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82화
18장 미끼인 듯 미끼 아닌 미끼같은(3)
"300㎏이나요? 그것도 한 곳에서요?"
대량 주문에 잔뜩 신이 난 전성렬과 달리, 정서희는 의아함을 품고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300kg이면 아마도 개인 주문 고객은 아니고 유통업체일 거 같은데, 그래도 4,500억 원은 될 텐데. 그 많은 돈을 무슨 수로 지급하죠?"
"업체 주문은 맞습니다. '팟디서플라이'라는 곳에서 발주했어요. 팟디서플라이, 혹시 들어봤습니까?"
전성렬이 가슴을 잔뜩 편 채 물었고, 정서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알죠. 알아주는 글로벌 식품유통업체잖아요. 값비싼 고급 식자재는 남김없이 취급하는, 왕족이나 대재벌들을 주로 상대하는 기업이죠."
"부사장, 알고 있었어요?"
"저, 이래 봬도 식품기업 딸이에요. 그런 유명 기업은 모를 수가 없죠."
전성렬은 뭔가 실망한 눈치였다.
정서희의 반응이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아서인가.
"팟디에서 발주가 온 거예요? 300kg이나요?"
"그래요. 매입가는 킬로그램당 18억으로 요구했습니다. 품질은 아예 묻지도 않더군요."
"그 가격에 맞는 품질을 알아서 준비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곳은 정말 고귀한 로열패밀리들만 상대하는 곳이라서요. 마인드 자체가 일반적인 기업하고는 전혀 달라요."
"이번에 서해호텔 파티가 거기까지 소문이 났나 봅니다. 이렇게 바로 입질이 오는 걸 보면 말이에요."
앞으로 올라갈 매출 덕분에 입이 귀에 걸린 전성렬과 달리, 정서희는 못내 찜찜한 표정이었다.
"구체적인 조건이 어떻게 되나요?"
"아, 그건……."
* * *
하수영은 천천히 서락읍 마을을 거닐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들이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피한다.
못 본 척 재빨리 다른 곳으로 빠질 심산이다.
하지만 하수영은 반갑다는 듯이 재빨리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아이고, 장서영 할머님.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죠?"
"그, 그랴. 서락산 총각. 오늘 날씨가 아주 좋구먼."
"할아버지께서는 지금 풀려 나셨죠? 불구속 기소라고 언뜻 들은 거 같은데요."
"어, 엉. 그렇게 됐네그랴. 서락산총각 자네가 힘써준 덕분에 편히 풀려나게 됐어. 고맙네."
그 순간 하수영이 가볍게 정색을 했다.
"할머니, 불구속 기소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거 아니에요? 검찰에서 충분히 설명을 해주지 않던가요? 아니면 할아버지가 대충대충 말을 하셨나요?"
"무, 무슨 소리여?"
"불구속 기소란 말이에요. 범죄 혐의는 있지만 증거 인멸이나 도주 염려가 없어서, 구치소에 잡아두고 재판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형사재판은 받는 거란 말이에요."
"그, 그런가? 그래도 그동안만이라도 편히 집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니죠. 검찰도 증거가 너무 명확하고 유죄 판결을 받을 자신이 있으니까 굳이 안 잡아두고 공판 절차에 들어가는 겁니다. 유죄 판결 떨어질 거면 차라리 그동안 구속되는 게 나아요."
"왜, 왜 그런가?"
"미결구금일수산입이라고 있어요. 예를 들어 유기징역 1년을 받았는데 재판받는 동안 6개월 정도 구금되어 있었다면, 6개월을 징역에서 까는 거죠. 이해되셨어요?"
할머니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이자 하수영은 다시금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왕 유죄 판결받을 거면 차라리 구속된 채로 재판받는 게 확정판결 떨어지고 나서 징역살이 시간 절약에는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 검찰이 할아버지 나중에 곤욕 좀 치러보라고 일부러 구속 안하는 거예요."
"그, 그런 건가?"
말을 대충 이해한 할머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할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수영에게 매달리듯 부탁했다.
"서락산 총각, 자네가 어떻게 탄원이라도 해주면 안 되겠나?"
"이미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한테 어떻게 제가 감히 압박넣을 수 있겠어요? 그러게 왜 남의 귀중한 자산은 훔쳐서는……."
그제야 부리나케 집을 향해 뛰어가는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보던 하수영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도 비슷했다.
주민들은 하수영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피했고, 오히려 하수영이 재빨리 다가가서 그들에게 공손히 안부를 물었다.
마을회관을 찾자, 안에서 도란도란 쉬고 있던 다섯 명의 노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맞이했다.
"서, 서락산 총각? 여기는 어쩐 일인가?"
"어쩐 일은요. 저도 이 마을 주민아닙니까. 물론 주민등록은 안 했지만, 마을발전기금으로 40억 원 넘게 냈다고요."
해맑게 웃는 표정과 달리, 그 말이 암시하는 어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하수영이 수십 명의 경호원을 고용해서 버섯 도둑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검찰에 넘긴 일은, 마을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마을 전체가 공범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하수영을 볼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건장한 경호원 수십 명을 뒤에 거느린 채 일일이 마을 가구 전체를 방문하며 구속 사실을 알린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노인들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참, 그나저나 박충원 이장님은 어디 가셨죠? 마을회관에 가면 보이실 줄 알았는데…"
"그, 그 친구는 이제 이장 아니여."
"암, 자기 스스로 이장 자리를 내놓았다."
"배임? 횡령? 아무튼, 머시기 그런 큰 도둑질을 했는데 어떻게 이장을 계속할 수 있나? 당연히 내려놨지."
"지금 아마 집에 있을걸세."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하수영은 깍듯이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리려다가, 문득 생각난 말을 남겼다.
"요즘 계절 바람이 바뀌었나 봐요.
거름 냄새가 안 나니까 살 만하고 좋더라고요."
"대밭집 노인네가 멍청하게 바람 방향도 모르고 거기에 거름을 놨었네! 자네가 그리 고역을 치르는 줄도 몰랐을 게야! 우리가 잘 설명해서 이제는 그런 일 없을 거네! 그러니 안심혀!"
"아, 조금 아쉽네요. 사실 한 번만 더 냄새가 풍기면 제가 사람을 써서 그 집에다가 거름을 1톤쯤 부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1, 1톤이나?"
"저는요,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의 100배 정도쯤 돌려받아야 반성하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물론 그 전에 스스로 변화시켰다면 다행입니다."
하수영은 벌벌 떠는 노인들을 뒤로한 채, 경쾌한 걸음으로 귀가했다.
"역시 군기 잡을 때가 제일 보람차다니까."
이제 더 이상 서락산의 보물농장을 탐내서 기웃거리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 주기적으로 순찰하면서 그때의 공포를 상기시켜 주는 것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아들아, 신어 권능은 요즘 잘 갈고닦고 있니?
"그럼요. 맑은 공기가 가득한 산의 정기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온몸에 받아들이며, 심신을 정갈히 다듬고 있습니다."
-기특한 것. 잘하고 있구나. 한 번 성과를 보여주겠느냐?
"알겠습니다."
하수영은 곧바로 바위를 향해 솟구치라는 간절함을 담아 명령했으나, 평소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청담동 건물주라는 세속적인 꿈이 너의 심신을 흐트러뜨린다고 생각되는데, 아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하루속히 제 세속적인 꿈을 이뤄서 저의 심신을 흐트러뜨리는 요인을 완전히 제거해야겠습니다. 그날이 과연 언제쯤 올까요? 10년? 20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렇게 긴 세월을 묵묵히 참고 기다릴 수는 없다!
"아니, 아버지? 영겁의 세월을 살아오신 분이 겨우 10년, 20년 가지고 긴 세월이라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
"거봐요, 할 말 없으시죠?"
-……정신 수양에나 열심히 정진하거라.
오늘도 성공적으로 아버지의 잔소리를 방어해냈다.
그런 뿌듯함을 안고, 하수영은 산비탈길을 올랐다.
황금비단우산버섯과 골든 트러플이든 포장 상자가 오늘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오늘도 전자노예들이 열일 했구나. 기특한 것들."
하수영은 전자노예들의 주거지를 찾았다.
혹시 배선에 문제가 생긴 곳은 없는지, 태양전지 상태는 괜찮은 건지, 미세제어부품 등에 고장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세밀하게 점검했다.
"아버지, 혹시 프랜차이즈 갓의 권능 중에 그런 건 없나요? 막 눈으로 한 번 슥 보기만 해도 사물의 본질이 보이고,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이 해석되고, 세상을 이룬 보이지 않는 법칙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런 능력이요."
-아니, 그런 사기적인 능력이 어디 있어?
"블록버스터 장르 같은 거 보면 자주 나오잖아요. 통찰력이니 통찰안이니 뭐 그런 그럴듯한 이름 붙어서요. 우주를 아우르는 프랜차이즈 갓인데 겨우 그런 능력이 없다고요?"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그냥 앉은 자리에서 우주를 360도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 바로 후계자감을 찾겠다!
은하신목은 발끈해서 반박했고, 하수영은 그 발끈하는 태도에서 평소와 다른 이질감을 감지했다.
"아버지, 있군요?"
-뭐, 뭐야?
"있잖아요. 그런 권능. 그런데 아직 후보자 신분에 불과한 저에게는 권능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조차 위험할 수 있기에 필사적으로 감추시는거 아니에요?"
-어, 없다! 그런 사기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면 주신 같은 걸 왜 해! 그냥 지점장들 다 없애 버리고 나 혼자 유일신 하면 되지!
고대 주신은 이른바 신들의 신이다.
법으로 치자면 주신은 헌법, 일반신들은 하위 법률 같은 존재.
법률이 헌법을 기반으로 하듯이, 신들의 권능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신이 하위 신들을 두는 것은, 혼자서 광활한 우주를 모두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은하신목이 가르친 적이 있었다.
"아닌데, 분명히 그런 능력이 있는데 지금 아버지가 당황하신 게 맞아요. 움직일 수 없는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즈, 증거?
"방금 아버지, '주신 같은 걸 왜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가니까 당황하신 거죠. 그렇게 주신이라는 단어에 넌덜머리를 느끼시는 분이."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무리 불러 봐도 은하신목은 더 이상 대답이 없다.
하수영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
"에이, 또 한나절 지나서 신어 권능에 문제가 생겼니 소통이 끊겼니 하면서 은근슬쩍 말 돌리시겠지. 하여튼 아버지도 너무 원 패턴이라니까."
하수영은 버섯을 수거해 가라고 프라임유통컴퍼니에 연락을 넣은 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청담동에 빌딩으로 나온 매물을 살피던 중, 그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아싸! 드디어 나왔구나!"
평소 청담동 지도와 로드뷰, 등기부 등을 들여다보며 관심을 두던 매물 중 꽤 괜찮은 물건이 나온 것이다.
"이 정도면 5티어급 매물이네. 1티어가 아닌 게 아쉽지만, 5티어라도 나온 게 어디야."
사실 1티어 매물은 원래 시장에 잘 안 나온다.
좋은 여자, 좋은 남자가 연애 시장에 FA(자유계약선수를 뜻하는 스포츠용어)로 잘 나오지 않는 것처럼.
괜히 1티어 매물이 아니다.
하수영은 얼른 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넥스트넷 포털 부동산사이트 보고 연락 드렸는데요. 매물번호 11310101번이요. 네, 청담동에 있는 80억짜리 구건물 상가요. 그거 물건 볼 수 있어요?"
-그럼요. 언제 오시겠어요?
"일단 가계약부터 걸죠."
-네?
"가계약부터 걸자고요. 빨리 건물 주 계좌번호 알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