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98화
21장 선물은 상대가 마음에 들어야지 (2)
"만찬을 하자고요?"
정서희는 국제자원투자회사에서 온 회신에 당황했다.
공손하고 정중하기 그지없는 필체로 작성된 회신문에는, 10㎏의 골든 트러플 선물에 대한 진정 어린 감사의 뜻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제자원투자회사는 선물 받기로한 10kg의 골든 트러플을 자기들이 직접 요리할 테니, 함께 만찬을 즐기자고 역으로 요청해 온 것이다.
만찬 장소로 정한 곳이 또 하필이면 서해호텔이었다.
"이선주 대표님이 좋아하실 게 벌써 눈에 훤하네요."
"정 부사장, 이 제안은 거절할 수 없겠지요?"
"거절하고 싶으세요?"
"그럴 리가."
"거절해서도 안 되지만, 거절할 이유도 전혀 없죠. 안살린 구단주님이 직접 방한을 하신다잖아요. 그런 거물이 손수 요리해서 대접하겠다는 데, 백만 달러짜리 티켓을 끊어서라도 와야죠."
정서희는 벌써부터 흥분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거 아세요? 미국에서 안살린 구단주님과의 오찬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경매로 판 적이 있는데요, 무려 3,500만 달러에 낙찰됐어요."
겨우 밥 한 끼 먹는데 3,500만 달러라니.
전성렬은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그런 큰돈을 기꺼이 내면서까지 안살린과 식사를 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분이 바로 마케미야 대표님이에요."
"……헐."
"벌써 꽤 오래전 일이네요. 아무튼, 그 뒤로 마케미야 대표님은 안살린 왕자님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셨죠. 그렇게 생각하면 3,500만 달러가 사실 비싼 것도 아니죠."
그 돈을 내는 것으로 안살린과 친해질 수 있다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지 않을까.
"그 돈은 어떻게 됐어요?"
"안살린 구단주님이 똑같이 3,500만 달러 내서 7,000만 달러를 캘리 포니아 가난한 학생들 장학금으로 내놓으셨죠."
"역시 통이 크군요."
"사람은 원래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잖아요."
정서희는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새하얀 뺨이 붉게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분이 지금 우리와 밥 한 끼먹자고 한국까지 날아오겠다고 하신 거예요."
"이거 너무 긴장되는데. 옷 새로 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가진 양복들은 죄다. 중저가형뿐이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분 앞에서는 우리가 뭘 입어도 다 똑같을 테니까요. 1억짜리 정장이든 10만 원짜리 정장이든, 그분한테는 별 차이 없어요. 거기서 거기죠."
"하긴, 개인 재산이 4조 달러 이상이라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현금 1조 원이 있는 사람한테 가서, 쟤는 100만 원짜리 입었고 나는 10만 원짜리 입었는데, 누구 옷이 더 좋냐고 봐달라는 것보다 더한 거죠. 사실 그게 그건데."
"그렇게 비유하니까 확 와닿네요."
"숫자가 너무 크면 단위를 살포시줄여서 비교해 보는 게 좋아요. 체감이 확 되거든요."
1억짜리 정장이나 10만 원짜리 정장이나, 거기서 거기다.
전성렬은 그 말의 의미를 피부로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가격은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입어도 되겠네요. 물론 깔끔하고 격식에는 맞춰야겠지만."
"네,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나저나 하수영 사장님도 불러야겠죠?"
"오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연락은 해봅시다."
"이런 좋은 자리를 굳이 거절할 것 같진 않은데요."
"제가 아는 하 사장은 귀찮다고 치워둘 사람이라……."
"제가 한 번 연락해 볼게요."
정서희는 곧바로 하수영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수영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랐다.
-기껏 10kg 선물로 준다니까 그걸 가지고 또 우리랑 같이 나눠 먹겠대요? 하여튼 왕족의 자존심이란. 굳이 체면 차릴 필요 없이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서 아껴 먹으면 어디가 덧나나.
"네?"
정서희는 거리낌 없는 하수영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저는 참석 안 합니다. 두 분이나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가족 동행이야 뭐 당연한 거고, 추가로 공장장님 한 분 정도는 더 데려가셔도 될 거 같네요.
"네? 참석을 안 하신다고요?"
-참석해서 골든 트러플 요리밖에 더 먹어요? 그거 우리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건데, 그거 먹자고 제가 서울까지 올라갈까요?
정서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곧이 곧대로 '알았어요.'라고 인정하기에는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사장님, 안살린 구단주님하고 같은 자리에서 함께 식사하는 거예요. 더군다나 안살린 구단주님 개인 요리사가 직접 조리한 골든 트러플 요리를 맛볼 기회라고요. 이 좋은 기회를 정말 그냥 날리시려고요?"
-제가 다저스 팬이 아니라서, 별로 관심이 없네요.
"아니, 저기요. 꼭 다저스 팬이 아니어도…… 아니, 아니지. 이게 아닌데."
뭔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말이 꼬이는 기분이 든다. 억울한 것과는 살짝 다른 기묘한 말 막힘이라고 할까.
-젊은 사람들 어울려 노는데 저 같은 사람이 끼면 분위기만 망쳐요. 그러니 다들 재밌게 노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우리 셋 중 사장님이 제일 젊거든요?"
-꿈은 제일 늙었습니다.
"아, 그건 인정."
저렇게 팔팔하고 혈기 왕성한 나이에 건물주 될 생각밖에 없으니. 심지어 사업도 순풍을 타고 아주 잘풀리고 있는데.
-아무튼, 전 다음 농작물 뭐 키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요. 서락산을 벗어날 틈이 없습니다.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안살린 같은 분과 친분을 맺을 기회는 정말 평생에 한 번도 오지 않는데……."
-앞으로 자주 올 거 같아서 미리 발 빼는 겁니다.
끝내 하수영은 만찬 참석을 거절했다.
정서희가 맥이 빠져서 돌아보자 전 성렬은 거봐라 하는 식으로 웃어 보였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 사장은 안 올 거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안살린 구단주님 같은 분이 오시는데……."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뭔데요?"
"안살린 구단주님이 청담동 빌딩을 판다고 하는 겁니다. 그럼 신이 나서 달려올 겁니다."
"몇 개쯤은 있지 않을까요? 국제자 원투자회사가 우리나라에도 투자를 굉장히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증권가에 상장된 에너지 관련기업들은 죄다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지고 있을걸요?"
"아마 청담동에 가진 건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있다 해도 국제자원투자회사 명의가 아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 사장 그 친구, 아마 청담동에 있는 건물들은 전부 다 등기부 확인해봤을걸요?"
"……설마요."
"적어도 간단한 인적사항 정도는 조사해 놨을 겁니다. 혹시라도 길가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환심을 사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놨을 거예요. 그 친구는 그러고도 남을 친구입니다."
정서희는 불현듯 투자하겠다고 처음 찾아왔을 때를 생각했다.
하수영은 자신의 JM식품 딸이고기업경영에 도움이 될 테니 기꺼이 지분을 나눠주었다.
'혹시 내가 청담동에 빌딩 가진 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저번에 빌딩 판다고 했을 때 거절한 걸 담아두고 있지는 않겠지?
'돈 말고 지분으로 주시면 기꺼이 팔려고 그랬는데.'
갑자기 정서희는 그 점이 걱정되었다.
* * *
국제자원투자회사의 연락을 받은 서해호텔 경영진은 불이라도 난 듯이 요란법석을 떨었다.
박세준 이사는 통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이선주를 찾아 사장실로 달렸다.
"사장님!"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그는 이선주앞에서 국제자원투자회사에서 온 연락을 밝혔다.
귀빈관을 하루 대관해서 파티를 열고 싶다는 요청.
사실 서해호텔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요청이었다. 귀빈관은 일반인들도 종종 결혼식 목적으로 빌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상대가 국제자원투자회사였다.
"안살린 구단주님이 직접 주관하는 파티라고 합니다. 소소하게 지인들 몇 명만 초청해서 열 거라고 합니다."
"조금 의외네요. 저번처럼 호텔 전체를 빌릴 줄 알았는데."
이선주는 이제 이런 농담도 기꺼이 던질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그렇게 하려다가 안살린 구단주님이 조촐하게 귀빈관 하나만 잡아서 진행하자고 했답니다. 괜히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싫으신 모양입니다."
호텔 전체를 대관하면 편안하게 파티를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여론의 관심은 역으로 더 집요하고 커진다.
통째로 호텔을 빌린 것이니만큼, 그만큼 중요한 행사라고 인식되기 쉽기 때문이다.
"초청하실 지인들이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봐 배려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인이라고 언뜻 들었습니다."
"아, 그럼 그럴 수도 있겠군요.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세요. 그날 안살린 구단주님 일행이 최고의 서비스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아 참, 조리팀은 안살린 구단주님 개인 쉐프 제퍼드가 직접 팀원들을 데리고 올 거라고 했습니다. 식자재부터 주류까지 우리가 준비할 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수행원용 전용기가 따로 있으신 분이니까 당연하겠죠."
수행원용 전용기에는 안살린의 여행에 필요한 식자재, 의류, 액세서리, 기타 업무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이 잔뜩 실린다.
안살린이 타는 전용기에 넣기에 너무 많은 양이라, 아예 트렁크 겸해서 전용기가 하나 더 붙는 것이다.
안살린을 직접 보좌하는 수행원을 제외한 이들은 트렁크 전용기'에 탑승한다.
"제퍼드 쉐프…… 그 사람의 요리를 맛보게 될 행운아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 * *
만찬 당일이 되었다.
이선주는 특별비상근무 지침을 선언했다.
전 직원들에게 국제정상회담 개최보다 더욱 신중하고 철저하게 근무에 임할 것을 주문했다.
"다저스 구단주가 주최하는 파티라고?"
"저번 별들의 만찬 때 왔었던 분중 하나래. 그중에서도 가장 돈이 많은 분이라는데."
"나 들었어. 국제자원투자회사 주인이래. 아랍 에미리트 왕족이기도 하고, 재산이 우리나라 돈으로 4,000조 원이 넘는 분이시라는데?"
"와, 4,000조라니…… 엄청나다."
"그분, 기억이 나. 엄청 젊고 잘생기신 왕자님이었어."
파티의 무게감은 저번 별들의 만찬때만큼은 아니다.
그때는 안살린 외에도 마케미야 등 19명의 세계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안살린이 직접 주최한다는 것, 그리고 호텔 전체 대관이 아니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파티 자체의 무게감은 저번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일반 손님들도 다양하게 호텔을 출입하기에, 직원들이 신경써야 할 점은 오히려 더 많았다.
사장 전권으로 하루 휴업을 할 수도 있지만, 이선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족이 자기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우리가 알아서 일반 고객 출입을 통제해 버리면 언짢을 수 있어요. 그분은 일반 손님들이 번잡하게 드나 드는 것도 구경하면서 시끌벅적하게 파티를 즐기고 싶은 생각이실 테니까요."
하루 호텔을 쉬어야 하지 않느냐는 경영진의 의견에, 이선주가 한 대답이었다.
마침내 안살린의 지인들이 서해호텔에 먼저 도착했다.
손수 맞이하러 나간 이선주는 차에서 내린 이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정서희 양? 서희 양이 왜 거기서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