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17화
26장 환전은 정수리에서(1)
이사업체 직원들이 지하 1층에서 한창 짐을 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드로 추정되는 덩치 좋은 남자들도 함께 힘을 보태고 있었다.
대형 트럭이 몇 대나 줄을 지어서 대기하고 있는 걸 보면, 작정하고 나가려는 모양이다.
"이렇게 쉽게 나갈 것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어제 내가 너무 무섭게 대했나?"
하수영은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면 혹시 아예 인테리어 싹 하고 눌러앉겠다고 오기 부리는 건 아니겠지?"
가까이 다가가서 슬쩍 가드들의 대화를 들어볼까 생각했지만, 곧바로 접었다.
가드들 중에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가 있을 테니까. 들키기라도 하면 괜한 망신이다.
하수영은 먼발치에서 짐을 빼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말 아예 나가려는 거라면 괜히 건물에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니까 두 눈 부릅뜨고 잘 봐야지."
소중한 내 빌딩,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나.
하수영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짐을 빼는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정말 나가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인테리어 리빌딩을 하려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으니.
마침내 짐이 전부 빠지고, 더 이상 지하를 드나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수영은 점검을 위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입구는 전자식 잠금장치로 잠겨 있었다.
"열쇠 업체 불러서 따면 되기야 하지만…… 아직 계약기간이 남았으니 내가 들어가면 불법 침입이군."
아무리 건물주라고 해도 임대를 해준 상가에 임차인 허락 없이 문을 뜯고 들어가면 불법 침입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 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홍윤주였다.
「저 B101호 임차인이에요.」
"네, 건물주입니다."
「오늘 가게 다 뺐습니다. 계약 정리하죠. 보증금 바로 줄 수 있죠?」
"벌써요?"
「한 달 안에 정리해서 나가라고 윽박지른 건 기억 못 하시나 봐요. 바로 어제 일인데.」
"윽박은 홍윤주 씨 남자친구가 먼저 질렀고."
「남자친구 아니라 남편이에요.」
자존심에 상처가 났는지, 목소리가 살짝 살벌하다.
백호열이 따로 정식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자신은 세컨드에 불과하니, 아마 자격지심이 있는 것이리라.
"아, 미안합니다. 결혼반지 없으셔서 남자친구인 줄 알았어요."
「…보증금 언제 줄 수 있죠?」
"언제든지요. 아예 지금 만나서 계약 정리할까요? 대리인 보내셔도 상관없는데, 위임장만 잘 챙겨주세요."
「내가 직접 가죠.」
"그러십시오. 저 지금 건물에 와 있습니다."
「10분 안으로 갈게요.」
하수영은 승계 받은 임대차 계약서에 적혀 있던 홍윤주의 주소를 떠올렸다. 아마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세요. 관리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홍윤주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하수영은 1층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다. 얼마 전 안면을 튼 관리소장이 허리를 깍듯하게 숙여 인사했다.
"아이고,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지하 1층 임차인하고 계약 정리해야 돼서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겠습니다."
"아, 얼마든지 볼일 보십시오."
하수영은 스마트폰을 포탈 부동산사이트를 들어가서 청담동 매물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홍윤주가 도착했다.
치렁치렁한 블랙 롱원피스에 숄을 걸친 모습은 부잣집 사모님을 연상케 했다. 조그마한 붉은 클러치를 한 손에 들고, 적당한 굽의 힐을 신고 있었다.
밝은 공간에서 보니 살짝 퇴폐적이던 분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게에서 봤을 때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느낌을 준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유흥술집 마담이라고 생각할까.
하수영은 그녀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는 걸 확인했다.
결혼반지 같은 건 아닐 테고, 아마 가지고 있는 반지 중에서 적당한 걸 착용한 모양이다.
'남자친구라고 한 게 마음 상했나 보네.'
"그럼 바로 계약해지서를 작성할까요?"
"그래요."
하수영은 서류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계약해지서를 2부 꺼내서 간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계약해 지서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눈을 들었다.
"이미 제 인적사항까지 전부 다 작성돼 있네요."
"네, 서명날인만 하시면 됩니다. 제건 이미 했어요."
"10분 안에 준비한 건 아닐 테고, 항상 갖고 다니나 봐요? 준비성 한번 철저하네."
"전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남자거든요."
"그렇게나 우리 가게를 내보내고 싶었나 보군요. 술집을 싫어하세요?"
"그냥 개인적인 기호죠."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윤주는 볼펜을 들어 임차인 이름에 서명을 했다. 클러치에서 인감을 꺼내 그 옆에 찍었다. 계약서 2부를 나란히 놓고 각각 절반씩 찍혀 나오게끔 인감을 찍었다.
"보증금은요?"
"지금 바로 쏴드리죠."
하수영은 모바일뱅킹에 접속해서 보증금 5억 원을 이체했다.
입금 알림이 울리자 홍윤주는 내용을 확인한 뒤 무뚝뚝하게 하수영을 응시했다.
"월세는 일할 계산해서 입금해드려요?"
"괜찮습니다. 이사 비용 챙겨드리는 거라 생각하세요. 그나저나 어제 말했는데 오늘 바로 가게를 빼실 줄은 전혀 몰랐네요. 전 좀 더 오래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장님 입장에서는 좋은 일 아닌가요? 원하던 바가 금방 이뤄졌잖아요."
"좋은 일이긴 한데, 뒤늦게 생각해 보니까 조금 아쉽기도 해서요. 남자 친구, 아니 남편 되는 분하고 어울리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거든요. 한동안 통 그런 경험이 없어서 더 신이 났던 것도 있고요."
홍윤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풀썩웃을 뻔했다.
이 청년, 지금 무슨 어이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 빽이 보통이 아닌가 보네.'
그러니 백호열도 반격을 하기 전 자신에게 가게를 빼라고 요구한 것 이리라. 가게를 인질로 잡혀둔 채 공세에 나설 수는 없을 테니까.
"입구 비밀번호는 여기 적어둘게요. 비상키는 잃어버려서 없어요."
"어차피 잠금장치 교환할 겁니다. 꽤 낡았더라고요."
"이것으로 우리 임대차 계약은 이제 완전히 끝인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더 할 말 없겠군요."
홍윤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몸을 일으키는 사소한 동작하나에서도 남자의 눈길을 잡아끄는 마력이 흐른다. 젊었을 적에는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문을 열기 전, 그녀가 우뚝 멈칫한 채 말했다.
"그 술에 타는 향신료는 아쉽네요. 우리 가게에 꼭 들이고 싶었는데."
"기념으로 작은 거 한 병 드릴 순있습니다."
홍윤주는 빤히 바라보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남편은 자존심이 아주 강해요. 한 번 물면 절대 놓지도 않고요."
"알아요. 제가 사람을 한두 번 본게 아니라서."
"겁이 전혀 안 나시나 보네요?"
"멘트 주의하세요. 이런 것도 협박이 될 수 있어요."
"……."
"계약 잘 정리했는데 우리 마지막은 서로 깔끔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겨두죠."
"글쎄, 이게 정말 마지막일까요?"
"마지막이어야죠. 그래야 백호열씨가 삽니다. 아니면 저만 즐기다가 끝나요."
"……진짜 종잡을 수가 없네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제 생각이요? 잠깐이라도 들여다보면 아마 미쳐 버릴 수도 있어요."
하수영은 작게 키득거렸고, 홍윤주는 더욱 어이가 없어서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 남편 되시는 분한테 이 말은 전해주세요."
"들어보고 결정하죠."
"어제 했던 말은 조롱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요. 제 말에 진정성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저 역시 쪽팔림 무릅쓰고 한 말이라고 전해줘요."
"그걸 믿을 거 같나요?"
"안 믿으면 할 수 없고요."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고, 홍윤주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이상 말없이 관리사무실을 나갔다.
'들어오는 건 기꺼이 반겨주겠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해. 그러니 처신 잘해라.'
어쨌든 피곤한 임차인을 어렵게 계우 내보냈고, 깔끔하게 일단락을 지었다.
아마 백호열과의 관계는 이게 끝이 아니라 막 서막을 올린 셈이지만, 하수영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런 연습용 쪼렙 몹하고 겸상을 할 사람은 아니지."
살짝 떨어진 곳에서 긴장해서 구경하던 관리소장이 요란을 떨었다.
"저 사람이 지하 술집 주인이죠?
와,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인데 장난 아니게 미인이네요.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그런 큰 술집을 운영하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저래 봬도 마흔이 넘었어요."
"저, 정말입니까? 아니, 아무리 봐도 서른 초반 밑으로 보이던데요. 화장하고 옷만 잘 꾸미면 이십대 후 반으로도 봐줄 수 있을 것 같던데요. 어떻게 저리 고울 수 있습니까?"
"껍데기만 고운 거죠. 뭐, 껍데기도 못난 것보다는 낫겠지만요."
하수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리사무실을 나선 그는 곧바로 부동산 중개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하수영입니다."
「아, 하수영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그 술집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요.」
"오늘 가게 뺐어요. 보증금도 돌려 줬고, 깔끔하게 계약 종료했습니다."
「오, 이렇게 빨리요? 전 솔직히 버팅기고 안 나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강남 밤문화 큰손이라는 공동사장하고 같이 어제 만나서 남자끼리 마음을 터놓고 합의를 봤죠.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더라고요. 호탕하던데요?"
「이야, 다행입니다. 역시 사람은 말만 들어서는 몰라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 안다니까요.」
중개사는 자세한 상황도 모른 채 맞장구를 쳤고, 하수영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지하상가 내놓으려고요."
「아, 내놓으시게요?」
중개사는 기대에 찬 음성으로 반문했다.
이미 하수영에게 청담동 빌딩 매매계약을 2건이나 중개했는데, 그가 자신에게 상가 임대까지 맡겨주고 있다. 앞으로 꾸준히 이어갈 큰손이 하나 생긴 것이다.
"네. 임차인 선정하는 제 원칙 아시죠? 유흥술집 같은 건 안 됩니다."
「그럼요. 잘 알죠. 제가 아주 좋은 임차인으로 구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하를 통으로 임대하실 거예요?」
"일단 통으로 내놓고, 정 안 구해 진다 싶으면 구조변경 다시 해서 나눠서 받아야죠. 한 번 알아나 봐주세요."
「네, 잘 찾아보면 지하를 통으로 쓰려는 임차인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라식전문병원 같은 게 들어서면 딱인데 말이죠. 빌딩 이미지에도 좋고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빌딩에 라식전문병원은 없군요."
「강남 건물이면 라식전문병원이나 성형외과 하나 정도는 필수로 들어서야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쪽 위주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하수영은 빌딩을 나서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캠핑트레일러에 시동을 켠 그는 차를 천천히 빼서 대로로 몰고 나왔다.
서울 시내, 그것도 강남에서는 오히려 슈퍼카보다 더 눈에 띄고 좀처럼 보기 쉽지 않은 차량.
주변에 지나가는 차량 탑승자들이 이따금씩 신기해서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스포츠카로 자부심 갖는 애들이 참 많구나. 너도 나도 스포츠카 타고 다니면 그게 뭐가 특별해. 쯧쯧……."
대형캠핑트레일러가 좋은 점은, 화물차에 차체가 깔릴 염려가 없다는 점이다. 도로에서 이보다 더 안전한 '개인용 차량'이 어디 있겠는가.
"임차인 정리도 끝났으니, 이제 3호기는 매일 찾아올 필요는 없겠네."
서락읍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남을 빠져 나가던 중, 정서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 부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사장님, 그 고춧가루 말인데요. 양산 계획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