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04화
23장 삼켜야 하나, 뱉어야 하나(1)
-여보세요, 사장님. 여기 햇살부동산인데요.
"아, 안녕하세요."
햇살부동산은 하수영이 처음으로 청담동 상가빌딩 매매계약을 체결한 곳이었다.
80억 2,000만 원짜리 상가빌딩을 세입자 보증금 25억 3,500만 원을 끼고 구매하는 계약이었다.
계약금은 이미 잘 치렀고, 곧 중도금 입금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중도금 입금을 위해서 일부러 S은행을 찾아가 이체 한도까지 무제한으로 늘려놓았으니까.
"네, 반갑습니다. 중도금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 날짜에 문제없이 입금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지금 당장도 쏴드릴 수 있지만 계약에 명시된 날짜가 있으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그거야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시겠지요. 다름이 아니라 전에 따로 하신 말씀이 있으시잖아요. 그거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하수영은 반색했다.
자신이 햇살부동산에 따로 했던 말이라고는 한 가지뿐이다.
"청담동에 좋은 매물 나온 거 있어요?"
-아주 괜찮은 매물입니다. 준공된지 10년도 채 안 된 상가 빌딩이 지금 급매로 나왔어요.
"급매! 아주 좋네요!"
급매는 매물을 시세보다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준공된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빌딩이라고 하니 더욱더 끌린다.
-근데 이게 매물이 너무 좋은 거라서, 그래서 급매라고 해도 가격이 좀 센 편이에요.
"그렇게 좋은 매물이 왜 급매로 나왔죠? 혹시 건물주가 파산이라도 했나요?"
-파산까지는 아닌데 자금 사정이 많이 안 좋은가 봐요. 거기 조건이 계약하고 2주 이내에 잔금까지 치러주는 매수인을 원하는 거 같아요.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2주가 아니라 계약 당일에 잔금까지 일시불에 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좀 힘드시지 않을까요? 제가 사장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가격이 정말로 세서 그럽니다.
"얼마인데요?"
-450억에 나왔어요.
"……."
순간 하수영은 침묵했고, 부동산중개인은 금액이 너무 커서 놀란 것으로 받아들였다.
-가격이 아무래도 좀 센 편이죠? 이게 원래 530억 원은 받아야 하는데 매도인이 그만큼 사정이 급해서 매물로 나온 거예요. 2주 안에 잔금까지 준비하는 조건이 그렇게 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네요. 530억짜리가 450억에 급매로 나온 거면 그런 조건이 붙일만도 하네요."
-만약 여의치 않으신다면…….
"아뇨, 돈은 있습니다. 일단 매물 한 번 확인해야겠으니, 주소 좀 알려주시겠어요? 부동산 고유번호도 같이요."
-네, 바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수영은 청담동 빌딩을 이미 훤하게 꿰고 있기 때문에, 굳이 중개사와 같이 발품을 팔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건물을 찾아가는 것은 계약 체결 세레모니였다.
"어디 보자. 주소가 청담동 A번지 3-1… 어? 잠깐만? 이 빌딩은?"
심드렁하게 문자를 확인한 하수영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굳이 포털사이트에서 주소를 입력할 필요도 없었다.
청담동 건물들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남김없이 기억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는 곧바로 중개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거 남자 아이돌 그룹 포그레인 강훈이 얼마 전에 사들였다는 그 빌딩 아니에요?"
-그래요? 유명 연예인 소유라는 말은 들었는데, 아시겠지만 청담동에 그런 건물이 어디 한두 개여야지요. 포그레인이 유명한 그룹인가 봐요?
"저도 남자 아이돌 같은 건 잘 몰라요. 그냥 구글링해 보니까 엄청 유명한 애들인가 보더라고요."
등기부를 확인해 보니 강훈이라는 가수가 490억에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간 가치 상승률을 생각하면 530억 정도가 적당한 시세인 것은 맞다.
강훈이 매입하면서 취득세 등 이것 저것 부대비용을 합치면 500억이 살짝 넘게 들었을 테니, 50억 이상 손해 보고 파는 건 사실이었다.
'왜 이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에 내놓는 거지? 연예인 하면서 돈도 잘벌 텐데, 자금이 막혔나?'
하수영은 못내 찜찜했다.
그가 청담동 상가 빌딩들을 빠삭하게 꿰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세와 건물 상태, 위치, 소유관계 정도만 파악하고 있을 뿐,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보이는 디테일까지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멀쩡한 우량 매물을 수십억 원 이상 깎아서 급매로 내놓는 이유를 알리가 없다.
순전히 매도인의 개인적인 이유일테니까.
'단지 급전이 너무너무 필요한 것 뿐이라면 건물에 뭔가 하자가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단 말이야.'
찜찜한 느낌이 솟구칠 땐 뭐다?
"사장님, 혹시 지금 그 매물 보러 갈 수 있나요? 한번 자세히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럼요. 언제 오시겠어요?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아, 서락읍에 계시는구나.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하수영은 외출 준비를 마친 후 저택을 나섰다.
저택 밖 공터에는 얼마 전에 새로 주문한 차량이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 서울 나들이 때 접촉사고가 난 트럭은 중고로 판매하고, 새 차량을 주문한 것이다.
번듯한 직사각형의 모습을 자랑하는 거대한 차체의 모습을, 하수영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25억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주고 마련한 대형 캠핑 트레일러, 모델이름은 '퍼포먼스'
대형 관광버스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하는 캠핑 트레일러는 차체 하단에 스포츠카를 따로 실을 수 있는 공간까지 있었다.
캠핑 장소에서 일일이 대형 캠핑카를 이끌고 주변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만큼 미련하고 불편한 일도 없다. 스포츠카를 실을 수 있게 만들어진 것도 그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역시 차는 클수록 좋다니까."
하수영은 새 차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 * *
바쁘게 전화를 돌리며 하수영을 기다리던 햇살부동산 중개사는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약속 시간이 훌쩍 가까워져 있는 상태였다.
"곧 도착하시겠네."
약속 시간이 워낙 칼 같은 사람이니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다.
중개사는 하던 일을 슬슬 정리하며 외출할 준비를 갖췄다.
그때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대형 트럭이라도 진입하는가 싶어서 눈을 돌린 중개사는 신기해서 눈을 치켜떴다.
"무슨 버스가 저렇게 신기하게 생겼대? 아니, 자세히 보니 버스는 아닌 거 같고…… 저게 뭐지?"
캠핑에 관심이 없는 중개사는 저게 대당 25억 원이나 하는 대형 캠핑트레일러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캠핑 트레일러가 하필이면 중개사사무실 앞에 와서 정차했다.
중개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차주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여기에 함부로 주차한 거라면 항의할 생각이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저런 버스 같은 걸 앞에 갖다 놓으면 우리 더러 장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단단히 뭐라 할 셈으로 팔까지 걷어붙이며 각오를 다지는데, 운전석에서 아는 얼굴이 내렸다. 바로 하수영이었다.
"어? 하 사장님? 이 차는 뭔가요?"
"저번에 탔던 트럭은 교통사고 나서 새로 바꿨습니다. 어때요? 튼튼해 보이죠?"
"화물차하고 정면충돌해도 끄떡없을 거 같은데요?"
"이게 티타늄 합금 프레임을 써서 만든 거라 차체가 엄청 가볍고 아주 단단하죠. 민수용 차량 중에서 이놈하고 정면으로 박치기해서 이길 수 있는 모델이 아마 없을 겁니다."
모처럼 차량 자랑을 할 기회가 생긴 하수영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하이브리드 차량이라 기름이 떨어져도 태양열만 있으면 얼마든지 운행도 가능하죠. 속도는 조금 느려지겠지만요. 캠핑카라서 그냥 장거리 운행하다가 피곤하면 그냥 안에서 침대 펴고 편안히 자면 돼요."
"이야, 잘 모르지만 듣기만 해도 굉장한 차인 거 같습니다. 제가 청담에서 오래 장사를 했는데 지금까지 이런 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당연하죠. 이런 차를 몰고 번화가를 돌아다닐 일은 없으니까요."
"혹시 오늘 건물 보시고 나면 어디 놀러 가시나 봐요? 이런 차 끌고 오신 거 보면요."
"아뇨, 집에 바로 갈 건데요?"
중개사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예? 아니, 그럴 거면 뭐하러 이런 차를 끌고 서울까지 오신 건지……."
"데일리카가 이거 하나뿐이라서요. 제 드림카 마이너 카피 버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교통사고 나도 안 다치려면 이런 차 끌어야 합니다. 벤틀리, 롤스로이스 같은 거 아무리 타도 화물차가 위에서 깔아뭉개면 답 없어요. 뭐든지 체급 높은 게 최고입니다."
중개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멋들어진 모습과 크기를 자랑하는 캠핑 트레일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하수영의 말대로 이런 차를 타고 다니면 그 어떤 차량하고 부딪쳐도 끄떡없을 거 같아 보였다.
"자, 타시죠.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아, 네."
중개사는 엉겁결에 캠핑카 조수석에 탔다.
좌석이 지상에서 제법 높이 위치하다 보니, 확실히 도로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가 된다.
버스나 화물차의 승차감을 생각했던 중개사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구동감에 깜짝 놀랐다.
"이 차, 겉보기하고 달리 너무 조용한데요?"
"캠핑카니까요. 달리는 동안에도 자녀들이 편안히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충격 흡수 장치에 삼중 사중으로 신경을 많이 쓴 모델입니다."
"저도 하나 갖고 싶네요. 이런 차는 얼마나 할까요?"
"애는 티타늄합금으로 특별 주문제작한 거라서 같은 모델 보급형보다 1.5배 정도 비싸요. 티타늄합금 틀이 아무래도 가격이 좀 나가다 보니까요. 250만 불 주고 샀던 걸로 기억해요."
"25억… 어마어마한 가격이네요."
한 2, 3억 정도 생각했던 중개사는 생각보다 상당한 가격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450억짜리 빌딩 매물을 보러가는 사람인데 25억짜리 차량이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리라.
"여기군요."
하수영은 정확히 매물이 있는 곳 앞에서 차를 정지했다.
중개사는 내비게이션도 안 켜고 한번에 길을 찾아온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
"여기 지리가 아주 훤하신가 봅니다? 내비도 안 켜고 단번에 찾으시니 말입니다."
"제가 원래 기억력이 좋아서요. 한번 지도로 외운 길은 잘 안 까먹는 편입니다. 일단 내리죠."
차에서 내린 하수영은 매물로 나온 빌딩을 이리저리 올려다보며 살폈다.
겉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저번에 탐색을 나왔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중개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530억짜리를 450억에 내놓은 걸 보면 어지간히 돈이 급한 모양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 그렇게까지 가격을 파격적으로 깎지는 않거든요. 2주 안으로 잔금 지불을 원하는 걸 보면, 매도인이 아마 당장 큰 돈이 없으면 엄청 곤란해지는 상황인가 봅니다."
"혹시 그런 걱정이 들더라고요. 감당 안 되는 악성 세입자 같은 건 없나 하고."
"에이, 그 정도 가지고 이렇게 파격적으로 급매를 내놓진 않아요. 아마 매도인 개인적인 자금 사정이 있을 겁니다."
"일단 매도인 측에는 연락 안 하셨죠?"
"네, 안 했습니다."
"일반 상가 방문객인 척하고 한 번 둘러보죠."
"그러죠."
하수영은 중개사와 함께 빌딩 전층을 꼼꼼히 확인했다.
하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특별한 하자는 없어 보였다. 입주한 상가도 장사가 비교적 잘 되고 있는 편이었다.
"빌딩 자체나 상권은 좋은 편인데…… 역시 매도인 개인적인 재정문제가 컸나 보네요."
"그렇다니까요."
"시간도 늦었는데 식사나 하고 갈까요? 제가 사죠."
"앗, 감사합니다."
둘은 상가 1층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나섰다. 어느새 밖이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빌딩을 나오는데, 여러 명의 젊고 예쁘장한 여자들 여럿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세진이 네가 웬일로 칼출근이야?"
"말도 마. 저번 주에 풀로 쉬었더니 마담 언니가 펄쩍 뛰고 난리 났어. 지명 손님 나가떨어지는 꼴 보고 싶냐고, 남친이랑 이번 주 여행 가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나왔어."
"난 오늘 무조건 이백오십 이상 찍어야 되는데. 내일 월세 나가는 날인데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지하로 내려갔고, 하수영과 중개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여기 지하에 술집 있어요?"
"그, 그런 거 같은데요? 저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