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28화
29장 교수님? 회장님? 왕자님? (1)
"우와, 백지수표라고요?"
하수영은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분 참 호탕하시네요. 시작부터 깔끔하게 백지수표를 제시하실 줄이야. 대체 제가 얼마를 적으실 줄 알고."
실제로 진짜 백지수표를 제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수영이 원하는 가격을 정하면, 어떤 협상이나 협의도 없이 두말하지 않고 수락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백지수표 제시는 실제 거래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
"부사장님이라면 제가 송이 농장을 팔 일이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물론이죠. 골든 트러플이 송이 농장에서 나잖아요. 제가 그 이야기는 마케미야 대표님께 말씀 안 드렸어요. 나중에는 알게 되시겠지만 그래도 입을 다무는 게 도리에 맞으니까요.
"잘하셨습니다."
-그럼 거절한다고 마케미야 대표님에게 전달하면 되겠죠??
마케미야는 프라임컴퍼니에 큰 은인이기도 하다.
정서희를 통해 100억이나 되는 돈을 출자했을 뿐만 아니라, 서해호텔만찬을 통해 세계 유명 인사들과 연결되는 인맥도 뚫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송이버섯 102억 원어 치를 한꺼번에 구입하면서, 프라임컴퍼니가 초기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도 주었다.
때문에 정서희는 송이 농장을 팔라는 마케미야의 제안을 하수영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었다. 절차를 제대로 이행한 것이다.
"그러세요. 그리고 왜 거절하냐고 물어보시면 골든 트러플 이야기도 하시면 됩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전달할게요.
마케미야의 송이농장 매각 제안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었고, 정서희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전성렬 사장님한테서 컵밥 식품출시한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네, 들었어요. 개당 2,500원으로 판다면서요. 황비버섯 80그램씩 넣어서."
-국물요리 인스턴트식품이니만큼 홍보만 잘 되면 아마 잘 팔릴 거라고 생각돼요.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주시는 황비버섯 물량으로는 많이 모자랄 것 같아서요.
"그럼 어느 정도로 생산량을 늘리면 될까요?"
-적어도 1.5배 이상은 늘려주셔야 안정적으로 컵밥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죠."
하수영은 황금비단우산버섯 농장재배지 면적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1.5배 이상이라고 했으니까 하는 김에 그냥 3배 이상으로 넉넉하게 경작지 늘려놔야겠다. 나중에 버섯수요가 그보다 더 늘어날 것 같으니까.'
-그리고 JM식품과 라면사업 말고 다른 식품 종목들도 제휴를 할까 해요.
"황비버섯을 넣은 컵밥 같은 거 말이죠?"
-네, 대신 이건 라면과 달리 종목이 겹치지 않게 해야죠. 나중에 우리가 그 종목 진출할 거 생각해서 한시적인 계약으로, 계속 갱신하는 방식으로요.
"그럼 JM 식품이 나중에 버섯 공급 끊길 거 생각해서 움츠러들지 않을까요? 라면 시장이야 아예 철수하는 것보단 나으니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다지만."
-그러니까 되게 만들어야죠.
정서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JM식품의 라면사업 주도권을 가져온 뒤로 그녀는 내적인 성장을 이뤘다.
-그리고 그 마법의 고춧가루는 정말 대량 재배가 불가능한 건가요? 황비버섯 이상으로 응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해서 좋은 캐시카우가 되어줄 것 같은데요.
"아직은 양산이 불가능합니다. 방법은 계속 연구해 보겠습니다."
-어떤 고추 품종이기에 양산기술 만드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든다는 건지 의문이네요.
"기술 개발하는 게 너무 험난해서 그래요. 견적을 내보니 최소 수십조원에서 수백조 원 이상이 들어갈 거 같더라고요."
-고추 성장에 필요한 토양이나 배양액 같은 거 조성하는 게 엄청 힘든가 보네요. 무균 실험실 같은 곳에서나 겨우 자랄 수 있는 걸까요?
"뭐, 비슷합니다. 그보다 더하죠."
무균실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무균실을 조성하는 것보다 더 고난 이도 기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종묘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고추를 빻아 가루로 만드는 것까지 해낼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현재 기술 수준에서 그 정도 돈은 들어간다.
'그보다 더 들어갈 수도 있지.'
-아까워요. 전 그 고추를 다용도 향신료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요식업을 해볼까 생각했었거든요.
"요식업이요?"
-네, 프랜차이즈 요식업 브랜드를 만들어서 외식 시장을 점령하는 거죠. 그걸 기반으로 기존에 운영하던 식당들에도 향신료를 납품하고, 또 김치 공장도 만들까 생각했었어요.
"김치 공장이라고요?"
하수영은 눈빛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고춧가루로 김치를 담근다는 발상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꼴이다.
-네, 이 고춧가루로 담근 김치가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을 했었거든요. 세계 김치 시장을 우리 프라임김치로 정복할 수만 있다면 매출이 어마어마할 텐데. 하긴, 고춧가루 양산기술부터 완성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죠?
'김치를 담근다라……….'
하수영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사람을 쓰면 비밀이 새어나가기에 사람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투입해야 한다.
버섯 채취를 전담하는 로봇들의 스펙으로는 할 수 없는 정교한 작업이다. 그 문제 때문에 고춧가루를 대량 생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작업으로 만든, 적은 물량을 활용하기에 적당한 분야가 있었다.
"고마워요, 부사장님. 지금 김치 이야기 말씀하신 것 덕분에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네? 어떤 건데요?
"나중에 제가 초대해서 직접 보여 드리죠. 그동안은 즐거움으로 남겨 두세요."
* * *
3호기, 인기 아이돌 강훈으로부터 구입한 빌딩.
현재 이 빌딩 공실은 2개였다.
하나는 홍윤주가 운영하던 지하의 유흥술집, 그리고 다른 하나는 1층카페 옆에 있는 빈 상가.
1층 빈 상가는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하수영이 연장을 하지 않고 내보내서 비어 있었다.
임차인도 마침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이 있었기에, 퇴거 절차는 갈등 없이 이뤄졌다.
하수영이 1층 상가에 새 임차인을 받지 않은 것은, 자신이 그곳에서 개업하기 위해서였다.
"자자, 사장님. 인테리어 공사 잘합니다. 나비는 전에 말씀드린 대로 넉넉하게 문제없이 챙겨드릴 테니까, 조금이라도 하자나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하하, 물론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요새 인테리어 하자 문제가 하도 많아서요."
"제가 그래도 양심은 있습니다. 인테리어 비용도 먼저 올려주셨는데 설마 서투르게 처리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튼 잘 부탁합니다."
하수영은 내부 단장이 한창인 상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공사 소리에 듣고 나온 카페 사장이 말을 걸었다.
"어머, 사장님. 여기 새 임차인 들어오는 거예요?"
"임차인은 아니고 제가 여기 상가 좀 쓰려고요."
"사장님께서요?"
"네, 소일거리로 작은 자영업이나 좀 해보려고요."
카페 사장은 다소 의아했다.
시가 500억이 넘어가는 이런 고가 빌딩에 자기가 상가를 내서 장사를 하겠다니.
보통 이런 비싼 빌딩을 가진 건물주는 임대료나 챙기면서 다른 사업을 구상하기 마련일 텐데. 아니면 골프나 치러 다니던가.
"어떤 장사 하시려고 그러세요?"
"음식 장사나 해볼까 해서요. 제 오랜 꿈이었거든요."
"음식 장사라고요?"
"네, 제 건물 일 층에서 제가 직접 기른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파는 가게를 내는 겁니다. 한 번도 달성해 보지 못한 오랜 꿈이었습니다."
하수영은 감개가 무량한 눈으로 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야 그 꿈을 하나 이루게 됐네."
"……."
카페 사장은 눈만 깜빡거리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저런 젊은 나이에 마치 은퇴를 앞 둔 노인처럼 오랜 꿈을 이루게 됐다며 감격하는 건 일단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
하지만 뜬금없이 음식 장사라니.
아무리 봐도 요리 자격증 같은 것은 없어 보이는데.
"프랜차이즈 요식업체 같은 곳에 가맹점주로 가입해서 하시려는 건가요?"
"아니요. 제 이름을 딴 저만의 고유 음식점 브랜드를 내세울 건데요."
"아, 그럼 이미 실력 좋으신 주방장을 섭외하셨군요."
"제가 직접 요리할 건데요?"
"네? 실례지만 어떤 요리 자격증이 있으신지…"
"그런 건 없어요."
"……."
카페 사장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패닉에 빠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겨우 말했다.
"그래도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시나 봐요? 직접 음식점까지 차리시려는 걸 보니……."
"야전 식량 말고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보고 들은 건 많으니까요. 어떻게든 되겠죠."
"……."
카페 사장은 더 이상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혼란하다, 혼란해.
"오, 오픈하시면 저도 자주 먹으러 갈게요."
"물론입니다. 많이 팔아주세요."
아마 한동안은 빌딩주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하겠지? 어쩌면 한동안이 아니라 이 빌딩에서 장사하는 임대 기간 내내…….
카페가 하필이면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보니, 아무래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중에는 도시락을 싸와야 하나?'
맛만 적당하다면야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하수영이 차릴 음식집의 맛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 * *
상가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하수영은 드디어 꿈 중의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부풀어 있었다.
"식사 시간만 되면, 아니, 식사 시간이 아니더라도 손님들이 오픈부터 마감까지 항상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런 음식점으로 만들어내고야 말겠어."
하수영의 마음에는 기대와 자신감이 가득 넘쳐흘렀다.
"수영밥집이 청담에서 제일가는 명물 음식점으로 거듭나게 할 거야. 근데 뭘 팔지?"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기 전에, 일단 메뉴 정도는 정해둬야 하지 않을까.
하수영은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송이와 황비버섯과 블랙 트러플을 듬뿍 넣은 라면을 한 번 팔아볼까? 근데 송이와 블랙 트러플은 향이 강렬해서 서로 섞이면 혼란과 파괴일 것 같은데."
그래도 정서희 덕분에 얻은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엘릭서 고춧가루로 담근 김치를 만들어서 무료 제공을 하면 아마 반응이 좋을 거야. 라면에도 엘릭서 고춧가루를 적당히 뿌리면 좋을 거 같고, 가만, 근데 김장은 어떻게 하지? 나 김장할 줄 모르는데."
역시 전문 요리사를 따로 고용해야겠지?
음식점 말고도 할 게 많은데, 하루종일 가게에만 붙잡혀 있을 수는 없으니.
"자리 비울 때 매장 관리할 매니저도 한 명 구해야겠네. 서빙 직원도 두 명은 있어야겠고, 요리사도 세명 정도는 있어야 휴일 로테이션 돌리기 편할 테고."
농장 시스템을 자동화해 놓으니, 역시 편하다.
아직까지 수작업으로 버섯을 길렀다면, 이렇게 느긋하게 매장 오픈을 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특별한 날에는 골든 트러플을 무상으로 조금씩 제공하는 것도 괜찮겠지. 아무튼 내가 기르는 모든 식자재가 나오는 그런 가게로 명물이 되어봐야겠어."
그렇게 꿈에 한껏 부풀어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지하크였다. 지질학자 안살린의 개인 수행비서.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왕자님께서 지금 한국에 들어오셨습니다. 골든 트러플 농장을 어서 보고 싶어하시는데, 언제쯤 답사가 가능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