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92화
19장 둘째를 들이다(7)
하수영은 장승길 변호사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참고로 그는 정서희의 소개로 얼마 전 있었던 교통사고 처리를 위임받은 인물이었다.
-이야기가 우리 예상과는 좀 다르게 흘러가는데요?
"뭐가요?"
-마세라티 차주 부친 되는 분이 꼭 한 번 대표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자식 잘못 키운 죄를 통감한다며,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다고 하네요.
"그냥 입으로 싹 씻으려는 거 아닌가요?"
-그러기에는 조금 진실성이 있어 보입니다.
"음……."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요. 어떤 식으로 나오든 간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정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죠. 시간 한 번 잡아 봐요."
허락을 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장승길 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다.
-오늘도 괜찮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도 상관없다고 하네요.
"네?"
-장소만 알려주면 자기가 직접 가겠다고 합니다. 매우 적극적이네요. 어떻게 할까요?
하수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도 주소지를 노출하는 것은 조금…….
"상관없어요. 어차피 돈 조금만 쓰면 집 알아내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죠."
-알겠습니다. 그럼…….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승길 변호사로부터 톡 메시지가 왔다.
[출발했다고 합니다. 아마 1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시간에 맞춰서 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둘 다 차례로 도착했다. 장승길 변호사가 조금 더 일찍 서락읍에 도착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진구라고 합니다."
마세라티 차주의 부친, 하진구는 5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중후한 신사였다.
가볍고 까불거리는 느낌이 강했던 차주와는 완전히 상반된 느낌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수영입니다."
"네, 이번에 천억 원대 피해를 입으셨다고……."
"정확히는 우리 회사가 입은 피해죠. 저도 지금 그거 때문에 골치 아파졌어요."
하진구는 잔뜩 긴장해서 하수영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오너 분이 바로……."
"네, 접니다. 제가 농장주예요."
하수영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피해배상과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저와 하시면 됩니다. 최상급 골든 트러플 50kg이면 대충 천억 정도 나간다고 보시면 돼요."
"……."
하진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결심을 단단히 굳히는 듯이 보였다.
"하수영 사장님, 아들의 잘못은 제가 배상해야 마땅한 법이나 저한테는 천억 원이라는 큰돈을 변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죠. 성인 자녀의 잘못을 부모가 변제할 의무는 없죠.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인 걸요. 저도 굳이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당신이 먼저 찾아온 거 다, 하수영은 그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진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금 떴다.
주름진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 엄청 독한 결심을 품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그래도 평생 모은 재산이 220억 정도 됩니다."
"그러시군요."
"상가 빌딩 2채와 아파트 2채가 있는데, 이게 시가가 180억 정도 할 겁니다. 그리고 금융 재산이 약 40억 정도 됩니다."
"재산이 꽤 되시네요."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이 두 손으로 평생 쌓아 올린 재산입니다…"
말투가 가라앉는 것에서, 하진구의 감정이 아래로 격앙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노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자식 때문에 노모까지 고생시키는 것은, 도저히 제 양심상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바랍니다."
선처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장승길 변호사의 눈빛이 대번에 변했다. 하수영도 흥미진진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과연 이 50대 중년 신사는 무슨 선처를 바라고 왔을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만 제외하고 전부 드릴 테니, 그것으로 자식놈을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흐음……."
"가진 모든 걸 싹싹 긁어 바치고 선처를 구하는 게 도리에 맞겠지만, 제 노모를 생각해서 집 한 채만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장승길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220억에 달하는 재산 중 190억 원을 내놓을 테니, 아들을 봐달라는 요구.
'나쁠 것은 없다.'
어차피 하진구는 이 사건과 무관한 제삼자다.
뒷짐을 지고 모른 체하더라도, 하수영이 그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그가 먼저 찾아와서 전 재산의 대부분을 내놓을 테니 아들을 봐달라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 걸 그때그때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이 지경까지 오게 됐습니다. 모두 제 잘못이고 불찰입니다."
"그냥 평생 신불자로 살되 아버지 카드만 쓰게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저 죽으면 아들놈에게 다 갈 재산입니다."
"아, 거기까지 계산하신 거예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하진구 부부가 죽는다면 아들에게 재산이 상속된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니 결국 시간 문제다.
물론 아들이 훗날 가질 손주에게 상속하는 등 피해갈 여지는 많다.
그럼에도 하진구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만 빼고 전부 내놓겠다고 한다.
"아깝지 않으세요? 보통 사람은 그냥 나 몰라라 할 것 같은데."
"……서해호텔 만찬 기사를 봤습니다. 사장님이 거기에 골든 트러플을 제공하셨다고요."
"아하, 그렇구나."
하수영의 배경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미리 와서 납작 엎드려 선처를 바라는 것이다.
기본 심성이 선한 것도 있겠지만, 어설프게 대응했다가는 집안 자체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리라.
하수영은 재미있다는 미소를 한껏 지은 채 말했다.
"그럼 전 재산을 들어서 바치고 선처를 구하셔야지, 아파트 한 채를 쏙 빼놓는 건 뭔가요?"
"제발 부탁합니다. 제 노모가 편히 쉴 수 있게 집 하나만큼은 남겨 주십시오."
하진구는 거의 허리를 이상으로 바짝 숙이며 다시 한번 선처를 호소했다.
이리저리 비껴갈 방법도 많고, 변명거리도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입에 담지 않는다.
그저 선처를 호소할 뿐이다.
"대단하시네요. 계산해서 내린 결정이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내린 결정이든 간에 말이에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상가 빌딩이 두 채라고 했죠?"
"네, 청담동에 80억짜리 하나, 사당동에 40억짜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됐습니다. 그냥 80억짜리 상가 빌딩 하나 받는 걸로 끝내죠."
"예?"
하진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하수영을 바라봤다. 장승길 변호사도 당황해서 하수영과 하진구를 번갈아 쳐다봤다.
"같은 하씨라서 왠지 정감이 가서요. 그래서 선처를 좀 더 베풀어주고 싶네요."
"사, 사장님……."
"농담이고요, 먼저 달려와서 아들 대신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전 어차피 사당동 빌딩하고 아파트 같은 건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 깔끔하게 청담동 빌딩 하나만 받고 퉁 치렵니다."
"……사장님."
하진구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져간다.
그 모습에서 장승길은 그가 계산이 아니라 가슴으로 선처를 바라고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오신 김에 여기서 합의서 쓰고 가시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중에 크게 복 받으실 겁니다."
"나중에 뒤돌아서 호구 하나 물었다고 좋아라 뒷담화나 하지 마세요. 아셨죠?"
"저,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사장님 은혜를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겠습니다!"
합의서를 쓴 하진구는 몇 번이고 거듭해서 감사를 표하다가 거의 끌려 나가듯이 저택을 나섰다.
장승길 변호사가 그제야 물었다.
"너무 통이 크신 거 아닙니까? 저 사람이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노리고 온 거면……."
"제가 사람 한두 명 만나본 것도 아니고, 그냥 딱 보면 알아요. 아, 이 사람은 진짜 진심으로 선처를 바라고 왔구나 하고요."
이제 스무 살짜리가 그런 말을 하면 보통 웃기겠지만, 장승길은 하수영의 어투에서 범상치 않은 무게감을 읽었다.
왠지 하수영이라면 정말 자신보다 더 많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런 사람의 전 재산 뺏는 건 별로 재미도 없고, 사회적으로 유익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천억대 피해를 입으셨는데……."
"실제로 제가 본 피해는 십만 원도 안 되죠. 골든 트러플 50kg 캐는 데 들어간 비용은 딱 그 정도뿐이니까요."
"하지만 천억 원대 가치를 지닌 물건이잖습니까."
"에이, 그것도 팔아야 돈이죠."
하수영은 잠시 어깨를 으쓱한 뒤 덧붙였다.
"물론 부친도 아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으면 천억 원 전부 악착같이 다 받아냈을 겁니다."
장승길은 하수영이 오늘따라 유독달라 보였다.
* * *
하진구는 곧바로 하수영과 청담동상가빌딩 양도 계약을 체결했다.
피해배상 대물변제를 사유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계약이었다.
하수영이 부담해야 할 취득세, 등 기비용 등은 모두 하진구가 부담하기로 했다.
"사장님이 내셔야 할 종합부동산세는 앞으로 제가 죽을 때까지 대납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요? 그럴 바엔 차라리 천억을 내고 변제하는 게 나으실 텐데요?"
"……네?"
"청담동 최고의 건물주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그 종부세,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하진구는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했고, 하수영은 키득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아드님 민사책임은 이것으로 모두 끝내죠. 그게 원래 약속이었잖아요."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해서……."
"너무 길게 질질 끌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적당한 때 서로 돌아설줄도 알아야죠."
그렇게 하수영은 당당히 청담동에 자기만의 깃발을 꽂게 되었다.
등기권리증을 받아든 하수영은 감개무량해서 하염없이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드디어 청담동에 내 이름으로 된 건물이 생겼어……."
정확히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프라임유통컴퍼니 이름으로 등기를 했다. 법인 소유로 하는 편이 절세 및 유지관리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이 건물은 그가 얻은 2번째 빌딩이다.
다만 처음 매매 계약을 했던 상가 빌딩은 아직 잔금을 치르지 않아, 소유권이 전 주인 앞으로 되어 있는 상태다.
즉 두 번째로 얻은 건물이 그가 정식으로 소유권을 취득한 첫 청담동 빌딩인 셈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낡은 건물이지만, 뭐 어때."
80억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땅값이었다. 건물 자체의 가치는 거의 없었다.
40년 이상 된 오래된 빌딩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리모델링을 한 것도 12년이 훌쩍 넘었다고 했다.
등기권리증을 직접 전달한 장승길 변호사는 예상 이상으로 감격한 그를 보고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라면 하나로 몇 달간 수천억의 매출을 올린 회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사실 프라임컴퍼니에 비하면 80억짜리 상가 빌딩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건물이 확실히 오래되긴 했네요."
"네, 그렇습니다."
"임대차 계약이 가장 마지막에 만료되는 세입자가 언제죠?"
"두 달 뒤입니다. 세입자 전원이 만료 시기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전부 몰려 있어요."
"잘됐네요."
하수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계약 기간 끝나면 세입자 전부 내보낸 다음 허물고 새로 지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