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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갓-113화 (113/1,270)

프랜차이즈 갓 113화

24장 라면과 기름 사이(6)

정서희가 돌아가고, 하수영은 다시 서락산을 올랐다.

비탈길을 느긋하게 오른 하수영은 황금비단우산버섯 농장 옆에 마련한 작은 텃밭으로 향했다.

"음, 무럭무럭 잘 자랐군."

엘릭서의 효능 덕분에 어제 심어놓은 고추는 벌써 완전히 자라서 탐스러운 고추를 가득 매달고 있었다.

빨갛게 익은 고추의 표면에는 매끄러운 광택이 흘렀다. 어디 상처 난 곳, 찌그러진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이상적인 모양으로 생긴 고추들이다.

"누구 고추인지 참 잘생겼어."

하수영은 고추를 따서 포대에 담았다.

완벽한 생김새를 갖춘 고추들이 포대에 가득 담겨 있으니, 걸작 명화를 보는 듯한 뿌듯함마저 밀려온다.

"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청량한 붉은 색, 정말 예술이라니까. 고추생김새 겨루는 농촌 대회 같은 건 없나? 거기 나가면 무조건 일등일텐데."

고추를 가지고 내려온 하수영은 볕이 잘 드는 저택 정원 한쪽에 자리를 깔고 잘 널어놓았다.

뜨거운 태양 빛이 고추를 바싹 말리면 분쇄기에 넣어서 가루로 만들 참이었다.

"이건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대량 재배가 힘드네. 뭐, 당장은 대량 재배할 생각도 없지만."

농장로봇들은 고추를 따기에는 하드웨어 스펙이 모자라다.

땅에서 버섯을 캐는 반복 작업과, 줄기 사이에 달려 있는 고추를 따는 것은 난이도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량 재배를 위해서는 사람을 써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쓰면 당연히 엘릭서의 비밀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

씨를 뿌렸더니 하루 사이에 자라나서 고추까지 매달려 있는 걸 보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지금 있는 전자노예들 하드웨어로는 고추 따기 작업은 복잡해서 무리일 텐데."

* * *

"무슨 고춧가루 향이 이래?"

정서희는 황당해서 다시 한번 향을 들이마셨다.

조금 전에 맡은 게 착각이 아니었다.

이 고춧가루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이 났다.

살짝 톡 쏘는 듯하면서도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느낌을 북돋워 주는, 그러면서도 시원한 청량감과 얼큰한 풍미를 자극하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그런 신기한 향이었다.

"이거 정말 고춧가루 맞아?"

생긴 건 영락없는 고춧가루였지만, 자세히 보니 의구심이 점점 차오른다.

고춧가루라기에는 너무 알이 고르고 색깔도 선명하다.

하수영이 고춧가루라고 설명을 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풍미를 맡고 나서 보니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너무나 곱고 작은 입자와 빨려 들어갈 듯이 선명한 붉은색.

-빵빵! 빵빵!

뒤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경적 소리에 정서희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서둘러 뚜껑을 닫고는 액셀을 밟았다.

마음이 초조하고 급했다.

'빨리 먹어봐야겠어.'

서울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2층부터 올라갔다. 거실에 나와 있던 모친이 반갑게 불렀다.

"어머, 서희야. 오늘은 일찍 왔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드……."

"미안, 엄마! 나 바빠서!"

정서희가 대충 인사하고 후다닥 올라가자 모친은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쟤는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뭐가 저리 급해서……."

방에 들어선 정서희는 급히 개인 주방에서 조리도구를 꺼냈다. 물을 펄펄 끓인 뒤 황비버섯라면을 뜯고 먼저 스프와 버섯부터 집어넣었다.

버섯이 물을 흡수하며 익어가자 맛있는 냄새가 한껏 피어올랐고, 그녀는 다시 면발을 넣었다.

면발이 적당히 익었을 무렵,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고춧가루 용기를 열었다.

숟가락으로 고춧가루를 한 스푼 뜬 후, 보글보글 끓는 라면 위에 조심스럽게 살살 뿌렸다.

일부러 대파나 계란 같은 다른 첨가물은 일절 넣지 않았다.

순수하게 이 고춧가루만 넣었을 때, 어떤 맛의 변화가 일어나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예쁘다…….'

고춧가루 알갱이가 스르르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붉은 첫눈이 날리는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라면이 드디어 다 익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라면의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한 가지를 빼고.

"어머, 이 국물 색 좀 봐."

라면 국물 색 위로 한 겹 덧씌워진 미묘한 광택이 그녀의 식욕을 한껏 자극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녀는 먼저 고춧가루가 녹아난 국물을 한 수저 떠보았다.

황금비단우산버섯의 감칠맛과 이 신기한 고춧가루의 결합이 과연 어떤 맛을 이끌어낼까?

국물이 혀끝을 짜릿하게 자극하며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

이 맛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저 고춧가루의 얼큰함이라고 하기에는 세월이 녹아난 풍미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버섯을 우려낸 육수에 붉은 감칠맛이 섞이자 중독성 넘치는 향을 사정없이 뿜어내며 혀끝의 미각세포들을 마구 교란시킨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그저 맛있을 뿐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서희는 어느새 국물 한 방울도 남지 않고 텅텅 빈 냄비를 볼 수 있었다.

보통 라면 하나를 국물까지 깨끗이 비우면 적당한 포만감이 느껴지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라면이 코스요리의 애피타이 저로 전락한 것처럼, 새로운 입맛이 돋아나며 식욕이 마구 아우성을 쳤다.

"먹고 나니 더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아. 어떡해. 여기서 더 먹으면 살찔 텐데."

정서희는 발을 동동 구르며 고춧가루가 든 용기를 무심코 봤다가 시선이 고정되었다.

무수한 선홍빛 가루 알갱이들이 그녀의 시선을 붙든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더 먹어도 돼. 라면은 살 안 쪄.

-살은 라면이 쪄. 네가 안 쪄…….

-그러니 마음껏 먹어…….

그녀는 홀린 듯이 라면을 꺼냈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먹어보기 위해 대파와 만두, 계란까지 꺼냈다.

계란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는 순간, 불현듯 하수영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한 번 계란프라이에 뿌려서 먹어 보세요. 삼겹살이나 소고기에 뿌려 먹어도 괜찮아요.

계란프라이? 삼겹살? 소고기?

그것들의 먹음직스럽고 아리따운 자태를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안에 갇힌 아귀들이 제발 나를 꺼내달라고 울부짖었다.

어디에선가 환청까지 들리는 듯했다.

'제발 먹어! 먹으란 말이야!'

'살은 내가 찔게! 그러니까 제발 먹어!'

'어서 먹어 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녀는 냉장고를 다시 열었다.

숙성된 삼겹살과 작게 썰린 안심 부위를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얼마 전 전성렬이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나눠준 송이버섯도 몇 개 꺼냈다.

작은 프라이팬을 꺼낸 그녀는 잠시 빤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제일 큰 프라이팬을 꺼냈다.

식용유를 꺼내 기름을 두를까 하다가 바로 내려놓았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프라이팬이 달궈지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열기가 오르자 그녀는 삼겹살과 안심, 송이버섯을 동시에 올렸다.

지글지글거리며 맛있는 향기가 풍겼고, 고기가 적당히 익자 그녀는 한쪽에 계란을 까서 노른자를 떨어뜨렸다.

계란프라이가 반숙이 된 순간 그녀는 고춧가루를 고기와 버섯, 계란 위에 골고루 뿌렸다.

살포시 내려앉는 곱고 붉은 알갱이는, 물기에 젖은 흙 위에 내려앉는 가을 민들레처럼 청아해 보였다.

그녀는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떨리는 젓가락 끝이 소고기 안심을 향하다가 이내 멈췄다.

-계란프라이에 뿌려 먹어도 맛있더라고요.

하수영의 목소리가 다시금 유혹하듯이 귓가를 울렸다.

삼겹살과 소고기, 송이버섯, 그리고 계란프라이.

이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것을 치자면 당연히 계란프라이일 것이다.

제일 급이 떨어지는 계란프라이에서는, 과연 어떤 맛이 날까?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정서희는 계란프라이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었다.

희고 고운 치아가 얇게 익은 반숙의 부드러운 막을 깨는 순간, 안에 고여 있던 노른자의 풍부한 감칠맛이 고춧가루의 선홍빛 맛과 섞여 혀전체를 감쌌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취한 그녀는 그대로 우두커니 경직된 채 계란 프라이만을 마냥 씹었다.

"……너무 맛있어."

이건 계란프라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무수히 먹어봤던 그 계란프라이하고는 전혀 달랐다.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게 사실은 진짜 계란프라이가 아니었던 거야."

그녀의 시선이 고춧가루 용기를 향했다.

비로소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그저 감칠맛, 달짝지근한 맛, 얼큰한 맛, 풍미 깊은 맛 등을 더해주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요리에 담겨 있는 고유한 맛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힘을 가진 마법의 향신료였던 것이다.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게 고춧가루라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정서희의 머릿속에서는 프라임컴퍼니도, 정유사업도, JM 식품을 언젠가 집어삼켜야 한다는 야욕도, 전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고춧가루가 이끌어낸 놀라운 맛의 폭발에 순수하게 취한 채 감동에 젖어 있을 뿐이다.

* * *

"좀 신기하긴 하네. 황금비단우산버섯에서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엘릭서 농도를 다르게 한 것도 아닌데."

하수영은 엘릭서 고춧가루를 듬뿍뿌린 목살과 김치를 먹으면서 평가를 했다.

"송이버섯하고 황금비단우산버섯은 그냥 조금 빨리 자란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는데."

하수영은 송이버섯의 부수 효능은 아직 알지 못했다.

"고추 자체가 엘릭서를 먹고 자라면 이런 효능이 생기는 건가?"

엘릭서를 섭취하고 자란 고추로 만든 고춧가루는 일반적인 고춧가루와 전혀 맛이 달랐다.

눈을 가리고 맛본다면 그것을 고춧가루라고 맞히는 사람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춧가루 본연의 매운 맛을 완전히 잃은 것도 아니었다.

고춧가루를 기본으로 진화한 전혀 새로운 향신료라고 하는 게 가장 적절할까?

"음…… 그러고 보니 송이, 황비버섯, 골든 트러플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구나."

바로 성장 환경이 매우 까다롭다는것.

그나마 황금비단우산버섯은 다른 둘에 비해서 생육 조건이 양호한 편이지만, 아직까지도 키우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그래서 킬로당 1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고추는 생육 환경이 그리 까다로운 편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만큼 다른 부수 효과가 추가로 덕지덕지 붙은 건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어."

하수영이 여러 번 먹어본 결과, 엘릭서 고춧가루는 그 어떤 요리하고도 어울리는 만능 향신료였다.

고기, 계란프라이, 라면, 찌개, 심지어 야채 샐러드에 뿌려 넣어도 잘 어울렸다.

어울리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요리가 가지는 고유한 맛을 증폭시켜주는 효과도 있었다. 맨밥에 그냥 뿌려 먹어도 맛이 살아날 정도였으니.

"버섯은 그냥 땅에서 캐면 되는데, 이놈은 일일이 손으로 따줘야 하니까 대량 재배는 힘들겠네."

대량 재배를 위해서는 자동고추 따기 로봇을 도입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역시 고추 따기 전용 로봇을 새로 만들어야겠지? 전자노예 Ver. 2를 도입해야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시중에 개발된 로봇이나 부품을 새로 사와서 자신이 직접 개량을 해야 한다.

개량 자체야 어렵지 않지만, 로봇이 대당 가격이 얼마나 뛰어오를지는 장담 못 한다.

"고추 따기 같은 섬세한 작업을 사고 없이 해내려면 강인공지능은 되어야 하니까…… 지금 여기 문명 기술로는 1대 만들려면 수십조 원은 들어가겠네. 10대만 만들어도 수백조 원, 배보다 배꼽이 크겠구나."

하수영은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럴 돈 있으면 청담동 빌딩 수집에 먼저 쏟는 게 더 이익이겠다. 그냥 접자. 주변 사람들 나눠줄 것만 내가 손으로 키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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