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80화
18장 미끼인 듯 미끼 아닌 미끼같은(1)
"나한테도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아. 정말 고맙네, 하 사장."
만찬을 무사히 마친 전성렬은 평소보다 즐겁고, 들떠 보였다.
최상류층 인사들을 위한 파티를 주최한 경험이 그를 한 단계 성장시킨게 분명했다.
"좋은 경험을 하셨군요. 이전과는 표정이 달라지셨습니다."
"달라져? 어떻게?"
"이전에는 전형적인 소상공인의 표정이셨는데, 이제는 어엿한 기업가라는 느낌이 물씬 납니다. 앞으로 훌륭한 빨대져스의 일원이 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빨대져스?"
"재계에서 계열사의 여러 사장들을 각각 빨대에 비유한대요. 그래서 사장들 집단을 빨대져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뭐, 신종어죠."
"아무튼 재계 유행어라는 말이지? 기억해야겠어."
"그럼요. 앞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신종 유행어입니다. 인싸 기업가들만 쓰는 신조어죠."
전성렬은 한껏 진지하게 귀담아들었다.
재계에서 암암리에 돌아다니는 용어라면, 당연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으리라.
"이번에 일 제대로 벌였으니, 이제 다른 회사들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지 않겠지?"
"호적수로 인정할 수도 있고, 더 바짝 긴장해서 죽기 살기로 달려들 수도 있죠."
"하아, 공정한 경쟁에만 신경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자유시장경제에서 음모술수 같은 걸 왜 끼얹는지 모르겠어."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라서 그렇죠, 뭐. 우리나라만큼 기업 범죄에 관대한 곳이 또 없습니다."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한 건 우리가 라면 말고 다른 식품들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하면, 경쟁사들이 분명히 들고 일어날 거란 겁니다."
"겁주지 말게. 자네가 그리 말하면 긴장된단 말이야."
"바짝 긴장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나저나 자네도 그날 회장에 함께 했으면 좋았을걸. 뭐가 그리 급하다고 들어오지도 않고 바로 돌아갔나."
그날 하수영은 연회장은커녕 로비에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포장해서 가져온 골든 트러플도 호텔 직원들이 일일이 안으로 실어 날랐다.
"상류층 사람들하고 별로 얽히고 싶지 않아서요. 마케미야 대표님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들 그런 인맥은 만들지 못해서 혈안이 나 있는데, 자네는 참 별나 단 말이지."
"흙과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고 싶은 겁니다. 골치 아픈 세속의 갈등에서 비껴선 채 말이죠."
"그런 사람이 그렇게 청담동 빌딩, 빌딩 노래를 부르나?"
"원래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안살린 구단주님하고 인연을 트면 청담동 빌딩은 열 개도 더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안살린 구단주님이요?"
하수영이 의아한 눈으로 반문하자 전성렬은 신이 나서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LA다저스 구단주님 말이야."
"LA다저스 구단주는 블랙피스오일아니었나요?"
"그 블랙피스오일 최종 소유주가 바로 다저스 구단주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분이 바로 안살린 구단주님이야. 그날 만찬회에서 가장 돈이 많은 VIP라고."
"한 명 정도는 가장 돈이 많았겠죠. 한 명 정도는 가장 돈이 적었을 테고요.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 정도가 아닐세! 추정 자산이 무려 4조 달러가 넘는 분이라고, 4조 달러! 그것도 순수한 개인 자산이 말이야!"
"4조 달러요?"
이 말에는 하수영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전성렬은 은근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 그분이 독재자나 왕족을 통틀어 개인으로서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하더라고. 그런 분을 바로 몇 미터 앞에서 볼 수 있었다니까!"
"겨우 4조 달러로 세계 최고의 부자 행세를 할 수 있다니…… 지금 시대는 확실히 경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가 봅니다."
"뭐라고?"
"아, 농담이었어요."
하수영은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귀찮음이 묻어나는 태도에는 전성렬의 화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나저나 골든 트러플 구매 컨택같은 것은 없었나요? 아직 입질이 들어오기에는 너무 빠른가?"
"마케미야투자에 대신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들었네. 대표님이 골든 트러플 많이 좀 캐놔야 할 거라고 하셨지."
"마케미야투자요?"
"아무래도 귀빈들은 마케미야투자에 직접 말을 하는 게 편할 테니까 말이야."
"음, 역시 프라임유통컴퍼니 자격으로 직접 연결되기는 아직 요원하군요."
"상류층 사람들하고 깊이 얽히는 것은 사절이라면서?"
"개인적 인맥으로 얽히는 거야 사절이지만, 판매는 직판으로 해야 고객 관리가 되죠."
* * *
[딸, 이야기 좀 하자.]
부친으로부터 느닷없이 온 연락이었다.
하지만 정서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침내 올 게 왔다는 생각만이 들었으니까.
그녀는 의연하게 톡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예요. 끝나고 찾아갈게요.]
읽음 표시가 떴지만, 부친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딸의 답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정서희는 부친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내려두고, 부사장으로서의 업무에 몰두했다.
수도권 물량을 커버할 제2공장은 용수시에, 지방 물량을 생산하는 제 3공장은 안양시에 사이좋게 나눠서 짓기로 이미 확정이 났다.
경기도 지역 언론은 이수문 경기도 지사의 놀라운 활약 덕분에 공사비만 천억대가 넘어가는 두 개 공장을 유치할 수 있었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칭찬은 도지사가 듣네요."
지역 여론을 확인한 정서희가 쓴웃음을 짓자, 공장장이 얼른 대답했다.
"그래도 세제 혜택을 대폭 받기로 했으니 우리도 손해는 아닙니다, 부사장님."
"그런 거라도 없었으면 애초부터 용수시에 안 들어갔죠. 그나저나 다음 정권은 어떻게 되려나."
"총선, 대선은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공장 짓는 데 넉넉히 2년, 빠르게는 1년 반 잡고, 본격적인 가동 들어가서 물오르기 시작할 때가 바로 정권 허니문 기간하고 맞물리잖아요."
"아, 그렇군요."
"지금 경기도지사가 2선이었죠?"
"네, 그럴 겁니다."
"그분이 대권 욕심이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다음 대선에서 어떻게 되려나…"
"도지사 3선에 도전하지 않을까요? 현재 도정 운영에서 무리가 없이 매끄럽게 일하고 있고 하니, 도지사를 3선까지는 하고 대선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도지사는 3선까지 할 수 있으니 공장장의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서희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대권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운과 시류가 맞아떨어져야 되는 거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다음 대선에서 경쟁 주자들의 컨디션에 따라 도지사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요. 원체 대권 욕심이 많은 분이니……."
프라임컴퍼니가 경기도에 세우는 제2, 제3 공장부지에도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정서희는 그런 정치적 상황까지도 경영 변수에 넣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주 황비라면 판매 점유율이 어떻게 되죠?"
정서희의 물음에 영업부장이 얼른 대답했다.
"기뻐하십시오. 90.2%입니다. 드디어 시장 점유율 90%를 돌파했습니다."
"90%라……."
정서희는 뛸 듯이 기뻤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 라면이 최고입니다. 소비자들은 앞을 다투어 우리 라면만 찾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라면 시장을 완전히 제 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첫해에 시장 완전 제패라니.
정서희 역시 누구보다 황비버섯라 면의 가능성을 높게 쳤지만, 막상 결과물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었다.
'좋았어.'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부친 앞에서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았다.
* * *
"…어떻게 된 거냐?"
대면을 한 부친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툭 내뱉듯이 그렇게 물었다.
정서희는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뭐가요? 대뜸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요."
"프라임컴퍼니 말이다. 네가 다니는 회사…… 설마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지?"
"네, 저 거기 다녀요."
"직급이 부사장이라면서?"
"네,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어요. 대표님이 전문경영기법은 아직 서투르신 편이라서. 사내 서열 2위죠."
정재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묘한 좌절감이 묻어나는 태도에, 정서희는 희미한 쾌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황비버섯라면 때문에 우리 JM식품 라면들이 부진하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JM식품만 그런 게 아니죠. 국내모든 라면들이 산소마스크에 의지해서 겨우 숨을 쉬고 있죠."
"안 그래도 불경기인데 덕분에 경영난이 더 심해졌다. 프라임컴퍼니, 네 회사 때문에 말이야."
"저런, 걱정하지 마세요. 곧 산소호흡기 떼어드리고 편안히 가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서희야!"
"아버지는 지금 상황에 계속 라면으로 경쟁을 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보세요? JM식품이 황비버섯을 80g이나 넣은 라면을 천 원 밑으로 팔수 있어요?"
"……."
딸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며 묻자, 정재민은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이 알던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이 아닌 것만 같았다.
"회사 경영에 참여시켜 주지 않는다고, 네가 이렇게 칼을 들이댈 줄은 몰랐구나."
"분하신가요."
"아니, 놀라서 그런다. 너한테 이정도 능력이 있는 줄 알았으면 마냥 내치기만 하지 말 것을…… 그런 후회도 조금 드는구나."
정재민은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돌고 돌아서 결국 이 자리에 올거였다면…… 뭐하러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막았을까."
그제야 정서희도 한결 누그러진 표정과 음색으로 말했다.
"아버지 마음도 이해해요. 돈 많고 자상한 남편 만나서 걱정 없이 평생 호강이나 하면서 살길 바라셨죠. 그것 역시 행복한 삶 중 하나잖아요. 그런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서희야."
"단지 제가 원한 행복은 아니었던 거죠. 아버지가, 다른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인 거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행복은 지금 제가 걷는 길에 있어요."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종류의 행복을 찾는다.
정재민은 딸의 그런 결정에 미안함과 흐뭇함, 아쉬움 등 복잡한 감정을 연이어 느꼈다.
"많이 컸구나. 네가 그리 큰 걸 나만 모르고 있었어. 어리석은 애비다."
"아니에요. 이만큼 키워주신 것도 바로 아버지이신 걸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어요."
정재민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딸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바득바득쏘아붙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먼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이만큼이나 성장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사실 JM식품 생각도 하고 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정재민은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JM식품 라면사업부와 사업 제휴를 하고 싶어요."
"지금도 황비버섯라면은 잘 나가고 있는데, 굳이?"
"하지만 우리는 버섯의 영향력이 99%를 차지하고 있어요. 라면 자체는 크게 볼 것 없어요. 아무래도 특허 지난 레시피를 갖다가 쓰고 있으니까요."
정서희는 회심의 미소를 감춘 채 덧붙였다.
"JM식품에는 다양한 레시피로 만든 라면이 많이 있잖아요? 그 라면 들에 황비버섯을 첨가해서 팔면 더 뛰어난 판매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걸려라, 걸려. 아버지, 빨리 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