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14화
25장 내 임차인에게만 따뜻한 청담동 건물주(1)
-아들아, 수련은 잘 되어 가느냐?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허공에 대고 혼자 실컷 떠들었네요. 이거 신어 능력 제대로 주신 거 맞아요?"
-신어의 권능은 문제없이 전달되었다. 부족한 것은 너의 정신적 소양이야.
"이상하네요. 제가 정신력 소양이 부족할 리가 없는데. 제 절친 서폿티모 데리고도 팀을 승리로 하드캐리 한 적도 무수히 많단 말입니다."
지금까지 은하신목으로부터 받은 유산은 두 가지.
하나는 엘릭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어.
신어는 한계가 없는 주신의 절대 고유 권한이다.
그저 말을 읊음으로써 그 어떤 기적도 일으킬 수 있는 권능.
하지만 지금 하수영은 풀잎을 흔드는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아버지의 잔소리를 수신하는 안테나 용도로만 권능이 발동되고 있었다.
"아버지, 신어 권능 주실 때 혹시 수신 기능만 넣으시고 발신 기능은 빠뜨리신 건 아니겠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그저 너의 수양이 부족한 것을 이 애비의 실수 탓을 하다니. 쯧쯧…….
"아무리 연습을 해도 안 되니까 그렇죠. 갓 바디는 몰라도 갓 피쉬는 엄청 유용할 것 같은데. 아, 또 갓 피쉬란다. 갓 랭귀지, 갓 랭귀지."
처음 신어를 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들만 먹을 수 있는 엄청 맛있는 물고기를 기대했었다.
그때 느낀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나 보다. 저도 모르게 '갓 피쉬' 라고 말을 해버린 걸 보면.
"지구에서 저보다 멘탈 튼튼한 사람이 어딨다고. 제가 안 되면 지구인 아무도 안 되는 거라고요."
-너무 오만하구나.
"언제는 10조 분의 1의 확률을 가진 천재적인 후계자 후보라면서요?"
-아, 그랬지. 내가 요새 나이가 있다 보니 자꾸 깜빡하는구나.
"대체 왜 안 되는 걸까. 바위야, 갈라져 줄래?"
쩍.
말을 하기 무섭게 저 앞에 있던 바위 표면이 저절로 갈라졌다. 하수영이 무심코 시선을 던졌던 바로 그 바위였다.
"어머나 세상에."
하수영은 놀라서 그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수없이 많은 전생을 통해 무감각해진, 아니, 단련된 영혼을 가진 자신이다.
웬만한 일로는 감정의 동요를 겪지 않는 그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아버지, 바위가 갈라졌어요!"
-이 느리고 느린 놈 같으니. 이제야 신어의 권능이 네 안에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거 같구나.
"아싸!"
하수영은 신이 나서 얼른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바위는 갈라지긴 했지만 완전히 쪼개진 것은 아니었다.
"에이, 이게 뭐야. 시시하게."
바위는 세로로 10센티 이상 갈라져 있지만, 그 깊이는 3센티도 채 되지 않았다.
-실망하지 말거라. 아직 권능이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갓 바디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 정도일 뿐인 거야.
"이 정도 흠집은 그냥 제가 커터칼로 그어도 나겠네요. 신어도 별거없네."
하수영은 실망해서 중얼거리다가 다시 한번 말했다.
"바위야, 갈라져라."
…….
"바위야. 갈라져."
…….
"바위야? 갈라지라니까? 왜 안 갈라져? 어서 갈라져서 두 동강이 나보라고!"
바위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하수영은 더욱 당황해서 은하신목에게 물었다.
"아버지, 얘 멀쩡한데요? 신어가 원래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다거나 뭐 그런 건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물론 신력이 충만하지 않아서 전부 소모하면 다시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그 정도로 소모되려면 네가 그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도 없다.
"그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아무리 갈라지라고 해봐도 말을 들어 처먹질 않아요."
-아까 신어로 명령했을 때하고 지금하고 혹시 다른 차이점이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내가 이 먼 곳에서 작은 나무에 갇혀 있다 보니 방금 무슨 상황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구나.
"차이점이라뇨, 그런 건 없는데. 아까하고 똑같이 명령을…… 응, 명령?"
하수영은 잠시 생각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자신이 뭐라고 했더라?
"……혹시 그건가?"
-뭘 말하는 거냐?
"아버지,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세요?"
-그야 기억하지. 네가 나와 의식을 연결해서 대화하던 중에 명령하지 않았느냐. 잠깐, 명령?
아마 둘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서로 깨달았다는 눈으로 마주 보지 않았을까. 아. 물론, 은하신목은 눈동자가 없다.
하수영은 멍하니 바위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위야, 갈라져 줄래?"
쩍.
"바위야, 한 번 더 갈라져 줄래?"
쩍.
두 번 다 정확하게 바위가 반응했다. 아까와 거의 흡사한 만큼의 틈이 새로이 생겨난 것이다.
-아들아, 어떻게 됐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구나. 빨리 대답해다오. 현기증 날 것 같단 말이다.
"바위가 갈라졌어요. 아까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틈이 생겨났어요."
-헐, 설마 정말 그럴 줄이야. 내가 프랜차이즈 갓 생활을 영겁에 가까이 누려왔지만, 신어 발동에 이런 식의 제한 조건이 붙는 것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해야 신어가 발동하다니.
뭐 이런 웃긴 제한이 다 있단 말인가.
"……아버지.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설마 이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하고 신께 간절히 빌고 있어요."
-그 간절함이 들리지 않는 걸 봐선 아무래도 거짓말인 듯하구나.
하수영은 한참 동안 바위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위야, 제발 갈라져 줄 수 있겠니?"
쩌적.
"바위야, 정중히 부탁하건대 제발 갈라져 줄 수 있겠니?"
쩌저적.
-아들아, 어떻게 된 거냐? 빨리 말해다오!
"……부탁 말투를 좀 더 부드럽게 해봤어요. 그러니까 바위가 더 많이 갈라지네요."
-그, 그래? 설마 그럼 조금 전에 네가 했다는 생각이…….
"네, 이런 건 아니길 빌었어요. 근데 이런 거였네요. 하하……."
하수영은 바람 빠진 듯 힘없는 웃음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눈빛을 차갑게 다잡았다.
바위를 부술 듯이 노려보던 그는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모든 생명이 기억하지도 못할 까마득한 오랜 태고 시절부터 존재를 이어온 지엄한 역암이시여, 이 미천한 존재의 간섭으로 인해 평온한 영면을 방해받으시고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한 꺼풀 걷어진 지반이시여, 대우주의 순환의 법칙에 따라 비록 언제고 형체를 바뀔지라도 영원히 세상을 떠받칠 대우주의 섭리께 정중히 고하노니, 그 존엄한 옥체를 둘로 나누어 안에 감춰진 신비한 내면의 세월을 이 미천하고도 천한 필멸자에게 한 번만 보여주시기를, 이렇게 엎드려서 땅에 머리를 박은 채 간절히 청하옵고 또 청하옵니다."
쩌저저저저저저적!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위에서 환하게 빛이 나면서 완전히 두 동강이 나서 갈라졌다.
-아들? 어떻게 된 거니? 바위가 갈라졌어?
"네, 아주 시원하게 두 동강이 났습니다."
-오, 그렇구나. 잘됐다. 그래도 바위 가르기에는 성공했으니 앞으로 열심히 갈고닦아 정신 수양을 쌓으면 언젠가는 말 한 마디로 대륙도 창조할 수 있을 거다.
하수영은 이를 갈듯이 말했다.
"저런 하찮은 바위 쪼가리 하나 쪼개는 데도 지성체로서의 자존심 다 내려놓고 엎드려 싹싹 빌어야 하는 데, 이런 권능을 갈고닦으라고요?"
그때였다.
두 개로 갈라져 있던 바위 조각이 갑자기 별안간 움직이는가 싶더니, 잘린 면이 다시 감쪽같이 붙었다.
뿐만 아니라 아까 하수영이 신언으로 만든 여러 개의 작은 틈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게 뭐야? 아버지, 바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으음, 아무래도 네가 방금 바위쪼가리 어쩌고 한 게 신어의 발동을 취소하는 힘을 발휘한 것 같구나.
"취소라고요?"
-신어로 행한 기적은 당연히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취소에도 대가는 따르는 법, 처음 권능을 행할 때보다 몇 배 이상 가는 신력이 소모된단다.
"전 취소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네가 바위를 한껏 떠받드는 표현을 써가면서 부탁을 해놓고, 나중에는 모욕을 했잖니. 그게 아마 취소 발동으로 간주된 것 같구나.
"……원래 그런 식으로도 취소가 발동되나요?"
-아니, 원래 이렇지는 않아. 직접 취소한다고 분명한 의사를 담아서 말을 해야지. 참 신기하다, 신기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위 쪼가리라고 한마디 했다고 그냥 날름 취소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제가 아까 얼마나 길고 장엄하게 부탁을 했는데. 겨우 그 한마디 가지고 이래요?"
-원래 존경이나 칭찬과 달리, 모욕은 단 한 마디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잖느냐. 수십 년 절친도 욕 한 마디에 무너지는 수가 있지 않니.
하수영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해. 안 써. 봉인할 거야."
-안 된다, 아들아!
* * *
매매 거래가 무사히 끝난 이상, 더 이상 강훈과 연락을 할 이유는 없었다.
하수영도 처음에는 연락을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 매수자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네, 얼마든지요. 무슨 문제 생긴 거 있나요?
"문제까지는 아니고 간단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 홍윤주 씨하고 이야기해 봤는데요, 그분이 월세를 1억 이상 내셨다던데요. 그리고 계약서하고는 상관없이 자기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갈 거고, 어길 시에는 위약금이 10억이라고 하던데요."
-아, 그거요?
"이중계약을 따로 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의외로 강훈의 목소리에는 당황함이 없었다.
-이중계약서를 따로 쓴 건 아닙니다. 그냥 그 누님이 그렇게 챙겨주겠다고 하신 거고, 그러니까 구두로한 거예요. 따로 계약서 같은 건 없어요.
"아, 그러니까 불법이든 합법이든 임대차 계약이 아니라 두 분 사이에서 이뤄진 약속 같은 거네요?"
-네, 그렇죠. 이게 문제가 될까요? 제가 이런 부분은 잘 몰라서…… 매니저 형도 이 사실은 모르거든요.
"알겠습니다."
하수영은 더 말할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강훈의 반응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거 같고, 더 이야기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혹시 홍윤주 씨나 기획사 사장한 테서 따로 연락이 왔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부탁이 있는데, 혹시 청담 빌딩 때문에 연락이 오면 저한테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홍윤주 씨가 쿨한 분이라고 했으니, 제 생각엔 강훈 씨한테 그 문제로 연락을 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사람 일은 모르니까 부탁드립니다."
하수영은 전화를 끊었다.
"연락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왜 안 오는 걸까? 설마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하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계약 연장 없이 퇴거할 거라면 진작 대답을 했을 것이다.
또 계약 연장을 원한다면 빨리 연락을 해서 협상을 시도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홍윤주는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보통 이렇게 길게 침묵하는 건 추진력을 모으려고 할 때인데."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스마트폰이 진동했고, 발신인을 확인하니 홍윤주였다.
"네, 하수영입니다."
-당신이 새 건물주? 훈이한테서 이거 샀다는? 지금 가게에서 좀 봅시다.
굵직한 남자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