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06화
23장 삼켜야 하나, 뱉어야 하나(3)
매도인 강훈은 유명 남자아이돌 포그레인 소속이다.
450억짜리 빌딩 거래라고는 하지만,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아니고 계약 전에 만나자는 것이니, 당연히 직접 나올 리가 없다.
다른 매물 같았으면 매도인이 '계약할 것도 아닌데 만나서 뭐하게?'라며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급매인 데다가 2주 안에 잔금 납입까지 완료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고, 까다로운 유흥술집이 입주해 있다는 문제가 있다.
"본인은 아니더라도 대리인 정도는 보내서 이야기는 하려고 하겠지. 쉽게 팔릴 매물이 아니라는 건 자기도 잘 알 테니까."
하수영은 느긋하게 기다렸고, 중개사는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연락을 해왔다.
-사장님? 매도인 측에서 만나겠다고 하네요. 근데 아마 대리인이 나올 거 같습니다.
"대리인이든 뭐든 매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습니다."
-네, 저도 그거 때문인 거 같아서 전화할 때 그 점을 분명히 강조했습니다. 매도인 측도 알았다고 하더군요. 아, 강훈 가수와 직접 통화를 한 건 아닙니다.
"그러시겠죠. 언제가 편할까요?"
-저쪽에서 내일 점심에 보자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지금은 밤이 한창 무르익은 시간.
내일 점심에 보자고 했다면 매도인 측도 어지간히 몸이 달아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죠. 내일 봅시다."
-네,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하수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중 개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아이고, 방금 통화했는데 그새 오셨네요. 차 끌고 가시게요?"
"혹시 차 여기에 밤새 세워놔도 될까요? 제가 서락읍까지 다시 내려갔다가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요."
"아, 얼마든지 그러세요. 근처 호텔같은 곳에서 주무시려고요?"
"캠핑카 놔두고 뭐하러 호텔에서 자나요?"
하수영이 엄지손가락을 등 뒤로 가리키며 말하자, 중개사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그러네요. 내 정신 좀 봐."
"하루만 주차 신세 지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하수영은 곧바로 대형 캠핑 트레일러에 올랐다.
비싼 캠핑 트레일러답게 잠자리는 제법 아늑한 편이었다.
다소 좁기는 하지만 편의시설은 웬만한 신축 원룸보다 더 잘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캠핑카에서 자는 건 오늘이 처음이구나."
하수영은 스마트폰으로 청담동 매물을 검색하다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하수영은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 뒤 청담동 거리를 거닐었다.
"휘발유 엔진이 대세다 보니 자동차들 모양이나 성능이 다 고만고만 하구나. 참 재미없는 세상이네."
괴수의 습격도, 미래의 과학기술도 없는 시대이다 보니 겉보기에는 하나같이 심심해 보인다.
"그래도 람보르기니는 여전히 멋지네."
청담 명품거리를 걷던 하수영은 불현듯 저쪽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걸 봤다.
유명 연예인 행사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가까이 가본 하수영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장효주잖아?"
황비버섯라면의 CF모델이기도 한 장효주가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다수의 경호원들이 접근 금지 라인에 버티고 서서 팬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고 있었다.
"아, 장효주가 샤넬 모델이었지? 그거 관련해서 행사가 있나 보네."
마침 샤넬 사옥 앞이기도 했고, 먼발치에서 대충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 하수영은 중개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매도인 측 지금 오고 계십니다. 아마 매니저가 올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십여 분이 넘게 기다리자, 짙게 선팅이 된 검은 밴이 사무실 앞에 내려섰다.
"아니, 대체 어떤 미친놈이 퍼포먼스 R103 모델을 이런 곳에다가 세워둔 거야?"
"훈아, 말조심. 말조심. 흥분하지 마."
"아니, 형 내가 흥분 안 하게 됐어? 저런 큰 차를 이런 골목길에 세워두면 다른 차량들이 어떻게 지나다니라고, 저 차주 얼굴 한 번 보고 싶네, 진짜."
"제가 그 차주인데요."
하수영이 손을 흔들며 덤덤히 말하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젊은 청년이 깜짝 놀라 반응했다.
"뭐, 뭐라고요?"
"제가 차주인데 여기 사무실에 용무가 있어 타고 온 겁니다. 그러니 사무실 앞에 세워둔 거죠."
하수영은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매도인분 당사자가 직접 올 줄은 몰랐네요, 강훈 씨."
"아, 혹시 매수 희망하신다는 분인가요? 이런…… 조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라도 저런 큼지막한 차가 주차해 있으면 좋은 소리는 안나올 거 같네요. 이해합니다."
하수영이 웃으면서 말하자 강훈은다소 헷갈려서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매니저가 재빨리 사과를 보탰다.
"저거 R103 모델 맞죠? 훈이가 워낙 갖고 싶어 했던 모델이라 더 말을 쉽게 한 것도 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와 선호 차량 기호가 같다니 동질감도 느껴지고 좋네요."
분위기가 나빠지지 않는 흐름이자 중개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재빨리 끼어들었다.
"강훈 씨,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TV에서 활약은 잘 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인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진짜 본인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뜻밖의 행운인데요?"
그러면서 중개사는 하수영과 은근한 시선을 공유했다.
강훈이 초면에 말실수를 했으니만큼, 초반에 유리한 기선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강훈 씨가 내놓으신 청담동빌딩에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계약 즉시 일시불로 체결할 만한 현금도 준비되어 있고요."
하수영은 모바일뱅킹에 들어가서 460억 원에 달하는 통장 잔액을 확인시켜 주었다.
통장 잔액을 확인한 강훈과 매니저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평소, 통장에 460억 원이나 되는 거액을 넣어둔다는 것 자체가, 현금동원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충분한 구매력이 있다는 걸 일단 확인시켜 줘야 이야기가 순탄하게 풀릴 테니까.'
하수영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 뒤, 곧바로 말을 던졌다.
"그런데 빌딩 지하에 유흥술집이 있더군요."
"아, 그거 말입니까? 별거 아닙니다. 원래 강남에는 룸사롱 같은 게 워낙 흔해서…"
"보통 룸사롱이 아니던데요. 제가 어제 몇 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확인해봤는데, 드나드는 손님들이 최소 포르쉐 이상 타고 다니더군요. 그런데 정작 간판 같은 것은 전혀 없어요."
"……."
"이미지 실추 걱정되시는 분이 면담 좀 하자니까 대리인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나오셨죠. 시급히 매물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신 것 같은데,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셔야 저도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구매하실 의사가 있으십니까?"
강훈이 반색을 하며 묻자 하수영은 천천히 끄덕였다.
"빌딩 자체는 정말 마음에 들거든요. 진짜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제가 반드시 사고 싶은 마음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한국에 전쟁이 났거나, 세상이 멸망하거나, 뭐 그런 거요."
"……."
무조건 빌딩을 사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 아닌가?
입을 다문 강훈의 눈빛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골치 아픈 매물을 드디어 털어버릴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중개사는 놀란 눈으로 하수영을 주시했다.
자신이야 거래를 성사시키면 수수료도 떨어지고 이익이지만, 그래도 하수영의 입장을 생각해서 포기를 권했었다.
그런데 하수영은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결정을 내리려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구매는 이미 당연히 결정이 난 거고, 그 술집을 어떻게 할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나?'
"제가 청담동 빌딩을 좀 여럿 갖고 있을 '예정'입니다. 근데 철칙이 하나 있어요. 술은 오로지 편의점, 음식점, 펍, 주류판매전문점에서만 팔수 있다는 거죠. 여자들 나와서 술따르는 유흥술집은 절대 안 됩니다."
"……그러시군요."
강훈의 눈빛에 체념이 깃들었다.
매매거래가 이뤄지지 않겠다는 포기의 감정이 생긴 것이다. 즉 그만큼 그 유흥술집을 어렵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곧 계약 완전히 만료되죠? 혹시 연장을 약속하셨나요?"
"아직 그건 안 했습니다. 일단 내년 초에 임대차 계약은 완전히 만료입니다. 한 번 갱신을 했던 것으로 알아요."
"그럼 이번에 만료되면 내보내면 되겠네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그 술집 배후가……."
"강남 밤문화 큰손이라면서요. 텐프로 몇 개하고 대형 클럽도 갖고 있다고요."
강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굴뚝같은 눈치였다.
중개사가 눈치를 알아차리고 얼른 일어났다.
"자리를 비켜드리죠. 편히 이야기 나누시고, 끝나면 연락 주세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편히 말씀 나누시면 됩니다."
"그건 저희가 너무 죄송해서."
"아닙니다. 저번에 큰 건 하나 해주셨잖아요. 이번에도 큰 계약이고요. 당연히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중개사는 동료 직원들을 데리고 얼른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 안에는 이제 하수영과 강훈, 그리고 매니저, 이렇게 셋만 남았다.
그제야 강훈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강남 밤문화 큰손이 제 기획사사장입니다."
"오, 그건 신박하네요."
"……안 놀라십니까?"
"놀라야 합니까?"
하수영은 그게 뭐 문제냐는 듯이 태연히 반문했고, 강훈의 표정에 떠오른 의아함이 짙어졌다.
"전 연예기획사 사장 같은 건 별로 안 무섭거든요. 세상에서 마누라 말곤 무서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아, 결혼하셨군요."
"안 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지요."
매니저와 강훈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변해갔다. 그들은 하수영의 대화 페이스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이 사람 대체 뭐야? 하는 감정이 눈빛에 여실히 떠올라 있었다.
"그 술집 주인이 기획사 사장의 애인입니다."
"그 사장이 미혼인가 보네요."
"아닙니다. 예전에 결혼했고 애도 있습니다."
"불륜이군요. 둘 사이에 애는 없나요?"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저한테 곧이곧대로 다 말씀해주셔도 되나요?"
"어차피 연예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거라서요. 제가 흘렸다고 본인 귀에 들어갈 일도 없어요. 본인도 웃어넘길 거고요."
하수영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술집 존재를 모르고 매입한 게 아니셨군요."
"……네. 당연히 살 때부터 알고 있었죠."
"기획사 사장하고 사이가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사실 조만간 기획사 계약이 종료되는데, 뮤지션 쪽에서 연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전 이미지 실추 때문에 급히 팔아버린다고 들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그것도 큽니다. 연장을 거부하면 제 소유 빌딩에서 유흥술집이 운영되고 있다고 기획사장이 언론 플레이를 할 거라고 협박했거든요."
"그럼 그 사장 애인한테도 타격이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아무 상관 없죠. 애인이 포토라인에 서는 것도 아니고, 언론사들은 제 이름만 떠들어댈 테니까요.
어차피 전 그 부분을 폭로하지도 못합니다."
강훈은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리 유명 아이돌이라고 해도, 대형 기획사 앞에서는 약자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