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35화
30장 신장개업(5)
"부사장님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친구들이 정서희를 힐끔 돌아봤다. 하수영은 난처함을 띤 정서희의 눈빛에서 순간 아차 싶었다.
그는 돌연 표정을 싹 바꾼 채 태연히 말을 이었다.
"우리 가게 부사장님이셔서요. 자본금을 대셨거든요."
"아, 서희 너, 여기 가게에 돈 댔었어?"
"어쩐지, 네가 굳이 우리들 데리고 먹으러 가자고 할 때부터 뭔가 싶더라니.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알았어, 내가 여기 자주 팔아줄게. 우리 집에서도 마침 가까워서 좋네."
아무래도 정서희는 아직 친구들에게 프라임컴퍼니 경영진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고, 정서희가 살짝 미소로 답례했다.
'감사해요.'
'뭘요, 거짓말은 안 했습니다.'
자본금을 댄 것도 맞고, 부사장인 것도 맞다.
수영레스토랑이 아니라, 라면회사로 한창 핫한 신생강자 프라임컴퍼니 이야기였지만.
"근데 부사장인데도 줄 서서 들어오는 거야?"
"지금은 손님으로 온 거잖니. 당연히 줄 서야지."
"와, 그런 건 정말 칼 같구나. 정서희 성격 여전하네."
"그럼.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래, 우리 부사장님, 여기는 뭐가 가장 맛있나요? 한 번 추천해 보시죠?"
"난 이거, 송이안심구이. 이게 가장 맛있어 보여."
하수영은 정중한 미소를 띤 채 정서희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혹시 수영라면을 한 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수영라면? 혹시 이 35,000원 하는 이 라면 말씀하시는 거예요?"
당연하겠지만, 정서희를 제외한 세명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메뉴판에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메뉴가 한 가득이고, 또 손님들 대부 분이 고기나 스테이크, 찜, 해물탕등의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다.
라면을 먹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느닷없이 라면을 권하다니.
"사진이나 설명을 보면 맛있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이거 라면이잖아요?"
"우리가 라면이나 먹자고 이 먼 길을 온 건 아니잖아. 구이 스테이크먹자."
"그래, 난 송인안심 먹을래."
"에이, 내가 그거 먹으려고 했는데.
그럼 나는 여기 꽃게해물탕이나 먹을래."
"그럼 나는 황비버섯찜, 블랙 트러플 많이 뿌려주세요."
세 여자들은 저마다 메뉴를 하나씩 골랐다.
하나같이 오늘 가게에서 비싸면서도 가장 많이 나간 메뉴들이었다.
'수영라면이 얼마나 맛있는데.'
하수영은 안타까웠지만, 손님의 하늘같은 메뉴 결정에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토를 달 권리는 없었다.
그때였다.
"저희는 수영라면 네 개 주세요."
"뭐? 야, 정서희? 미쳤어?"
"무슨 여기까지 와서 라면이야. 난 송이안심구이 먹을 거야. 반박은 반박으로 받아쳐 줄게."
"네가 살 것도 아니면서 무슨 35,000원이나 하는 라면을 먹겠다고."
"우리가 살면서 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다고 이 좋은 날 좋은 가게에서 겨우 라면이나 먹어야겠니?"
친구들이 입을 모아 반발했지만, 정서희는 흔들림 없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면 네 개 주세요. 계산부터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라면 네 개 준비하겠습니다."
정서희가 계산부터 해버리자 세 친구들은 얼이 빠졌다.
"야, 정서희? 이러기가 어디 있어?"
"우리가 겨우 밀가루나 먹자고 이 먼 길을 행차한 줄 알아? 빨리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을 내놓지 못할까?"
"서희야, 탄수화물 섭취가 물론 중요하긴 해.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냐. 소고기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충분한 탄수화물을 흡수할 수 있다고."
"됐고, 다들 라면이나 먹어. 내가 맛 보증한다니까. 이 가게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라고."
"그렇게 맛있는 메뉴라면 왜 지금 테이블 위에서 단 한 개도 눈에 띄지 않는 거니? 그 이유를 육하원칙에 따라서 사이언스지 게재 기준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어? 못 하지? 못 하잖아."
"이미 계산했어. 다들 그냥 먹어."
친구들은 푸념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네 명 전부 한 미모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힐끔거리는 시선이 늘어났다.
연예인, 지망생들이 자주 출몰하는 청담동에서도 그들의 미모는 단연히 눈에 띄었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서빙 직원이 접시에 담긴 라면 네 그릇을 가져왔다.
고급 식자재가 잔뜩 들어간 라면은 한눈에 보기에도 푸짐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혀끝을 잡아당기는 듯한 풍미가 느껴지자 친구들은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이 밝은 얼굴이 돼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맛있겠는데?"
"그러게. 라면이 맛있어 봤자 얼마나 맛있겠냐고 생각한 게 좀 미안할 정도야."
"어디 한번 먹어볼까."
정서희도 피식 미소를 머금은 채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면발을 한 입 깨무는 순간.
"……!"
"마, 맛있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맛이!"
세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거의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경악이 빚어낸 침묵은 아주 잠깐이었다.
다음 순간, 세 친구들은 빨리 먹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무서운 속도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거의 면발을 흡입하듯이 빨아들이는 모습에, 다른 테이블 손님들이 식사를 하다 말고 신기해서 흘끔거리며 바라봤다.
'뭔데 저렇게 정신없이 먹는 거야? 겨우 라면이잖아?'
'근데 잘 보니 보통 라면은 아니네. 재료가 아주 푸짐하게 들어갔어.'
'저렇게 예쁜 여자들이 뭐가 좋다고 환장해가면서 먹는 거지? 나도 저거 한 번 먹어볼까? 하지만 배부른데…….'
"아, 못 참겠다. 여기요, 수영라면 하나 주세요."
"저도 수영라면 하나 주세요."
몇몇 테이블에서 라면으로 주문을 최종 결정하거나, 혹은 식사를 막 마친 뒤에 새로 추가 주문을 하기도 했다.
연예인급 미모를 가진 여자 넷이 겨우 라면 한 그릇을 가지고 걸신들 린 듯이 먹어치우니, 대체 왜 저러는지 궁금한 마음에 너도나도 주문을 한 것이다.
하수영이 그걸 보고 끄덕거렸다.
"역시 궁극의 마케팅은 미남미녀를 쓰는 거라니까. 나중에 장효주 배우도 데려와서 CF 한 번 찍어볼까? 아, 그럼 대박이긴 하겠다."
이 가게에서 장효주가 홍보 CF를 찍고 그걸 내보내면 얼마나 대박이 터질까?
"근데 그러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겨우 24석으로 장효주 몸값 감당하려면 답이 안 나오겠어."
테이블이 정신없이 풀로 돌아가는 지금은 굳이 시도할 필요가 없지만, 나중에 또 어찌 될지 모르지 않을까.
추가로 주문한 라면이 나왔다.
24명의 손님 중, 정서희 일행을 포함해서 9명이 수영라면을 먹게 된 것이다.
라면 맛을 본 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이 라면 대체 뭐야?"
"너무 맛있어! 아니, 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는 거야?"
"모르겠어. 내가 라면 외길 30년을 걸어왔지만, 이렇게 은은하면서도 깊이 있는 중독성 맛은 대체 어떻게 내는 거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MSG 쳐서 듬뿍 넣는다면 이런 맛이 날 수 있을까……."
수영라면 맛을 본 손님들은 하나같이 감동했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그저 정신없이 라면을 흡입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런 손님들의 모습은, 줄을 서서 들어오는 다른 손님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뭐지? 사람들이 다들 라면만 먹고 있는데?"
"인스타에서 여기 송이안심구이가 너무 맛있다고 해서 온 건데…… 나도 그냥 라면이나 먹어볼까?"
"엄청 맛있게 먹고 있어. 근데 라면 하나에 35,000원이면 너무 비싼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한 돈을 받을 만한 맛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어? 그러네? 그럼 한 번 속는 셈치고 먹어 봐?"
여론이란 게 무섭다.
24석의 좌석이 만들어낸 민심은 새로 들어온 손님들로 하여금 반신반의하면서도 라면을 주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첫 젓가락을 뜬 이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동일했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
"뭐야, 라면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야?"
* * *
"오늘 쓰려고 준비했던 재료는 다 떨어졌습니다. 사장님, 이제 가게 문을 닫아야 해요."
저녁 7시가 되기도 전에 이택진 셰프가 겨우 틈을 타서 그렇게 말했지만, 하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수영라면 한 그릇을 먹겠다고 먼 길을 찾아와서 줄을 서 계신 저 손님들을 보세요. 저분들한테 가서 오늘 재료가 떨어졌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라고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
"저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저에게는 손님 한 분 한 분이 모두 똑같이 소중합니다."
"하지만 재료가……."
"내일 쓰려고 준비해 둔 재료를 쓰면 되잖습니까."
"그, 그럼 내일 장사는 어떻게 합니까?"
"저는 내일 장사가 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릇의 라면이라도 더 팔겠습니다. 일단 주문은 지금 미리 넣어 두세요. 새벽에라도 재료를 받아볼수 있게. 발주만 된다면 제가 새벽에 직접 차를 몰고 가서 가져오는 한이 있더라도 재료 조달은 하겠습니다."
이택진은 하수영의 그런 완고한 뜻을 주방에 전달했고, 의외로 다른 두 셰프는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전 찬성입니다. 오픈빨 제대로 죽여주는데, 이 흐름 멱살 잡고 끌고 가야죠."
"맞습니다. 원래 오픈빨이 정말 중요하죠.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노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저어야 할 때입니다."
주방보조와 서빙 직원들은 그리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확히는 지쳐 있다고 해야 하나?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불만이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원래 서빙이나 주방보조 일은 어딜가나 힘든 법, 그런데 월 250만 원이나 주는 직장은 못 구한다.
"그래요, 해봅시다. 오늘 어디 한번 쓰러질 때까지 해봅시다."
이택진이 그렇게 결의를 불태우는 순간, 홀 매니저의 짜증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라면 10그릇 주문한 거 언제 나와요? 지금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구요."
"아, 곧 나가요! 손질해 놓은 재료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시간 걸린 겁니다!"
"빨리 라면이나 주세요. 손님들 지금 현기증 나시려고 한단 말이에요."
* * *
폭풍 같은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원래 9시에 마감이었지만,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다가 결국 새벽 1시까지 영업을 하는 기염을 토하고 말았다.
중간에 재료 손질 작업을 몇 번이나 더 했는지 모른다.
라면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팔릴 줄미처 몰랐던 게 혼란을 키운 원인 중 하나였다.
이택진이 푸념하듯이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9가지 메뉴들은 조금만 준비하고, 처음부터라면 재료 준비에만 올인하는 건데……."
"그러게 말이에요."
송이안심구이 등 다른 9가지 주메뉴들은 아직도 쓰지 못한 재료가 많이 쌓여 있었다.
반면 라면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내일 써야 할 몫까지 모두 동이 난 상태였다.
"새벽에 당장 재료 준비하지 않으면 이따가 오픈해도 라면은 재고 소진 걸어야 합니다."
재료를 준비한다고 다가 아니다.
셰프와 주방보조들이 일찍부터 밑준비 작업을 해둬야 오픈해도 무리 없이 장사할 수 있다.
"근데 오늘 매출 얼마나 나왔죠?"
김길진 셰프가 문득 던진 말에, 지쳐 있던 직원들의 눈길이 일제히 하수영에게 쏠렸다.
하수영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45,560,750원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