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84화
18장 미끼인 듯 미끼 아닌 미끼같은(5)
수신음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정서희는 당황했다.
"네? 뭐라고요?"
-롤스로이스하고 접촉 사고 났어요. 어디 보자…… 대충 5중 추돌인 거 같은데요? 아, 교통 상황 마비네. 여기 지금 화랑 거리 근처 지나고 있는데, 혹시 차 끌고 나오신 거면 이쪽으로 절대 오지 마세요.
"사장님? 사장님?"
-이거 내려야겠어요. 차주가 나오라고 손짓하네요. 일단 전화 끊습니다.
전화가 끊어졌고, 정서희는 황당한 표정으로 스마트폰 액정만 들여다봤다.
"누구야? 남자?"
정진석이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묘한 가시가 박힌 어조였다.
바로 오늘 정서희가 처리해야 하는, '몹시 귀찮은 일'의 주역이다.
"우리 회사 대주주, 주요 식자재를 납품하는 농장주이기도 해."
"목소리가 꽤 젊던데. 몇 살?"
"너보단 많아."
"서희 너보다는 적고?"
"나보다는 적지."
"그럼 다행이네."
정진석은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깍지 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벌써 아홉 번밖에 안 남았구나. 우리 데이트."
"아직도 아홉 번이나 남았다니, 끔찍하다."
"어땠어? 아직도 나한테 넘어올 마음이 안 생긴 거야?"
"내 마음이 어떨지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간 내 태도를 보면 모르겠니."
"그래서 아홉 번밖에 안 남은 게 안타까워. 스무 번이 아니라 서른 번으로 할 걸 그랬나 봐."
"스무 번 아니거든? 중간에 내가 아저씨와 딜한다고 몇 번 더 늘린건 생각도 안 하니?"
정진석은 그윽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겨우 몇 초의 응시만으로 뭇 여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시선.
하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는 정서희에게는 그저 징그럽기만 할 뿐이다.
"너, 왜 이렇게 느끼해졌어."
"서희야. 난 느끼해진 게 아니라 사랑을 알아버린 거야."
"그 대신 나는 징그러움을 알게 됐지.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아니야."
"내가 대체 어디가 부족한 건데?"
"부족한 건 없지. 객관적으로 넌 완벽하지."
외모? 큰 키와 좋은 신체 비율에, 배우를 해도 될 만큼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
지능? MIT를 갈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갈지 행복한 고민을 양손에 쥐고 있다.
재산? 일본의 대재벌 마케미야의 아들이다.
인성 역시 두말할 것 없고.
"네가 부족하다고 하는 년이 있으면 그년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미친년이지."
"왜 자학을 하는 거야. 내 가슴이다 아프게."
"난 여자가 아니잖아. 너한테는."
"여자 맞아. 그것도 유일한."
"넌 그럴지 몰라도."
정서희는 다소 애석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없어."
"……."
"남매 감정 이상 그런 거 일절 없어. 그러니까 우리 다시 예전처럼 사이좋은 남매로 돌아가자. 응?"
정서희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적어도 진심을 듬뿍 녹여냈다고 생각했다.
"미안한데, 난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번도 남매라 생각해 본 적없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처음 만난게 네가 네 살 때……."
"그래, 그때부터 단 한 번도."
이번에는 정서희가 말문이 막혔다.
이런 이야기는 그녀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네가 불편해할까 봐 남동생인 척연기한 거지. 알잖아? 나 머리 좀 똑똑한 거."
"야, 너……."
"남은 아홉 번은 그냥 없던 걸로 하자. 의무적으로 불러내는 것도 못할 짓인 거 같아.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흑역사가 될 거야."
"야, 그건……."
정서희는 말문이 막혔다.
마케미야가 아낌없이 사업에 지원을 하기로 내민 조건에 응한 것인지라, 자신이 오히려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나 먼저 갈게. 미안, 바래다줄 기분이 아니라서."
"……."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등을 돌리며 멀어진다.
작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서희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스마트폰을 꺼내 정진석에게 톡 메시지를 보냈다.
[화랑 거리 쪽 가지 마. 교통사고 나서 도로 마비임.]
읽음 표시는 바로 떴지만, 대답은 한참 후에나 돌아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다는 이야기가 그거야? 너무하다, 정말.]
[이래서 내가 더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지금 바래다주러 갈게. 차 돌리는 중이야.]
정서희는 톡 메시지를 슥 확인하고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이미 밖임. 누나 간다.]
그 뒤로 정진석이 톡 메시지이며 전화며 숱하게 연락이 왔지만, 정서희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녀는 하수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하수영은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고 때문에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화랑 거리 근처라고 했지? 어디 보자…… 여기서 걸어서 갈 수 있겠네."
인생을 담은 회사의 대주주가 근처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곤경에 빠졌다.
부사장으로서 당연히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가 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고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SNS에서 교통사고를 검색하니 수많은 사고 현장 사진과 함께 위치 등 자세한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대박, 화랑 거리 근처 지금 큰 사고 남!]
[최소 5중 추돌!]
[슈퍼카 5대와 고물 트럭 한 대가 서로 치고받고 싸움질했네.]
[ㅋㅋㅋㅋ 트럭 주인 어쩔.]
[와, 상상만 해도 개불쌍. ㅠㅠ 내가 트럭 차주였으면 한강 온도부터 체크했을 듯.]
[트럭 차주 넋 나간 표정 좀 봐. 옆에 여자 친구도 창백해져서 어쩔 줄 모르네.]
"여자 친구? 사장님이 여자 친구가 있었나?"
SNS 내용을 훑어보던 정서희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수영은 여자 친구가 없다. 있는데 굳이 비밀로 할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히 아까 통화할 때는 혼자인 것 같았는데…….
* * *
"마세라티가 최초 원인 제공자네요."
현장 통제를 위해 나온 경찰들 앞에서 하수영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사고 당시 영상을 보여주었다.
"여기 보시면 제가 신호를 보고 속도를 줄였어요. 근데 마세라티는 속도를 안 줄이고 그대로 주행, 아마 저를 쳐다보느라고 브레이크 밟는 걸 잊었나 봐요."
스마트폰 화면에는 마세라티가 그대로 달리다가 앞에 있던 노란 오픈카를 들이박는 모습이 생생히 찍히고 있었다.
"노란 페라리를 뒤에서 박았는데, 하필 재수 없게 페라리가 돌면서 벤틀리를 또 건드렸네요. 벤틀리가 회전하자 롤스로이스가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그 바람에 저는 롤스로이스와 충돌하게 된 거죠."
영상 속에서 하수영의 트럭은 신호 대기를 위해 속도를 줄이고 있었지만, 간격이 워낙 짧은 터라 롤스로이스의 급정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대로 살짝 박아버린 것이다.
"제 뒤에 오던 람보르기니 차주는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해서 박아버렸고, 사실 이런 거 예상해서 운전할 거면 F1 카레이서나 해야죠. 아무튼 람보르기니 뒤에 오던 포르쉐도 연달아 추돌했네요."
마세라티, 포르쉐, 페라리, 람보르기니, 벤틀리, 롤스로이스.
그리고 낡은 운송용 트럭 한 대.
다행인지 사망자나 중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제3자 입장에서는 실시간 SNS에 올리기에 딱 좋은 소잿거리 아닌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수영 외에 사고에 휘말린 일반 차량 주인은 없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아예 차를 뒤에 세워놓고 나와서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미 다중교통사고 때문에 교통이 통제된 상황이다 보니, 구경하기 딱 좋은 입장이기도 했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누가 원인인 거야?"
"최초 원인 제공은 마세라티 차주인 거 같은데?"
"그럼 마세라티 차주가 저거 다 물어줘야 하는 거야?"
"아니지. 교통사고에서 0% 무과실이란 것은 거의 흔치 않아. 마세라티 외에도 조금씩 과실을 짊어져야 할 수도 있어. 근데 다른 차주들은 괜찮은데, 저 트럭 차주가 문제네."
"불쌍하다. 어쩌다가 슈퍼카 6대 사이에 혼자 끼어서. 완전히 고래 6마리 사이에 낀 새우 한 마리잖아?"
"트럭 차주가 대물 책임 한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은 2억 정도 드니까, 과실 10%만 떠도 이번 인생은 그냥 포기해야 되겠네."
한명운 경관은 신기한 눈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봤다.
이제껏 봤던 그 어떤 블랙박스도 이렇게 선명한 영상 품질을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블랙박스도 한두 개가 아닌 듯, 트럭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점에서 찍힌 화면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슈퍼카 6대와 다중충돌사고에 휘말렸음에도 태연한 트럭차주의 태도가 신기했다.
"사제 블랙박스예요. 제가 직접 설치해서 달았죠. 시중 제품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해서요. 영상 품질 괜찮죠?"
"확실히 그러네요."
"여기 보세요. 이건 그냥 100% 마세라티 과실이에요. 신호 걸려서 속도 줄여야 하는데 혼자만 신나게 밟고 있잖아요?"
"영상만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세라티 차주가 왜 선생님 차량을 보고 있었죠? 신호 흐름 바뀌는 것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제 애마가 너무 부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일부러 손가락까지 들어올리면서 제 차를 부러워 라고요. 여기 그것도 영상이 있어요."
곧이어 나타난 화면에는 마세라티차주가 트럭 운전석 쪽을 바라보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리는 장면이 나타났다.
옆에서 영상을 보던 페라리 차주가 그걸 보고 한마디 했다.
"아, 딱 그거네. 트럭이 자기 옆에 달린다는 게 맘에 안 들어서 손가락 세웠는데, 상대가 반응 안 하니까 지가 더 부들부들해서 신호도 못 본 거. 마세라티 타는 애들 중에 이런 애들 많아요. 꼴에 자기도 슈퍼카탄다고. 2억도 안 하는 거 가지고."
람보르기니 차주도 한마디 했다.
"이거 완전히 자기 차가 맞긴 한 거야? 렌트나 리스 그런 거 아니야?"
벤틀리 차주인 점잖은 중년 신사도 한마디 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참. 차 가지고 도로에서 상대 무시하고 싸우고 드잡이질하고 교통사고 내고,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포르쉐 차주도 눈치 보며 조용히 한마디 했다.
"이거 제 과실은 없는 거죠? 엄마차 몰래 끌고 나온 거라서 전 큰일났어요. 과실이라도 있으면 맞아 죽어요."
"영상대로라면 선생님 과실은 없어 보입니다만, 자세한 건 보험사하고 상담하시죠. 제가 확답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포르쉐는 100% 무과실이니까 안심하세요. 제가 방금 판례 확인했는데 이런 경우는 과실 없어요."
"엇, 혹시 법조계에서 일하시는…… 아니구나."
포르쉐 차주는 입을 열려다가 하수영의 트럭을 보고 곧바로 다시 다물었다.
롤스로이스는 차주가 아니라 운전기사가 왔다.
"저어, 그럼 저희는 일단 가 봐도 되겠습니까? 저희 회장님께서 지금 급히 가셔야 해서요."
"가셔도 좋습니다만, 나중에 배상받으시려면……."
"아뇨, 배상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수리도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도 되죠, 경찰관님?"
롤스로이스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고, 하수영은 감탄하듯이 말했다.
"이야, 역시 차가 크면 사람의 배포도 크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
차량 크기로 따지면 하수영의 크기가 가장 크다.
그 점을 인지한 사고 차주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다물었다.
"채증은 모두 끝났으니, 선생님도 이제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영상원본은 잘 받았습니다."
"당신도 참 재수 없게 됐네요. 먹고사느라 바쁜데 차까지 망가졌으니. 이걸로 일단 배상금인 셈 쳐요. 사고 낸 친구한테 내가 이거까지 다 받아낼 테니까 걱정은 말고, 어서가 봐요."
페라리 차주가 선심을 쓴다는 듯이 지갑에서 천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 하수영에게 내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거 오천 배는 주셔야 겨우 본전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