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96화
20장 어느 은행의 VIP(4)
하수영이 떠나고 얼마 후, 정준수이사가 이강식을 데리고 급히 서락군 지점에 도착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박행식 지점장을 찾았다.
"고객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최대한 오래 모셔놓으려고 했지만, 바쁜 일이 있으시다면서……."
"저런!"
정준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 워했다.
"이럴 수가! 간발의 차이로 놓치다니!"
"……."
이강식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정준수의 옆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간발의 차이라니? 본사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데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김현태 상무님한테서 연락 온 건 없었나?"
"안 그래도 전화통에 불이 날 뻔했습니다. 다그치듯이 고객님에 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답해야 할 건 답하고, 답하지 않아도 되는 건 모두 뺐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나저나 상무님도 지금 소식 듣고 내려오시는 모양이던데요?"
"하여튼 늙은이가 마음만 엄청 급해서. 느긋함의 미학을 몰라요, 찾쯧."
"……."
참고로 정준수 이사와 김현태 상무는 겨우 1살 차이다.
"고객님이 이사님 내려오시는 거 아시고, 멀리서 왔는데 헛걸음질하면 어떡하겠느냐고 염려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
"네, 그래서 이사님 내려오시면 저더러 모시고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정준수의 안색이 더욱 밝아졌다.
"그럼 지금 당장 가야지,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어서들 가자고!"
"네, 이사님."
그렇게 셋은 서락산을 향해 출발했다.
"정준수라고 합니다."
하수영을 만난 정준수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한 목례와 함께 공손히 명함을 내밀었다. 옆에서 눈치만 보던 이강식도 얼른 자신의 명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4.5억 달러의 외화를 가진 주식회사의 지분 100%를 가진 고객이다.
언제 이런 인연을 또 만나보겠는가.
하수영은 무심하게 명함을 받아 신상정보를 간단히 살핀 후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별거 아닌 간단한 동작에서도 느껴지는 느긋함에, 정준수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만 터뜨렸다.
'이분은 진짜다!'
돈 좀 만진다는 사람을 두루두루만나본 정준수는 하수영이 그저 단순한 바지사장 같은 존재가 아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여유로운 태도는 진짜만이 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서울 본사에서 이 외진 곳까지 내려오셨다고요.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고객님을 뵙기 위해서라면 제주도 백록담인들 당장 찾아뵙지 못하겠습니까."
정준수는 밝은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좋은 말만 쏟아냈다.
"그동안 저희 은행에서 고객님께 꼭 한 번 연락을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아, 제가 원래 모르는 번호 연락은 안 받는 주의라서요."
"그러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조금 더 적극적이고 투명하게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모두 제 불찰입니다."
'적극적이고 투명하게 연락을 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야?'
이강식은 속으로 다소 황당했지만, 그냥 정준수가 주워섬기는 대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4,500만 달러를 환전하셨다고요."
"네, 계약금으로 당장 나가야 할 돈은 확보를 해둬야 하니까요."
"아! 뭔가 큰 투자를 준비하고 계시는군요."
"투자야 늘 하고 있습니다. 실탄이 항상 부족할 뿐이죠. 이번은 다행히 운 좋게 실탄이 적당히 들어와서 한숨을 돌렸지만, 이런 운이 또 언제 들어올지는 모르겠네요."
정준수는 속으로 거듭 감탄했다.
4.5억 달러를 '적당히'라고 표현하다니, 과연!
사실 처음에는 그런 큰 부호가 이런 외진 시골에 산다고 했을 때는, 속으로 의아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벌가의 별장 같은 서락산저택의 규모를 보고, 그런 의아함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농산물 유통 사업을 크게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제 일에 필요해서 얼마 전 아는 분 회사를 겸사겸사 인수한 겁니다. 인수한 지 아직 몇 달도 안됐어요."
"아, 그러시군요."
성렬유통이 하수영에게 인수되면서 프라임유통컴퍼니로 상호를 개명한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정준수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감탄을 터뜨렸다.
"제 본업은 농사입니다."
"흙과 부대끼는 일을 하시는군요!"
농사라는 말에 이강식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정준수는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은 채 감탄만 거듭했다.
이강식은 그런 상사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지어서 어떻게 4억 5,000만 달러를 벌어? 이게 말이 돼?'
미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대농장주들도 그만한 현금을 만지기는 쉽지 않을 텐데.
'카길 같은 기업이라면 또 몰라.'
"주로 키우는 건 황금비단우산버섯이죠."
"황금비단우산버섯……."
정준수는 거기서 잠시 멈칫했다.
버섯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도 익히 잘 알고, 요리할 때 즐겨 먹는 식재료이기도 했다.
그가 멈칫한 것은, 근래 들어 황금비단우산버섯이 대대적으로 유명해진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황비버섯라면.
큼지막한 황금비단우산버섯 2개를 썰어 넣은 라면이 고작 천 원밖에 안 하는, 자취생을 위한 기적의 인스턴트 식품.
불현듯 그 이름이 머릿속에 연이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시 프라임컴퍼니에 유통하십니까?"
"맞습니다. 그 회사가 필요로 하는 황금비단우산버섯을 제가 전량 납품하고 있죠. 지금까지 납품한 양만 해도 2만 톤은 넘을 겁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 기적을 일궈내신 분이었군요! 저도 황비버섯라면을 엄청 좋아합니다! 요즘 일주일에 5개 이상씩 먹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알고 보니 제 버섯을 애용하시는 고객님이셨네."
이강식의 입도 쩍 벌어진 상태였다. 그도 황비버섯라면을 무척 애용하는 소비자였다.
"저도 황비버섯을 엄청 좋아합니다. 저는 하루에 2개씩 매일 먹고 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고맙습니다. 버섯이 부실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던가요?"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큼직하고 쫄깃한 버섯이 가득 들어 있어서 항상 대만족이었습니다!"
"제 가족도 황비버섯라면 없이는 못 삽니다. 특히 집사람이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버섯만 따로 추려내서 전골 요리 같은 것에 넣으면……."
박행식 지점장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가세했다가, 정준수와 이강식의 쏘는 듯한 눈빛에 멈칫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거야?'
'버섯만 빼서 다른 요리에 넣는 게 뭐 자랑이라고 그리 말하는 겁니까?'
그런 눈빛 공격이 사정없이 쏘아지자, 박행식은 경직된 채 식은땀만 흘렸다.
다행히 하수영이 그를 구제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뭐가 됐든 간에 제 버섯을 드신다면 소중한 소비자죠. 프라임컴퍼니에서도 처음부터 그런 거 다 생각하고 있었을걸요?"
"프라임…… 그러고 보니 두 회사가 이름이 몹시 비슷하군요?"
정준수는 그제야 그 사실에 주목했고, 이강식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프라임컴퍼니 전성렬 대표님과 제가 원래 동업을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이번에 그분이 라면 사업을 하시면서 서로 사업을 정리하게 된 거죠."
"정리했다는 게……."
"갈라섰다는 게 아니고, 그분은 원래 식품회사를 하고 싶어 하셨고, 저는 농사에 집중하고 싶었죠. 그래서 각자 갈 길을 가되, 겹치는 영역에서는 서로 협력하게 된 겁니다. 제가 생산하는 황금비단우산버섯은 프라임컴퍼니에서 독점매입권을 갖고 있죠."
"아, 그러시군요."
정준수는 머릿속이 맑게 갠 듯한 느낌이었다.
두 회사가 서로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럼 고객님께서는 황금비단우산버섯 한 종류만 집중적으로 파고드시는 건가요?"
"제일 많이 키우는 건 황금비단우산버섯이지만, 송이버섯과 송로버섯(트러플) 채취도 합니다. 이익률은 거기가 더 높은 편이죠."
"혹시 이번에 투자하신다는 사업이 어떤 건지 감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저희 은행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음, 혹시 담보대출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담보대출이요?"
설마 회사 주식을 담보로 잡겠다, 뭐 그런 것인가?
하지만 정준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 제가 청담동에 부동산 투자를 좀 하려고 하거든요. 상가 빌딩에 관심이 많아서요."
"부동산 투자 말씀입니까?"
정준수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고, 이강식은 속으로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으며, 박행식은 알겠다는 듯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한민국에서 역시 투자의 최종테크트리는 부동산이지. 암, 그렇고말고.'
가상화폐의 광풍 속에서 살아남아 엄청난 거액을 쥔 이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결국 강남 부동산이라고 하니, 이 정도면 말을 다 한 셈아닌가.
"4,500억 원만 가지고 투자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많이 모자라서요. 담보대출을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면 좀 더 많은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제가 신용이 될까요?"
"당장 알아보겠습니다만, 아마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다만 정부 규제가 있다 보니 그 안에서만 대출실행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저희 은행이 어찌할 수 없는, 금감원에서 시행되는 내용이니 양해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제가 그 정도도 모르지 않습니다."
"청담동에 부동산 투자를 한다면,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하실 생각이 신지……."
"제가 버는 돈 전부를 청담동에 올인할 겁니다. 아마 평생 동안이요."
"저, 전부를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한 채라도 더 많은 청담동 건물을 사들이는 게 제 꿈이거든요."
이강식은 혼자 당혹스러웠다.
언제는 농사에 열중한다는 사람이 가진 꿈이 뭐 저래?
"제가 농장일에 열중하는 것도 바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죠. 나중에는 제가 산 모든 건물 1층에 음식점을 내고, 제가 직접 키운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팔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네요. 아, 그러려면 요리도 따로 배워야 할까? 그러고 보니 지겹게 살아오면서 제대로 요리를 배워본 적은 없네."
하수영은 팔짱을 낀 채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실력 좋은 요리사들을 대거고용, 아니지, 아예 요리 전문아카데 미 같은 걸 따로 차려서 나만의 요리사들을 키워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아, 그럼 그 양성시설은 내 건물에 입주시키면 되겠군. 괜찮은데?"
"……."
그 자리에서 하수영의 혼잣말을 온전히 이해한 이는 없었다.
그나마 정준수 이사만 혼자서 조용히 '역시 나의 고객님.'이라며 감탄을 했을 뿐.
정준수는 부동산 투자에 관해 하수영과 자세한 상담을 했다.
대출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 이율은 얼마나 될지, 향후 부동산투자의 전망은 어떨지 등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정준수는 하수영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투자에 깊이 있는 식견과 통찰력을 가진 것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먼 길까지 오셨는데 빈손으로 돌려보내 드리기는 그렇고…… 이거라도 싸드릴게요."
"우와. 이거 최상급 송이버섯 아닙니까?"
"이 정도면 일본에서는 킬로당 백만 원은 가볍게 넘어서 팔리겠는데요. 이 비싼 걸……."
"가져가셔서 황비버섯라면에 같이 넣어서 드셔보세요. 향이 더해져서 더 좋은 맛이 날 겁니다."
하수영은 한 사람당 송이버섯을 포대로 10kg씩 넉넉하게 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