는 14호기는 지켜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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