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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갓-95화 (95/1,270)

프랜차이즈 갓 095화

20장 어느 은행의 VIP(3)

"금융 상품 소개요?"

하수영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꺼낸 말이었다.

그 몇 초 안 되는 침묵이 지점장에게는 얼마나 고역과도 같은 시간이었는지 몰랐다.

지점장은 이마에서 땀이 뻘뻘 흐르는 것도 모른 채, 헤실헤실 웃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네! 안전한 자산을 관리하기 위한 최고의 투자 상품을 지금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마침 서울 본사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펀드매니저들이 미팅을 위해 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아하, 본사 인물이 오는 중이니 여기서 잠시 기다려 달라, 그런 의미인가요?"

"그,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 이렇게 가슴에 콕콕 박힐 수 있다니.

지점장은 말을 하면 할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돌아가려고 일어났던 하수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잠시 기다려 볼까요? 조금 심심했는데 잘됐네요."

아까는 산더미처럼 일이 쌓여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긴장감에 잠식당한 지점장은 기억이 헷갈렸다.

"어디 한번 소개해 보시죠. 그 종다는 금융 상품들."

"아, 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점장실을 나온 지점장은 허둥지 둥 상품 소개 카탈로그를 찾았다.

그러나 이내 절규해야 했다.

"왜, 왜 이런 것밖에 없어! 10만 원으로 1억 만들기, 1년 만에 2천만 원 만들기, 노후 변액연금 보장 상품, 왜 이런 것밖에 없느냐고!"

"지점장님, 우리는 서락군 지점이에요. 전국 순위 맨 뒤에서 오는 곳이라고요……."

"기업용 상품 소개 카탈로그는 왜한 장도 없는 거야!"

"그런 게 우리 지점에 왜 필요해요? 인쇄비 아깝게."

지점장은 마음이 급했다.

이런 식이어서야 소중한 고객의 마음을 어떻게 붙잡아 놓는단 말인가.

정준수 이사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은 걸릴 텐데.

지점장은 급한 대로 기업형 맞춤상품에 관한 정보를 프린터로 출력해서 긁어모았다.

멋들어진 카탈로그가 없으니 팩트로 승부를 볼 수밖에.

마음을 굳게 먹고 지점장실에 돌아왔을 때였다.

'통화 중이시군.'

지점장은 보이지 않게 가슴을 쓸어 내렸다.

고객이 통화 중이라면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

눈이 마주치자 하수영은 양해를 구한다는 시선을 보냈고, 지점장은 편히 통화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부디 통화가 길게 유지되길. 그리고 급한 일이 생겼다는 내용은 아니 길'

저 둘만 아니면 된다.

지점장은 서류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나가려고 했다. 통화 중인데 당연히 자리를 비켜줘야 하지 않는가.

그때 하수영이 '괜찮아요'라는 듯이 손짓을 보냈고, 그제야 지점장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점장은 서류를 검토하는 척하면서, 하수영의 통화 내용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아, 부사장님. 뭐라고요? 국자투에서 주문이 들어왔어요? 거기는 지질학 교수님 회사 아닌가요? 네, 그럼 그분이 직접 주문 넣으신 거겠네요? 주문량이 얼마… 네? 100kg이라고요?"

지점장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디 중요한 거래처에서 뭔지 모르지만 100kg을 주문한 모양이다. 아마도 지질학 교수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기관인 거 같은데.

'회사? 아니면 연구소?'

지질학 교수라고 하니 연구소가 맞겠지?

지점장은 '국자투'라는 단어를 제대로 기억해 두었다.

연구소 이름치고는 다소 이상하지만, 나중에 한번 찾아볼 생각이었다.

"100kg이면 1,500만 정도 불렀나요?"

'뭔지 모르지만 100kg에 1,500만 원인가 보군. 단가는 낮지 않은 거 같지만 주문량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

"그건 좀 곤란한데요. 아시잖아요. 물량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100kg 정도야 금방 준비할 수 있죠."

'역시 1,500만 원짜리 소소한 거래에 일일이 신경을 쓰긴 싫으셨던 거야. 통장에 4.5억 달러가 있으신 분이니 당연하지.'

"그렇죠. 시세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해요. 이미 팟디에 300 팔고 4.5받았잖아요. 여기서 더 물량을 풀면 곤란해질 수 있어요. 사치품의 가격, 가치 붕괴라는 건 정말 한순간에 찾아올 수 있거든요."

'팟디? 300 팔고 4.5? 혹시 4.5억달러를 말씀하시는 건가? 잠깐, 그럼 300톤에 4.5억 달러라는 말이야? 아니면 300이 컨테이너 개수를 말하는 건가?'

설마 kg을 말하는 것이라고는, 지점장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팟디에 우리 거 300 들어갔어요. 그 친구들도 당연히 자기들 물량 있을 거고, 여기에 국자투 지질학 교수한테 300을 팔면, 올해 중동 쪽 물량은 댐 터져요. 아시죠? 그런 부자들은 한번 흔하다는 이미지 박히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다시 안 찾는 거요."

내용은 잘 모르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해, 박행식 지점장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300을 파는 건 물량이 없어서 무리라 둘러대고, 대신 10을 우리가 그냥 선물로 하는 거로요. 네, 물량 부족으로 주문을 들어주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그림으로 갑시다. 그럼 지질학교수도 만족할 겁니다. 올해 물량넘치는 거 막을 수 있으니, 우리나 팟디도 이익이고요. 네, 그래요. 그럼 그렇게 전해줘요."

통화가 대충 끝난 모양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요."

"아닙니다.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소개해 주신다는 금융 상품이 그것들인가 보네요. 어디 한번 봅시다."

박행식은 카탈로그 인쇄물이 없다는 게 오늘처럼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VIP에게 소개할 만한 기업용 금융상품들을 겨우 찾아서 정리해 왔는 데, 카탈로그가 없다니!

'으윽, 멋들어지게 브리핑을 할 기회인데!'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 흐른다.

"이 상품을 말씀드리자면……."

"별로네요."

"이, 이 상품은……."

"이것도 별로네요."

"이 상품은 아마도 마음에 들어 하실……."

"별로입니다."

하수영은 대충 설명서를 훑어보고는 가차 없이 별로라는 판정을 내렸다.

박행식은 그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선을 긋는다는 생각은 절대 품지 않았다.

4.5억 달러를 운용하는 고객인데, 돈과 숫자를 꿰뚫어 보는 능력은 자신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을 테니까.

"S은행 기업용 금융 상품들이 다 별로네요. 원래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눈에 찰 만한 상품들이 이렇게나 없을 줄이야……."

"뭐더라? 전에 들어보니까 중견기업 기준으로 최대 0.2%까지 저금리로 빌려주는 상품이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요."

"예?"

박행식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0.2%라고? 그런 상품이 존재하기는 한가?

아무리 기업 우대상품이라 해도 1%대는 된다. 0.2%의 금리는 물가 상승률을 보면, 그냥 은행이 이자를 대납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제가 한두 다리 건너 아는 분이 1% 밑으로 대출을 받은 적이 있대요. S은행에서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거 정책 시행만료까지 이제 2년도 안 남았다고 해서, 별 의미는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저한테 대출 상품이 필요한건 아니니까요."

4.5억 달러나 있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

"혹시 달러를 환전하실 계획은 있으신지요? 만약 그러시다면 환전 수수료에서 최고의 우대를 해드리겠습니다."

"최고라면 0원인가요?"

"예?"

"최고의 우대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수수료를 전혀 안 받는 게 맞지 않나요?"

"무, 물론입니다!"

박행식은 또 한 번 자책했다.

그런 당연한 질문에 왜 자신은 또 순간 망설였는가.

'너무 없어 보이잖아! 행식아,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냐! 왜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거냐! 인마, S은행 서락군의 얼굴인 네가 이러면 어떡하냐!'

그까짓 무료 환전,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그런데 왜 자신은 덜컥 망설였는가.

상대는 4억 5,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거금의 부자이고, 자신은 고작 시골 지점장이라는 차이 때문에??

"그럼 일단 4,500만 달러 정도만 환전 부탁합니다."

"10%를 우선 환전하시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계약금 걸려면 10%는 일단 원화로 쥐고 있어야 할 테니까요. 대충 2주 정도 후에 나머지를 환전하면 딱 알맞을 거 같아요."

무슨 큰 사업을 하기에 계약금으로 450억 원이나 필요한 것인지. 남의 돈, 남의 사업이지만 박행식은 상상만으로도 괜히 흥분이 됐다.

'매물들 나오는 거 쓸어 담으려면 일단 10%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환전은 차차 하면 되고, 왠지 지금 환전하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박행식은 환전 절차에 필요한 서류를 챙기러 후다닥 사라졌고, 하수영은 혼자 남아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 생은 에너지, 반도체, 군수산업 같은 건 일절 안 하고 느긋하게 살기로 했지만…… 그래도 환전 차익 적당히 먹는 건 상관없겠지? 그 정도 가지고 뭐 별일 생기겠어?'

세계 경제와 산업을 한 손에 쥔 채 쥐락펴락하는 삶을 여러 번 살아봤다.

그리고 얻은 깨달음은, 큰 권력을 쥔다는 것은 큰 귀찮음이 뒤따른다는 것.

귀찮음으로 범벅이 된 삶을 너무 오래 살아봤기에, 이번만큼은 머리 안 아프게 조용히 살아갈 참이다.

바로 자가 소유의 빌딩에서 음식이나 파는, 한가로우면서도 여유로운 삶.

'주식 투자는 까딱 잘못하면 큰일난단 말이야. 건드리는 회사마다 대박이 나서 점상 릴레이 하면 난감하거든. 괜히 증권가 큰손 취급이라도 받게 되면 말이지. 하지만 환전 차익 정도는 괜찮을 거야.'

마이더스의 손이 이래서 문제다.

만지는 족족 무조건 황금이 돼버리고 마니까.

하수영이 주식 투자 같은 걸 섣불리 안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달러 가치가 오를 거 같긴 한데, 설마 2주 만에 두 배 이상으로 껑충 뛰어오르진 않을 거야. 그 정도로 달러가 갑자기 뛰어오르면 대공황 못지않은 혼란이 온다고.'

박행식 지점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수영은 느긋하게 환전에 필요한 서류에 서명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일은 여기 지점에서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고마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벌써 가시렵니까. 아직 더 소개해 드릴 좋은 상품들이 많이 있는 데……."

박행식 지점장이 안타까워하며 발을 구르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 이유를 아는 하수영은 모처럼 선심을 베풀기로 했다.

'이 사람, 빠릿빠릿한 것도 제법 마음에 드니까.'

"지금 본사에서 내려오는 분이 있다고 했죠?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 오셨는데 헛걸음하게 하는 건 저도 별로 마음이 안 좋네요. 여기가 제가 살고 있는 곳이니까 점장님이 이따가 그분 데리고 오세요."

"앗, 감사합니다."

박행식은 구원의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얼른 메모를 받아들었다.

"저희가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제가 어디 사는지는 알아두셔야 하잖아요. 그래야 제가 집에서 은행 업무를 보죠."

앞으로 은행 업무 볼 일 있으면 은행 쪽에서 집으로 찾아와야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박행식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물론입니다, 고객님.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곧장 방문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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