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47화
34장 인스턴트 CF(1)
"그 여자한테 소송 거셨다고요? 그날 거짓말인 거 들키고 쪽팔려서 그대로 가지 않았어요?"
박지현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하수영은 한숨을 푹 쉬면서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냥 그대로 갔으면 저도 고소라는 칼까지 꺼내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제가 알음알음 조사를 해보니까 지금 인터넷에서 우리 수영레스토랑라면 까는 분위기의 근원이 바로 그 여자더라고요. 그 여자한테서 이 모든 게 시작했어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구글링했죠. 구글신에 물어보니까 다 알려주더라고요."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블로그에 자기 사진들도 잔뜩 걸어놓고 영업하고 있던데,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죠. 사진만 없었어도 이렇게 확신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그랬구나……."
"그날 가게 CCTV 조사해 보니까 그 여자가 자기 머리카락 라면 그릇에 넣는 정황도 나왔고요, 그때 회수한 머리카락도 국과수에 의뢰해서 DNA 감정 의뢰해서 일치 결과 받았습니다."
"……."
"그날 그 여자가 썼던 라면 그릇도 함께 의뢰해서 지문하고 생체 정보도 국과수에서 조사했어요."
박지현은 그제야 하수영이 그날 왜 그 라면 그릇을 자신이 따로 챙겼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슨 살인사건 조사하는 거 같아요."
"살인미수 사건이죠. 그 여자는 지금 사람 하나 죽을 수도 있는 짓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조금이라도 멘탈이 약했거나 그 여자 공작 때문에 매출이 떨어졌어 봐요. 내가 뭐 비관하다가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놓은 채 속절없이 자기 비하만 하다가, 끝내 세상을 등질지 누가 압니까?"
"……."
"……."
직원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좀 너무 많이 나간 듯한 말이긴한데, 한편으로는 설득이 된다?
'그, 그럴듯한 논리야.'
"이게 어디 저만의 문제입니까? 여러분들도 돈과 생계 문제 때문에 제 가게에서 일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가게에 타격이 와서 여러분들이 실직을 하게 되고 여러분들만 믿고 바라보는 가족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면……."
"저는 지금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데요."
눈치 없이 어린 서빙 직원이 한마디 했다가, 세 명의 셰프한테 날카로운 눈치를 받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참고로 셰프 둘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 그리고 이택진 셰프는 곧 결혼을 앞둔 몸이다.
"아무튼, 저는 원래 걸어오는 싸움은 사양 않고 기꺼이 받아줍니다. 시간과 비용이 걸리더라도 배 이상으로 돌려주는 걸 제 인생의 얼마 안 되는 기쁨이자 낙으로 여기면서 살아요."
하수영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일일 방문자가 10만밖에 안 되는 그 판잣집 블로거는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고등법원장 출신 변호사의 전관예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말이에요."
"네? 고등법원장 출신 변호사를 쓰신 거예요?"
"수임료가 꽤 비싸더라고요. 우리 가게 수익 일주일 치는 꼬라박은 거 같아요."
"……."
직원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건 수임료가 비싼 것인가, 안 비싼 것인가.
* * *
청담동 아파트 13호기(61억짜리) 임대차 계약 잔금일이 되었다. 오늘부터 13호기는 계약 기간 동안 여배우 장효주를 세입자로 모시게 된다.
하수영은 출발 전, 13호기의 등기 부원본을 향해 대화를 나누듯이 말을 걸었다.
"13호기 네 이놈, 우리 장효주 세입자님 잘 받들어 모셔야 한다. 계약 기간 동안 아무런 불편함 없게 말이야. 알았지?"
등기부원본에 툭툭 두드리며 격려를 건네고, 하수영은 햇살부동산으로 향했다.
이정재 매니저가 나올 줄 알았는 데, 놀랍게도 장효주가 그와 함께 부동산에 나와 있었다.
대배우의 행차에 부동산 사무실은 발칵 뒤집힌 채였다. 이미 싸인을 받고 난 직원들은 한쪽 구석에서 연신 장효주를 훔쳐보느라 바빴다.
"이렇게 인연이 되네요, 광고주님."
하수영을 보자 장효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우형신 중개사는 '광고주? 그게 무슨 말이야?'라는 눈으로 하수영과장효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을 걸고 싶은데 차마 끼어들지 못해서 답답한 눈치였다.
"그러게요. 서울이 좁긴 좁네요. 우리가 이런 사이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웃돈을 주고서라도 매매하려고 했는데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의아했는데, 광고주님이라서 납득했어요. 요즘 회사가 엄청 잘나가신다고 들었어요."
"다 유능한 경영진을 둬서 그렇죠."
"어머, 직접 경영하시는 건 아닌가요?"
"네, 설립 초에만 잠깐 거들었다가 지금은 경영에서 완전히 손 떼고 제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분위기이자 이정재가 중간에 나서서 적당히 중재했다.
"대표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일단 계약부터 끝내고 따로 이동해서 커피 한 잔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저희가 대접하고 싶습니다."
"뭐, 그러죠."
하수영이 돌아보자 우형신은 얼른 계약서 등 준비 서류를 가져왔다.
월세 계약이기에 특별히 오래 걸리진 않았다. 몇 분도 되지 않아 금방 계약이 끝났다.
이정재가 하수영에게 말을 걸었다.
"이 근처에 효주 가족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두 분, 아직 식사 안 하셨나요?"
"아직이긴 합니다."
"그럼 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가실래요? 아직 오픈 준비 중이라서 널널할 겁니다."
이정재가 장효주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광고주님 원하시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어요?"
장효주는 따로 이동형 밴을 타고 왔다.
하지만 하수영의 캠핑 트레일러를 보고 두말하지 않고 이정재에게 말했다.
"오빠, 난 이거 타고 갈게. 오빠가 밴 갖고 와줘."
이정재는 하수영이 운전석에 오른걸 확인하고 작게 말했다.
"둘이 같이 타고 가겠다고? 너, 원래 이런 거 질색하잖아."
"나 이런 캠핑 트레일러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한 번 타보고 싶어졌어. 그리고 오빠도 알잖아. 하수영 광고주님 되게 클린하고 젠틀한거."
"그건 그렇지. 그럼 그렇게 해."
보통 젊은 광고주들은 장효주와 연결되면 어떻게든 식사 한 번 같이 하려고 온갖 교묘한 수작을 다 부린다.
하지만 하수영은 광고 계약을 체결한 이후, 단 한 번도 사적으로 연락을 해온 적이 없었다. 장효주는 물론이고 이정재나 회사에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
모든 업무는 반드시 회사를 통해서 진행했으니.
"어, 제 차 타고 가시게요?"
"네, 신기해서 한번 타보고 싶어졌어요. 이게 캠핑카라는 거죠? 이런건 얼마나 하나요? 한 2억?"
하수영은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피식 웃었다.
"25억 주고 샀습니다."
"……이게 25억이나 한다고요?"
"네, 프레임이 통짜로 티타늄합금이라서 가격이 나가더라고요. 원래는 10억도 안 한대요."
웬만한 슈퍼카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가격에, 장효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애마 벤틀리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가격이었으니.
"매니저님 말로는 이런 계약은 관여 안 하신다고."
"맞아요. 그런데 집주인이 광고주님이라는 말 듣고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서 나왔어요. 제가 누구 덕에 먹고사는데요."
"에이, 장효주 씨가 화장품 CF로 돈 쓸어 담고 있는 거 세상 사람 다 아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장효주는 쾌활하게 웃는 하수영을 묘한 눈으로 주시했다.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다지만, 이제 갓 스무 살 된 남자다.
그녀는 돈 좀 있다는 젊은 재벌 2세들이 자신의 앞에서 얼마나 유치해질 수 있는지를 수없이 겪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다르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초탈해 보이는 여유가 신기하다.
"황비버섯라면 덕분에 제가 라면을 먹게 됐어요. 원래 그런 건 입에도 안 댔거든요."
"몸매 유지하셔야죠. 연예인이신데."
"일주일에 3, 4개씩 먹어서 큰일이에요. 괜찮을까요? 라면에 나트륨 많아서 살찐다고 하던데."
"살찌는 건 장효주 씨죠. 라면은 잘 안 찝니다. 근데 매니저님 말로는 일주일에 1개라고 하던데요?"
"매니저 오빠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들키면 큰일 나요."
장효주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자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더라?
차내의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하고 평온했다.
"근데 뭐 사주실 거예요?"
"라면이에요. 제 레스토랑 주력 메뉴죠."
"라면이요?"
"실망하지 마세요. 진짜 맛있습니다. 이 세상 맛이 아니라고 지금 청담동에 소문이 파다해요."
자기 레스토랑이라고 해서 은근히 기대했던 장효주는 김이 살짝 새는 느낌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3호기 빌딩에 도착한 장효주의 안색이 살짝 경직되었다.
"어? 여기는……."
"아세요?"
"강훈 빌딩이잖아요. 여기 지하에 퇴폐 술집 있는데. 소문 엄청 안 좋은."
전에 있던 유흥술집 실소유주가 연예기획사장 백호열이었으니, 장효주도 들어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보니 별로 내키지 않는 거 같다.
"그 술집 있는 빌딩 잘못 드나들다가 나중에 파파라치한테 걸리면 골치 아픈데. 여기에 가게가 있으신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 가게 제가 이미 벌써 내보냈습니다. 공실 된 지 몇 달 넘었어요."
"어머, 내보냈다니요?"
"이 빌딩 제가 강훈 가수한테서 샀거든요. 전 제 빌딩에서 그런 가게 입주 용납 못 합니다."
"정말요? 신기하다."
그제야 장효주는 찜찜함을 털어버린 표정으로 하수영과 3호기 빌딩을 번갈아 봤다.
"그 술집이 연예계에서 유명한가 보죠?"
"술집보다는 실소유주가 유명하죠. 대형 기획사 사장이거든요. 자세한건 말씀 못 드리니 양해 부탁해요.
광고주님을 위해서예요."
"백호열이라는 친구하고 이미 한번 붙었다가 판정승 거뒀습니다. 그리고 술집 조용히 내보냈죠."
"한번 붙으셨다고요?"
"네, 안 나가고 장사 계속하겠다고 하기에 손맛을 좀 보여줬죠."
"……조심하세요. 백호열 사장, 소문이 아주 더럽고, 뒤가 참 든든한 사람이에요. 탑급 인지도 연예인들도 웬만하면 안 얽히려고 조심하는 편이에요."
"걱정 마세요. 제 뒤에는 더 든든한 빽이 있습니다."
캠핑 트레일러를 주차하려고 보니, 장효주는 어느새 선글라스와 모자 등으로 자연스러운 위장을 마친 상태였다.
하수영은 장효주, 시간 맞춰 도착한 매니저를 데리고 오픈 직전인 가게로 들어섰다.
분주하게 준비 중이던 박지현이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사장님. 출근하셨어요?"
"오늘 손님들한테 식사 대접한다고 잠깐 들렀어요. 라면 세 그릇 부탁합니다."
"바로 주방에 전달할게요."
아무리 얼굴 대부분을 가렸어도 여배우 본연의 포스는 어디 가지 않는 법이라, 박지현은 궁금하다는 시선으로 장효주를 힐끔거렸다.
자리에 앉은 장효주가 몹시 감탄해서 말했다.
"어쩜, 여기 수영레스토랑 맞구나.
아! 그러고 보니 본인 이름 따서 가게 이름 지으신 거네요. 수영레스토랑이 광고주님 소유인지 전혀 몰랐어요."
"우리 가게를 아시나 봐요?"
"요즘 한창 핫하잖아요. 저도 언제고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가게라고 들어서 엄두를 못 냈어요."
수영레스토랑이 가지는 분주함을 생각하면, 장효주 같은 연예인이 몰래 방문하기에는 부담스럽다. 독립된 룸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
"여기가 그렇게 유명해?"
옆에 앉은 이정재가 묻자 장효주가 호들갑처럼 말했다.
"라면 한 그릇에 35,000원인데, 엄청 맛있대. 35,000원이 아니라 70,000원은 받아야 하는 맛이라고 다들 난리도 아냐. 인지도 낮은 연예인들은 벌써 몰래 몰래들 다녀갔더라고."
"뭐? 라면 한 그릇에 35,000원이라고? 무슨 라면에 금가루라도 넣은…… 죄송합니다."
"금가루는 아니지만 금보다 귀한 식재료를 많이 넣었습니다. 드셔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수영이 낯선 손님을 데려온 것 때문에 주방과 홀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누구냐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라면 세 그릇이 조용한 홀로 나왔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보던 장효주가 문득 배시시 웃었다.
"광고주님, 제가 서비스로 지금 여기서 즉석 CF 하나 찍어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