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61화
39장 기꺼이 팔아야지요(2)
유명 부지나 빌딩들은 돈만으로는 살 수 없다. 시기와 행운도 함께 맞물려야 한다.
일전에 초대형 사기 사건이 터진 아트락 부지 같은 경우도 바로 그러하다. 부지 소유자가 정권의 탄압 때문에 국내 가산을 정리하고 이민을 간 경우가 아니라면, 시중에 나올 일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귀중한 매물이었기에 뉴월드그룹에서 웃돈을 얹어주고 구매한 것 아닌가. 원체 탐이 나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살 수 없을 매물이었으니까.
휴민트타워는 아트락 부지와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고층빌딩이었다.
대지면적은 아트락 부지에 비해서 좁지만, 30층이 넘는 규모와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하는 건물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 했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관 덕분에 청담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물로 알려져 있었다.
"휴민트타워 시세가 얼마죠?"
-기준 시세는 5,000억 정도 할 겁니다만, 이런 매물은 당연히 부르는 게 값이죠. 대지면적은 1만 제곱미터 정도지만, 건물 가치가 워낙 높아서요. 아트락 부지가 시세대로 안팔렸듯이 휴민트타워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뉴월드그룹에서 당연히 노리고 달려들겠죠?"
-돈만 있다면 당연히 그럴 겁니다.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데, 당연히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싶지 않겠어요? 물론 아트락부지 매입에 실패한 라테그룹도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달려들 테고요.
"두 탐욕스러운 대기업과 싸워서 살아남아야 피에 젖은 트로피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거군요."
이미 4호기(아트락 부지)를 한동안 남의 손(뉴월드 그룹)에 맡겨둬야 하는 처지가 된 하수영은 이를 갈며 결사의 각오를 다졌다.
'절대로 이번만큼은 질 수 없어.'
만약 휴민트타워를 구매하면, 녀석은 14호기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남에 손에 맡겨두고 있는 아트락 타운은 4호기.
이런 숫자의 일치라니, 이것은 무슨 운명인가?
-그리고 휴민트타워는 아트락 부지와 달리 매입하면 곧바로 영업에 활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죠. 신축이니까요. 원래는 특급 호텔로 꾸미려 했던 빌딩입니다.
지금 한창 철거 작업을 마치고 신축 공사에 들어간 아트락 부지와는 달리, 사자마자 수익을 낼 수 있는 알짜배기 건물이다.
"근데 건물주가 왜 판다는 거죠? 이것도 혹시 사기가 섞여 있는 건 아닌가요?"
하수영이 가볍게 의심을 드러내자, 우형신 중개사가 얼른 대답했다.
-휴민트타워가 금후그룹 거잖아요. 금후그룹이 경영 사정이 많이 악화되었나 봅니다. 아시겠는지 모르지만 수익 잘 나던 항공 회사도 팔았어요.
"그래요? 항공 회사를 팔아요?"
-네, 항공사도 팔아야 할 만큼 다급한 처지인데 빌딩 같은 거 쥐고 있어서 뭐합니까.
하수영은 얼른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과연 금후그룹이 항공사 매각에 전 격 협의했다는 기사를 곧바로 찾아볼 수 있었다.
'항공사까지 팔아치울 정도면 진짜 돈이 급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휴민트타워를 정말 팔려는 건가? 프리미엄을 약속하면 잘 되긴 하겠다.'
문제는 지금 수중에 50억도 남지 않았다는 것.
버섯 대금, 월세 등등 해서 매달 200억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이 들어오긴 하지만, 그거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최소 7,000억 이상은 들고 있어야 안심이야.'
기준 시세는 5,000억이라고 하지만, 희소성이 높은 데다가 재벌 그룹 두 군데에서 탐을 내고 있어, 적지 않은 프리미엄이 붙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재벌의 손에서 내 소중한 14호기를 반드시 구출해내야만 한다.'
만약 14호기를 뺏긴다면, 훗날 4호기를 되찾는다는 꿈에도 상당한 차질이 생긴다.
'그때 가서는 정말 미래 반도체 기술 같은 거라도 풀지 않으면 4호기를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질 수도 있어. 좋아, 무조건 이번에 승부 수를 띄운다.'
-사장님, 어떻게 공통투자개발을 원하신다면 제가 그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휴민트타워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큰손들이 지금 결집하고 있는 중이어서요.
"아뇨, 됐습니다. 이번에는 저 혼자 들어갑니다."
-하지만 아까 수중에 50억도 없으시다고…….
"제가 돈이 없지, 허세가 없습니까. 허세만 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하수영은 일단 전화를 끊은 뒤, 바로 정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사장님, 제가 급전이 필요합니다."
-네? 급전이요?
정서희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프라임컴퍼니, 프라임오일컴퍼니 등 알짜배기 회사에다가 수천억 상당의 빌딩까지 보유한 그가 급전이 필요하다니.
적어도 한두 푼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네, 당장 큰돈이 몹시 필요해요."
-그럼 어떻게 하죠?
정서희는 난감했다. 큰돈이 필요하다는 문제는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마케미야 대표님과 연결해 드릴까요?
"아뇨, 그분에게 더 이상의 신세를 끼칠 수는 없죠. 전 JS그룹에 손을 좀 벌릴까 생각 중이에요."
-네? JS칼텍스에 손을 벌려요?
겨우 얼마 전에 어렵게 정유 사업제휴를 맺은 파트너다.
갑자기 그들에게 손을 벌리겠다니, 정서희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가 필요한 돈을 당장 조달하려면, 아무래도 JS칼텍스 말고는 없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대체 얼마나 필요하신 건데요?
"대충 1조 원 정도? 근데 진짜 급해요. 가능하면 내일 당장 입금받았으면 하는 심정이에요."
청담동에 굵직한 매물 하나가 또 나왔나 보네요.
"네, 휴민트타워가 매물로 나왔대요. 아시죠?"
-그게 매물로 나왔어요? 세상에, 금후그룹이 요즘 엄청 재정이 안 좋긴 한가 보네요. 근데 그게 1조 원까지는 안 가지 않아요? 사오천 억원 정도 한다고 알고 있는데.
"뉴월드와 라테그룹도 뛰어들 겁니다. 청담동 부동산 큰손들도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서 달려들 거고요. 그 모두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머쥐려면 적어도 7,000억 원 이상은 있어야 해요."
-그럼 JS칼텍스에 원유 대금을 조금 당겨서 달라고 해볼까요?
"가능할까요?"
-어차피 일 년 치 원유만 팔아도 15조 원이에요. 한 달 치 대금만 미리 줄 수 있냐고 하는 거니 그리 무리한 요구는 아니죠. 이자 대신으로 그만큼 원유 대금을 더 깎아주겠다고 하면 될 거 같아요.
"부탁합니다."
JS칼텍스가 프라임오일컴퍼니를 통해 가져갈 원유는 한 달에만 1조원이 훌쩍 넘는 양이다.
그동안 정유 사업 진출을 내심 반대했지만, 이런 위급한 상황에는 한번 비벼볼 수 있는 언덕이라도 된다.
몇 시간 후, 정서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JS칼텍스와 이야기를 해봤어요. 그런데 회사 자체적으로는 그만한 여유 자금이 없다고 하네요.
"돈이 없는 겁니까, 해주기 싫은 겁니까?"
-굳이 무리해서까지 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거 같아요. 수영 사장님은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신 거잖아요.
"……."
하수영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하긴, 가난한 기름 회사한테 갑자기 1조 원 좀 줄 수 있냐고 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게 당연하겠지. 걔들이 그만한 돈을 쌓아두고 있을 틈이 어디 있어.'
겨우 연간 3억 배럴에 눈이 돌아가는 애들인데 말이다.
'아, 정녕 방법이 없는 건가. 4호기에 이어 14호기마저 이렇게 내 품에서 떠나보내야 하나…….'
-JS칼텍스가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논의하면 불가능하지만은 아닌가 봐요.
"그룹 차원에서요?"
-네, 프라임오일 지분을 5% 정도 매각하면, 원유 대금에서 1조 원을 미리 지급해 줄 수 있다고 하네요. 지분 가격은 나중에 따로 협의해서 정하고요.
회사 지분 간에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다는 의도가 담긴 제안이었다.
-하지만 전 반대예요. 프라임오일컴퍼니가 앞으로 몇 년만 더 있으면 SC이노베이션 최고의 정유회사가 될 게 뻔한데, 그 지분을 왜 넘겨줘요. 박창진 사장도 그 정도 사이가 아니라면 당장 1조 원을 만들어주는 건 불가능하다, 뭐 그런 취지로 말을 한 거니 신경 쓰지 마세…….
"팔죠."
-네?
"지분 팔자구요."
-수영 사장님? 진심이세요?
정서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대로 시간만 흐르면 국내 최대 정유회사가 될 게 뻔한 지분을 판다고?
"어차피 중요한 건 국제자원투자회사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는 원유지, 프라임오일 자체는 아니잖아요."
원유 공급은 어디까지나 하수영 본인을 위해 귀속된다. 프라임오일컴퍼니와는 무관하다.
단지 국내 유통 도구로서 프라임오일컴퍼니가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뿐이다.
"그러니 지분은 팔아도 됩니다. 막 말로 국자투가 20% 갖고 있으니 제 것은 31%까지만 남기고 다 팔아버려도 돼요. 경영권만 쥐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 그렇기야 하지만…….
정서희는 이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게나 휴민트타워가 갖고 싶은 건가요? 그렇게도 청담동 빌딩이 중요한 건가요?
'부동산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인데?'
"일단 조금만 팔아보죠. 1조 어치만 판다고 해봐요. 어떻게 나오나 한번 보죠."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쨌거나 하수영은 프라임오일컴퍼니의 주인이다.
-……알겠습니다. 이야기해 볼게요. 그래도 어떤 경우라도 경영권은 유지하실 거죠?
"물론입니다. 프라임오일에서 우리 부사장님 자리 없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혹시라도 빌딩 수집할 돈이 모자라서 정유사업을 포기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거죠.
"걱정 마세요. 내 사람 사기 꺾는 짓은 안 합니다."
***
정서희는 귀중한 지분을 매각하는 게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하수영의 결정이 워낙 확고 부동한 터라 더 이상은 반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JS칼텍스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정 부사장님. 조금 전에 통화하셨는데 이렇게 또 전화를 주셨네요.
"아까 말씀하신, 지분을 파는 조건이라면 금방 돈을 조달 가능하다는 거, 아직도 유효한가요?"
-네? 진심이십니까?
JS칼텍스 사장의 목소리가 대번에 달라졌다.
몇 가지 내역을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한 사장은 곧바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정서희는 한숨을 쉬면서 연락을 기다렸다.
JS그룹 측에서도 어지간히 몸이 달아올랐는지, 곧바로 답신이 왔다. 사장이 아니라, 일전에 제휴 사업 담판을 지었던 허재우 부회장이었다.
-정말로 프라임오일 지분을 파는 겁니까?
"네, 다른 사업 확장 때문에 급전이 필요해서요."
-원유 대금을 꼬박꼬박 챙겨도 충분히 조달할 수 있는 돈인데, 어지간히 중요한 사업인가 봅니다.
"네, 맞습니다."
정서희는 차마 '부동산 투자'라고는 말을 못 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정말 현 상황에서 지분을 매각하겠다면 1조 원 정도는 내일 당장에라도 입금해드릴 수 있습니다.
"계약을 서두를 수 있을까요? 이쪽은 정말 현금이 급해서 그렇습니다."
-좋아요, 구두 계약도 계약이니 일단 돈부터 입금하고 그럼 계약서는 날을 잡아서 작성하는 것으로 합시다.
***
충분한 실탄을 확보한 하수영은 의기양양해서 햇살부동산에 연락을 넣었다.
"휴민트타워, 제가 지금 당장 산다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