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90화
19장 둘째를 들이다(5)
뭐? 농사지으려면 영어는 기본이라고?
정서희는 순간 어이가 없어 굳었으나,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발전한 농업 지식이나 기술은 미국에서 가장 먼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
그 동네는 경비행기로 농약을 뿌리는 나라인데.
에드거 이사도 깊이 공감한다는 듯이 한껏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수영을 치켜세웠다.
"맞습니다. 가장 진보한 농업 기술은 미국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보급되죠. 오죽하면 미국이 가진 진짜 큰 무기는 핵미사일이 아니라 옥수수라고 하겠습니까."
"동감합니다. 핵 따위로는 세계 패권을 차지하지 못해요. 옥수수로 먼저 패권을 제패한 다음에 핵을 그 위에 살포시 얹었을 뿐입니다. 원래 먹는 게 가장 기본이고, 무섭죠."
"하하, 농업에 종사하시는 분이라서 그런지 역시 말이 잘 통하는군요."
미팅 분위기는 한껏 좋아졌다.
"계약 내용 자체는 이미 다 협의가 되었습니다. 이제 최종적인 결정만 남았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죠."
하수영은 영어와 한국어로 된 계약서 내용을 번갈아 가며 빠르게 확인했다.
10장으로 된 계약서가 1초도 되지 않고 휙휙 넘어가자, 정서희는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다.
"저어, 지금 읽으시긴 한 거예요?"
"네, 다 읽었어요. 근데 저분, 혹시 한국어 할 줄 아나요?"
"모를 거예요, 아마. 한국에 들어온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시고요."
"뭐, 알아들어도 상관은 없지만요. 일단 그럼 우리말로 할게요."
"네."
하수영은 계약서를 빠르게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여기저기 조항 가지고 교묘하게 장난을 많이 쳤네요."
"네, 그렇죠? 제가 발견한 것만 해도 4개나 돼요."
"제가 발견한 건 9개인데."
"…어머, 정말요?"
정서희는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에 다 읽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 자신보다 더 많은 함정을 찾았다고?
"계약체결 이후 2개월 안에 골든 트러플 300kg을 준비해서 인도한다는 건데…… 함정 조항들을 보니까 우리가 그 기간 안에 골든 트러플을 인도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함정 조항들은 우리가 2개월이란 기간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의미가 있으니까요. 배상액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 판매자의 모든 자산에 대한 압류, 처분에 대해서 우선 자격을 가진다. 이건 골든 트러플 농장을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아무튼 다 봤습니다. 서명하지요."
"그래도 되나요?"
"지금 300kg 챙겨서 가져왔어요. 계약 체결하는 즉시 물량 넘기고, 완납확인서 받으면 됩니다."
본 계약서 내용을 확인하니, 팟디서플라이가 품은 진짜 목적이 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정서희가 슬쩍 에드거의 눈치를 살피고 말했다.
"애초에 4,500억 원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위약금을 세 배로 건 것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지게 만들기 위함이었어요. 1조 3,500억원의 위약금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까요."
"궁극적으로 농장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던 거죠. 골든 트러플 시장관리하는데 그만한 게 없잖아요. 독점. 아 참, 지금도 60% 이상은 팟디서플라이가 점유하고 있죠?"
"그럴 거예요. 팟디서플라이가 골든 트러플 농장을 공격적으로 사들이는 걸로 유명하긴 했죠."
"그럼 뭐 우리 농장도 노렸던 게 맞았네요. 계약서 보니까 모든 게 확실해지네. 어차피 오늘 거래 종료되니까 독소 조항이 있든 없든 상관없지만."
일시적 매매 거래이니만큼 물건을 주고 돈을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품질이나 물량에 하자가 없는 이상은.
계약불이행에 대한 책임은 프라임컴퍼니, 프라임유통컴퍼니가 연대해서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팟디서플라이는 혹시 선입금한 4억 5천만 달러를 날릴 경우까지도 꼼꼼히 대비했던 것이다.
"엄청 꼼꼼하게 계약서 썼네. 자기들 리스크는 거의 없네요. 그런데 우리가 선뜻 계약에 응했으면 당연히 자신이 있어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하수영의 말에 정서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 가지 방해공작을 준비하고 있었겠죠. 우리가 계약을 기간 내에 이행하지 못하게요. 실제로 팟디서 플라이가 그런 식으로 잡아먹은 농장도 있어요."
"역시 꼼꼼하네."
하수영은 계약서 검토를 완전히 마치고, 에드거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지금 바로 서명하겠습니다."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계약 당사자가 팟디서플라이, 프라임컴퍼니, 프라임유통컴퍼니, 이렇게 3자이다 보니 계약서도 3부였다.
하수영은 프라임유통컴퍼니 사장 자격으로 서명을 했고, 정서희와 에드거도 차례대로 서명을 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에드거는 양해를 구한 뒤 어딘가로 통화를 했다. 통화 내용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뒤 에드거는 한껏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품은 채 말했다.
"대금은 몇 분 안으로 곧 입금될 겁니다."
지잉. 지잉. 지잉. 지잉. 지잉…….
[10,000,000$ 입금 완료.]
[10,000,000$ 입금 완료.]
[10,000,000$ 입금 완료.]
[10,000,000$ 입금 완료.]
…….
스마트폰이 쉴 새 없이 진동하며, 입금이 완료되었다는 은행 앱 알람이 거듭해서 울려댔다.
정서희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에드거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여유 있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희 회사는 신속한 계약 이행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도 서명을 마치자마자 바로 입금하실 줄은……."
이런 퍼포먼스는 이미 사전에 입금준비를 다 마치고 대기한 상태에서 에드거의 콜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주 좋네요. 이렇게 빨리 돈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저희가 골든 트러플 물량수급이 급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서해호텔 마케미야 대표님 주최로 열린 파티 이야기는 저희도 아주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계약을 마무리했고 대금도 입금했으니, 이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소를 나누는 일만 남았다.
"한국에는 골든 트러플, 아니, 어떤 트러플도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자생하는 농장을 갖고 계신 분이 등장해서 놀라웠습니다."
"아마 제 농장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자생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의 유일한 트러플 생산지라 할 수 있죠."
그 말에 에드거의 눈빛이 사냥개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혹시 농장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건 기업 비밀이라서 곤란합니다. 하지만 납품은 문제없이 해낼테니 염려 마세요."
농장도 미처 확인하지 않은 채, 신생업체와 4억 5,000만 달러짜리 구매계약을 맺었다.
황비버섯라면이라는 확실한 담보가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농장 그 자체를 탐내서 달려든 것이리라.
"안살린 왕자님을 아시는지요?"
"알지요. 그날 만찬에 오신 분 중 한 명인데요."
"그분은 저희 팟디서플라이의 고객중 최고의 VIP이십니다. 그런 분이 저번에 저희 앞에서 한국산 골든 트러플을 놓고 극찬을 하셨습니다. 수많은 최상품 골든 트러플을 먹어봤지만, 한국산 최상품은 특히 풍미가 깊고 향이 강했다고요."
"하하, 저도 제 골든 트러플이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감히 자부하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연간 예상 생산량이 얼마나 되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음, 그것도 비밀이긴 합니다만… 아마 일 년에 600kg을 넘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번에 300kg을 납품하고 나면 다시 자라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그 말에 에드거의 얼굴에 어느 정도 안도의 빛이 스치는 게 보였다.
골든 트러플이 지나치게 시장에 많이 풀리면 가치가 떨어지고, 아랍왕족들은 더 이상 그 가격에 찾지 않을 것이다.
오직 왕족만을 위한 최상급 사치 식자재.
팟디서플라이 입장에서는 단순히 판매 수익을 올리는 것보다, 그 가치와 명예를 지키는 게 제일 중요했다.
팟디서플라이의 수입이 골든 트러플 하나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니까.
팟디서플라이는 거의 모든 종류의식자재를 국제적으로 유통하는 글로 벌 식품유통업체다.
골든 트러플은 원 오브 뎀,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온리원 아이템이기도 했다.
"매년 800kg에서 950kg 사이의 골는 트러플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그중 60% 이상의 물량을 공급하고 있지요. 전부 회사 소유의 자생지에서 생산된 것들입니다."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물량이 적네요."
"14억 달러가 넘는 시장이죠. 물론 국제적인 규모라고 보면 작아 보이지만, 단 한 종류의 식자재라는 점, 그리고 소비를 향유하는 계층이 3천명도 안 된다는 점에서는 매우 대단한 수치입니다."
"3천 명이나 되나요? 생각보다 많네요."
"그리고 그중 500kg 이상을 아부 다비 등 중동 지역에서 소비하고 있지요."
많아 봐야 950g이 팔리는데, 그중 500kg 이상이 중동에서 소비된다니.
괜히 왕족을 위한 사치품이 아니었다.
"마침 일 년 중 골든 트러플 수확량이 감소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문제없이 계약을 이행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감소하는 시기라고요?"
"모르셨습니까? 골든 트러플은 환절기 때 갑작스럽게 수확량이 감소합니다. 그래서 평소 하던 대로 수확량을 생각했다가 난처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
정서희는 살짝 놀란 눈으로 에드거와 하수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걸 노렸구나.'
수확량이 일시적으로 감소하는 시기.
그리고 이쪽은 처음으로 골든 트러플을 채취한 초보.
그런 계산이 있었기에 함정 조항으로 무장한 계약을 과감하게 들이댄 것인가?
에드거가 짓고 있는 사교적인 미소가 왠지 사악하게 느껴졌다.
"아, 물론입니다. 계약 이행은 염려 하지 마세요."
하수영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미스터 에드거. 이쪽으로 한번 오실까요?"
"창가 말입니까?"
"네, 에드거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에드거는 뭐지 하는 표정으로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왔다.
그는 줄을 지어 잔뜩 도열해 있는 커다란 검은 차량들을 볼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현금수송차량 같군요. 매우 단단해 보입니다."
"더 많은 현금을 실을 수 있도록 개량된 모델이죠."
"그 말씀을 제게 왜……?"
"저 안에 지금 4억 5,000만 달러가 실려 있습니다."
그 말에 에드거는 퍼뜩 놀라서 하수영을 바라봤다.
정서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잔뜩 지은 채 하수영의 뒤에 서 있었다.
"미스터 하, 설마?"
"최상급 골든 트러플 300kg은 문제없이 준비됐습니다. 거래를 오래 끌 필요가 있겠어요?"
"…….."
에드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어지간히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그는 평소의 사교적인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군요. 설마 계약하자마자 물량을 전부 쥐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액 선불로 입금한다는 말을 들어서, 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날짜 맞추려고 부지런히 캤죠."
하수영은 승자의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지금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