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21화
27장 다 함께 건물주(2)
하수영은 서류를 작성하기 전에, 주변을 힐끔 살피며 분위기를 확인했다.
어떤 투자자는 신중한 표정으로, 어떤 투자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어떤 투자자는 가벼운 표정으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서류는 별것 없었다.
'일단 조달 자금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겠다는 거구나.'
작성해야 할 필수 인적사항은 성함과 연락처 정도였다.
투자 의사에 관해서는 제법 세세하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최대 6개월 안까지 조달 가능한 금액.
1개월 안으로 조달 가능한 금액.
출자 가능한 한계치 금액.
실질적으로 출자할 의사가 있는 금액.
현재 놀고 있는 유동 자금의 총액.
등등 다양한 시점에서 투자자의 투자 능력과 의사를 체크하고 있었다.
'보기와 달리 아주 꼼꼼하네. 나중에 부자 되겠어, 저 양반.'
무슨 계약서나 합의서도 아니고, 그저 투자 능력과 의사를 확인하는 설문지에 불과했다. 서명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때문에 하수영은 편안한 마음으로 설문지를 작성했다.
"잠시 30분 정도 쉬겠습니다."
설문지 서류를 챙긴 최동주가 휴식을 선언했고, 뜨거웠던 열의가 잠시 식었다.
투자자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서로 개인사나 근황을 묻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아트락 부지 매입에 관한 논의였다.
"그게 진짜였군요. 고 회장이 지금 정권에 단단히 찍혔다고 하던 게."
"이미 금융자산 같은 건 전부 싹 처리했어요. 지금 고 회장 가족도 한국에 없고, 아트락 부지도 대리인이 처분하고 있대요."
"대체 탈세한 게 얼마이기에 그래요?"
"듣기로는 총 누적액이 1조가 넘는다는데."
"와, 어마어마하군요. 나라도 그 세금 다 내라고 하면 싫겠다. 이놈의 나라는 도대체 왜 이렇게 부자들을 못 살게 해서 안달인 건지."
"그렇다니까요. 이렇게 많이 뜯어가는데 누가 이런 나라에서 사업하고 싶겠어. 물론 탈세는 나쁘지만, 고 회장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나는."
"탈세가 전부는 아니고, 전 정권에서 크게 기반 사업 한 거 있잖아요? 수도권 그린벨트 개발."
"아, 그거 유명했죠."
"고 회장이 거기에도 크게 투자해서 몇조 원 이상 남겨 먹은 모양입니다. 지금 정권이 그거 본격적으로 털기 전에 고 회장이 먼저 발 빼는 거라는 말도 있던데."
"그래요?"
"뭐, 카더라입니다. 여의도 일하는 친구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근데 전 정권이나 지금 정권이나 같은 당 아닌가. 굳이 그렇게 털 필요는 없을 텐데."
"계파가 다르죠. 그리고 전 대통령이 너무 많이 해 처먹어서 지금 대통령이 크게 빡쳤다는 말도 있어요. 자기가 해 처먹을 게 너무 줄어들었으니까."
보아하니 하수영을 제외하고, 다들 일정 이상의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지만 하수영은 심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주워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제일 젊네.'
투자자들은 최소 40대 후반 이상이었다. 30대는커녕, 40대 초중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수영은 그중에서 유달리 눈에 튀었다.
어떤 이들은 신기한 듯이 하수영을 흘끔거리기도 했다.
"여기 젊으신 사장님은 누구 소개로 오셨나. 아까 보니 최 사장하고 친한 거 같던데, 내가 최 사장한테 한 번도 이야기를 못 들었어요."
넉넉한 인상의 50대 남자가 하수영 옆에 슬쩍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적당히 부담을 덜어주는 정도의 반공대 화법. 상당한 사교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우형신 사장님 소개로 왔습니다. 그분하고 몇 번 거래를 했었거든요."
"아, 우 사장 소개였구먼. 난 조일원이라고 해요. 우리 젊은 사장님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
"하수영입니다."
"여기 초청받을 정도면 우리 하 사장님도 현금이 제법 짱짱하다는 말일 텐데, 젊은 나이에 대단해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
"스무 살입니다."
그 말에는 조일원도 살짝 충격을 받았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맙소사. 동안일 거라고 생각했는 데, 그게 아니라니……."
"저기요?"
"그냥 제 나이로 보였던 거였어."
이거 뭔가 살짝 기분이 묘한데?
"그 젊은 나이에 이런 큰 투자에 참여할 만한 돈이 있다니, 정말 대단해요. 내가 하 사장님 나이 때는 밥도 제대로 못 빌어먹고 다녔는데."
"농사를 좀 짓고 있어요. 물려받은 재산도 있고요."
"역시 알부자였구먼. 근데 농사짓는 상은 아닌 거 같은데. 세련된 도시 청년 느낌이야."
"어르신은 이번에 얼마나 출자하실 생각이십니까?"
"난 여유 자금이 없어서 300억 정도만. 우리 하 사장님은 얼마나 출자하실 생각이신가?"
"마음 같아서는 혼자 다 투자해서 혼자 다 먹고 싶죠."
"하하, 그거야 여기 모인 사람들 전부 같은 마음일 거요. 그럴 돈이 없어서 문제지."
"저도 근데 여유가 많지 않아서…… 한 1,000억 정도 출자할까 생각 중입니다."
"1,000억이라고?"
그 말에 조일원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흥미롭게 듣던 몇몇 주변인들의 안색도 대번에 경직되었다.
"농담이 너무 지나치……."
"돈 가지고는 농담 안 합니다. 초보도 아니고요."
"……."
하수영이 웃으면서 말을 자르자 조일원의 안색이 더욱 굳어져 갔다.
불쾌함이 아니라 신중함이다.
"정말 천억이 있는 거요?"
"그보다 좀 더 있습니다. 하지만 쓸 데가 있어서 이번 투자에는 천억정도만 내놔야 할 거 같아요."
"보기보다 아주 큰 부자였구먼. 이거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제일 큰 부자일지도 모르겠어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농사로 그렇게 큰돈을 벌었으면 진작 소문이 났을 텐데, 내가 왜 못들었을까."
"농사는 취미로 하는 거고, 사실은 물려받은 게 훨씬 큽니다."
"오, 역시."
거짓말은 안 했다.
물려받은 유산으로 농사를 지어서 지금의 통장 잔고를 만든 것이니까.
주변에서 쏟아지는 관심이 느껴진다.
하수영은 조일원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 시간을 보냈다.
"아, 그 아이돌 가수 거라는 빌딩이 나갔다고 들어서 누군가 했는데, 그게 우리 하 사장이었구먼."
"조 사장님도 우리 3호기에 관심이 있으셨나 봐요."
"3호기?"
"애칭이에요. 3번째로 들인 아이라서 제가 임의로 3호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거 어감 좋은데? 맞아요. 나도 그 매물에 관심이 있었어. 근데 조건을 맞추기 어려워서 계약을 미루고 있었지."
"기억납니다. 계약하고 2주 안에 잔금 치러달라는 조건이었죠."
"도장 찍고 2주 안에 잔금 마련 못 하면 계약금만 날리는 거잖아. 그래서 돈 좀 마련되면 계약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리 하 사장이 홀라당 낚아챈 거지."
조일원은 그때 일이 아직도 아쉬운지 혀를 찼다.
"그게 절대로 430억에 나올 매물이 아닌데, 550억 이상은 받아도 되는 매물인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워. 이래서 사람은 항상 현찰을 쥐고 있어야 해. 언제 어떤 매물이 갑자기 툭 튀어나올지 모른단 말이야."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도 웬만해서는 현금으로 쥐고 있으려고 하죠."
역시 돈이 권력이다.
하수영이 시세 550억 강훈 빌딩의 새 주인이라는 게 알려지자 투자자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하수영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뻘 이상 되는 사람들 속에서 위축되지 않은 채 대화를 주도했다.
조일원이 껄껄 웃었다.
"우리 하 사장, 아주 크게 될 사람이야. 아니, 이미 큰 사람이군.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정말 자식 농사는 제대로 지으셨어."
"어머니는 기억이 안 나고,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셨죠."
어느덧 휴식 시간이 끝나고, 최동주가 집계한 자료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투자자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단상에 집중했다.
가벼운 헛기침을 흘리고, 최동주가 강연을 시작했다.
"설문 조사 결과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여기 모이신 우리 투자자분들께서는 한 달 안으로 총 1조 350억 원까지 조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벼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투자자들은 미소를 띤 채 설문 결과에 만족스러워했다.
안정권은 아니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높은 투자금이었다.
"어디까지나 투자 견적을 낸 것이 니만큼, 일일이 금액 내역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설문지에 밝히 신 투자 의향이나 상황이 변경될 경우에는 반드시 저에게 미리 연락을 해서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 전체적인 상황을 조율할 수 있습니다."
그거야 당연하다는 듯이 다들 끄덕였다.
"아트락 부지는 뭘 세워도 잘 될 겁니다. 복합쇼핑몰, 호텔, 고급샵등등 다양한 컨셉을 집어넣을 수 있죠. 여의도 파크원 같은 복합마천루단지를 세우는 것도 고려를……."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었다.
'저 양반도 말이 은근히 많네.'
하수영의 입장에서는 다소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다른 투자자들은 눈을 반짝이면서 강연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연이 끝났다.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투자자들은 누구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분위기였다.
'나만 지루했나 보네.'
최동주는 충분히 짧게 줄여 말할 수 있는 내용도 너무 자세하게, 그리고 거창하게 말했다.
'뭐, 이해력 달리거나 망설이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투자자들이 귀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형신 중개사도 하수영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우리도 돌아가실까요?"
"그러죠."
"잠깐만요, 하 사장님!"
그때 최동주가 하수영을 부르며 얼른 다가왔다. 우형신이 의아해서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최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내가 하 사장님하고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우 사장 자네 먼저 돌아가면 안 되겠나?"
"할 이야기요?"
우형신이 의아해서 바라보자 하수영이 말을 자르고 나섰다.
"그래도 제가 우형신 사장님 소개로 왔는데, 이분만 빼놓고 이야기하는 건 아닌 거 같네요. 셋이 같이 이야기하죠."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시는 거 같군요."
"설문지에 따로 적은 멘트 때문 아닌가요? 제 투자 의향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셋이 이야기를 해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최동주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앉기를 권했다.
다른 투자자들은 이미 모두 사무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커피를 새로 가져온 최동주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한 달 안에 500억, 석 달 안에는 최대 1,000억까지 출자 가능하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그리고 별도 조건을 하나 더 달았죠."
"네, 그거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하자고 붙잡은 겁니다."
우형신은 궁금증을 잔뜩 품은 채 귀담아들었다. 하수영이 따로 적었다는 멘트가 뭘까?
"법인 설립 시에는 투자 참여를 보류하다가, 토지 매입 후 즉시 5,000억으로 한 번에 투자 참여하시겠다는 게 정말이십니까?"
"오, 오천억이라고요?"
우형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