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78화
17장 새 친구를 찾아보자(3)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한국인은 아니었다.
선이 굵고 또렷한 이목구비는 아랍권 출신으로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한국어 발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유창했다.
그냥 한국어를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지질학자?'
하수영은 티가 나지 않게 힐끔 그의 손목을 살폈다.
내부의 톱니부품과 스프링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화려한 시계의자태가 눈길을 잡아끈다.
'저거 파텍필립 블루 세이버네. 요즘 지질학자들 벌이가 그렇게 좋은가?'
300만 달러(30억)가 넘어가는 시계도 차고 다닐 정도로?
시계뿐만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싼것들만 둘렀다.
'초청객 중 한 명인가 보네.'
지질학자라는 것은 아마도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 아니면 취미로 지질학을 전공한다든가.
하수영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만찬의 숨은 주인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골든 트러플운송을 맡은 운전기사일 뿐입니다."
"이 비싼 걸 기사 혼자 운반하게 둔다고? 어떤 간 큰 농장주가 그런 짓을 합니까? 당신이 농장주잖아. 맞지?"
그러고 보니 존대와 평대가 뒤섞여 있다.
"혹시 마케미야 대표님 파티에 초청 받은 분이신가요?"
"맞아. 마케미야, 좋은 친구지. 좋은 사업 파트너고요."
"한국어를 대단히 잘하시네요."
"지질학 연구하려면 여러 언어가 필요해. 그래서 배웠지. 한반도도 좋은 연구 주제거든. 사실 지역을 가리진 않아."
"한반도 지질 상태를 연구하는 데 한국어가 필요하다고요?"
"로마에 가려면 로마어를 할 줄 알아야 편하지. 아직 20개 국어밖에 못 하지만."
"20개 국어라니. 상상만 해도 아찔한데요."
이제야 아랍계로 보이는 남자가 어째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지 설명이 되었다.
그냥 이 남자는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것 같다.
"나, 골든 트러플에 흥미가 있어요. 이거 한국에서 난 품종 맞지?"
"예, 맞습니다."
어차피 마케미야가 파티를 빌어서 은근히 어필을 할 예정인지라, 하수영은 선선히 인정했다.
"당신이 정말 농장주 아니야?"
어떻게 할까.
하수영은 잠시 고민했다.
굳이 숨길 이유는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긴 싫었다.
'이번 생은 그냥 청담동이나 사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 반도체, 에너지, 군사 쪽과 안 얽히고.'
오늘 마케미야의 초청을 받을 정도면, 이 사람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녔을 게 틀림없다.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과 너무 깊이 얽히면 나중에 피곤한 일이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법칙이다.
그래서 전성렬, 정서희가 경영하는 주식회사라는 완충재를 내세운 것인데.
'뭐, 지질학자로 아주 유명한 사람인가?'
마케미야가 그저 돈이 많은지 그것 하나만 보고 초청객으로 선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촉망받는 천재 지질학자, 뭐 그런 것이겠지.
사실 이 정도면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하수영은 마음을 바꿔 사실대로 말했다.
"실은 제 농장에서 자생하는 품종이 맞습니다."
"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이 비싼 걸 트럭 기사 한 명한테만 맡겨서 운송을 시킬 리가 있나. 기사가 농장주가 아니고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남자는 히죽 웃었다.
"나, 골든 트러플 아주 좋아해요. 그거 없이는 밥을 못 먹을 정도입니다. 트러플을 듬뿍 넣은 고기 스튜는 최고의 간식이죠. 일할 때 두뇌활동을 활발하게 해줍니다."
'뭔가 이상한데?'
골든 트러플을 아주 좋아해서 이거 없이는 밥을 못 먹을 정도라고?
이 비싼 골든 트러플을 그렇게 자주 먹는단 말인가?
'지질학자가 그렇게 벌이가 좋은가? 아니면 집이 잘사나?'
"오늘 먹은 골든 트러플은 특히 향과 맛이 더 좋아요. 이렇게 맛있는 골든 트러플은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반도는 참 신기한 땅이에요. 이렇게 훌륭한 골든 트러플이 자생하고 있었으면서,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다니."
"아, 네. 그렇군요."
"골든 트러플 농장, 언제 한 번 방문할 수 있을까요? 지질학자로서 크게 흥미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농장 위치는 제가 비밀로 하고 있어서요. 동업자한테도 알리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남자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지만, 하수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골든 트러플이 자생하는 농장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데.
'그냥 엘릭서에 적셔서 뿌리면 아무 데서든 잘 자라는데. 그걸 들킬순 없잖아.'
전문가 앞에서 잘못 보였다가는 의심을 사기 쉽다.
"혹시 골든 트러플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프라임 컴퍼니에 말씀해 주십시오."
"맞다. 여태 내 이름을 말 안 했네. 음, 그냥 안살린이라고 불러요."
"저는 하수영이라고 합니다, 안살린 교수님."
지질학자라고 했으니까 교수라고 불러주는 게 맞으려나?
안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
"교수? 지금 나를 교수라고 불렀어요?"
"네, 그렇습니다만……."
뭐가 잘못된 건가?
혹시 아직 정식 교수로 임용되지는 않았다던가…….
"오, 좋아요. 교수라고 불린 게 얼마 만인지. 아무도 날 교수라고 불러주지 않았거든."
교수가 아닌 것 같지는 않은데?
근데 왜 교수라고 불러주지 않는다는 거지?
"앞으로도 날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어요. 교수인데 교수라고 불리지 못하는 게 얼마나 억울한지, 그 기분 알겠어요?"
어지간히도 교수라고 불리고 싶은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프로페서."
"나중에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해요."
안살린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에는 이름과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직업만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Geology professor」
안살린은 호텔로 돌아갔고, 혼자 남은 하수영은 명함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지질학 교수 맞는데, 왜 주변에서 교수라고 안 불러준다는 거지?"
만찬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전성렬과 정서희는 호텔을 떠나지 않고 연회장 바깥에서 혹시라도 부족한 점이 없는지 자세히 관찰했다.
호텔 오너 이선주 사장도 마찬가지로 연회장을 절대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골든 트러플의 위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19명의 초청객은 만찬 분위기 자체보다는 확실히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VIP 만찬을 수도 없이 치러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이선주가 덤덤하게 입을 열자 전성렬과 정서희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온갖 고급 요리를 내놓지만, 사실 누구도 요리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어요. 친목을 다지거나 정보를 교환하는 데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죠. 아니면 분위기 그 자체를 즐기거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군요."
"저 대단한 사람들이 지금 모두 요리에만 집중하고 있잖아요. 접시 비워지는 속도를 한번 봐봐요."
전성렬은 이선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납득하고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투입된 재룟값만 1,600억 원이 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사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이런 자리는 선뜻 열기 쉽지 않아요. 저분들도 그걸 알고 있는 거죠."
"그래도 예전에 어떤 호텔 상속녀는 결혼식 비용으로 1억 달러 이상도 쓰고 그랬다던데요."
"그거야 주고받은 예물 구입비도다 포함된 거죠. 하객들 밥값으로만 1억 달러를 쓰진 않았겠죠."
"마케미야 대표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여기서도 잘 보이네요."
정서희의 말에 이선주는 소리 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마케미야가 사비를 들여 골든 트러플을 구매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덧 만찬이 끝났다.
마케미야는 1kg 단위로 포장된 골든 트러플을 친구들에게 직접 나눠서 선물해 주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 친구들은 다들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일정이 빠듯한 이들은 곧바로 전용기를 타러 공항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호텔에서 하루 머무르기로 했으며, 절반 이상은 이틀을 더 머무르기로 했다.
"그래도 트러플을 넉넉하게 준비한 덕에 추가로 더 조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하 사장 얼굴 보기 미안했는데."
"따로 선물한 양까지 합치면 이미 2,100억 원이 훌쩍 넘어요."
"이거 너무 미안해서라도 앞으로 우리가 사업을 더 열심히 해야 되겠습니다."
만찬이 끝나자 전성렬은 비로소 한 시름 놓았다.
식품사업과 직접 연관된 이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자리다.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비로소 머리가 조금 아픈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참, 근데 안살린이라는 분은 누굽니까? 그 명단 가장 마지막에 있던, 지질학 공부하신다던 분이요."
"아, 그분……."
정서희는 말을 흐렸다. 전성렬 앞에서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기색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딘 이선주가 대신 나섰다.
"아, 안살린 구단주님이요? 저기 감색 정장을 입으신 키 크고 젊은 남자분 보이시죠? 바로 저분입니다."
"아, 저분이군요. 그런데 구단주님이라고요?"
"네, 여러 가지 직함이 있지만, 그래도 LA다저스 구단주라는 타이틀로 아주 유명하시죠."
"다저스 구단주라고요? 저렇게 젊은 분이요?"
전성렬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훤칠하고 아주 잘생긴 중동권 청년이었다.
저렇게 젊은 사람이 다저스 구단주라고?
"네, 지금은 미국에서 오래 거주하시는 거로 알아요. 오늘 모신 VIP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저분이 톱이라는 것은 다른 분들도 절대 이견이 없을 겁니다."
"그, 그렇게 부자입니까?"
전성렬은 스마트폰으로 얼른 포브스가 선정한 부자 순위를 확인했다.
하지만 10위권 안에 안살린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이선주가 그런 반응을 보고 웃었다.
"아쉽게도 저분은 포브스 순위에는 안 나와요."
"지질학자라서 그런가요? 기업가가 아니라서?"
"지질학?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안살린 구단주가 지질학에 흥미가 있었나……."
이선주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고, 정서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안살린 구단주님, 지질학 박사 학위도 갖고 계시잖아요. 대학에서 강의도 했었고, 가장 열성적으로 임하는 분야가 바로 지질학이실 걸요."
"그래요? 난 처음 듣는데, 왜 몰랐을까."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요. 그분은 주로 다른 타이틀로 유명하시잖아요. 다저스구단주라든가, 국제자원투자회사 오너라든가, 그런 것들요."
이선주는 알겠다는 듯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지질학자라, 그 말을 들으니 그분이 어떻게 그 많은 부를 쌓았는지 납득이 되네요. 지질학에 통달하셔서 그렇게 땅을 파는 족족 대박을 터뜨리신 거구나."
"그 이야기도 아주 유명했어요. 지금은 다른 것들 때문에 다 묻혔지만, 좋아하는 분야를 죽자고 팠을 뿐인데 그 덕분에 돈방석에 앉으셨죠."
"태어나실 때도 다이아몬드 포대기에 싸여서 나오셨는데, 파는 땅마다 그렇게 보물이 쏟아져 나오니. 재물운이라는 게 확실히 있나 봐요."
전성렬은 두 여자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분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지질학 연구를 하다가 대박을 냈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까?"
"부유한 집안이요?"
이선주는 잠시 쿡쿡 웃다가 말을 이었다.
"저분, 아랍에미리트 왕족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