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55화
12장 농장 주인과 40인의 도적(2)
부친, 정재민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서진이한테 들은 거냐?"
"오빠한테도 들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도 있고. 뭐 그러네요."
"네가 알 것 없는 일이다. 신경 쓰지 마라."
"그러시겠죠. 그냥 걱정돼서 여쭤봤어요."
정재민은 순간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보통 때라면 딸이라서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고 한 번쯤 속을 긁었을 아이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얌전히 물러나고 있다.
'혹시?'
드디어 사업가의 꿈을 포기하고, 얌전히 정진석한테 시집을 가기로 마음을 품은 것인가?
"전 올라갈게요. 씻어야겠어요."
"그래라."
정서희는 등을 돌리며 씩 하고 조소를 머금었다.
'어디 나중에 봐요, 아빠.'
부친은 아직도 자신이 프라임컴퍼니 부사장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법인등기부만 들춰봐도 알 수 있는 건데 말이다.
'설마 이미 이름 확인해 놓고 동명이인이라고 행복회로 돌리시는 건 아니겠지?'
사업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좋은 남편과 시댁 만나서 평생 호강이나 하며 살라던 부친.
자신이 부사장이라는 걸 알게 되면, 부친은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
정서희는 그 날이 너무 기대되었지만, 구태여 자기 손으로 앞당기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 숙성시킬수록 짜릿한 기분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 * *
하수영은 서락산 저택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태블릿 PC로 경제 기사를 탐독하는 것은 21세기 농장주에 있어 필수적인 하루 일과라고 할 수 있다.
[서해전자, 차세대 3나노 공정 개발 사실 공개!]
[반도체 신화, 또 한 번 도약하나?]
[TSMC, 세계 최초 2나노 공정 연구개발에 도전한다고 밝혀. 서해전자 의식한 레이스인가?]
"여기 애들은 무슨 반도체 만드는거 가지고 아직도 나노공정 단위 다툼이나 하는 수준이구나. 진짜 뭔가 획기적인 것은 전혀 없는 심심한 세상이네."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하수영은 눈으로 빠르게 기사들을 훑었다.
"무조건 가늘게만 만들어서 경쟁자를 이기자, 이런 아날로그식 마인드를 아직도 갖고 있다니. 혁신이 없어요, 혁신이. 쯧쯧."
하수영은 혀를 차며 스크롤을 내리다가 0.5초 정도 화면이 버벅거리자 짜증을 냈다.
"그러니까 컴퓨터 속도가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지. 막 실리콘에 에테르 같은 거 끼얹어서 만들 생각은 못 하는 거야?"
하수영은 투덜거리며 경제 기사를 마저 읽었다.
기사를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사이언스, 셀, 네이처에 차례로 들어가서 오늘 공개된 논문을 읽었다.
온갖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영어 논문이지만, 어린이 만화책을 읽듯이 하수영은 휘리릭 읽어 내려갔다.
"오늘도 특별한 건 안 보이는구나. 괴수도 없고, 외계인 침략도 없고, 내핵 붕괴 조짐도 없고, 지구 멸망분위기도 없고, 태양 폭발 조짐도 없고."
과학으로 위장한 마법 같은 신비하고도 수상한 힘 같은 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참 재미없고 심심한 세상이군."
하수영은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딱 내가 원하던 휴양지네. 만족이야, 아주 대만족."
하수영은 정문(대형 차량이 드나드는 용도다) 옆에 난 사람용 출입문을 열고 산에 들어섰다.
산비탈을 오른 하수영은 농장에 도착했고, 어제 남겨놓은 미끼가 예외없이 털린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 오늘도 털렸네요."
-말하지 않았느냐. 악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다. 따라서…….
"네, 네. 그래서 선은 집요하고 편집증적이어야 한다고 하셨죠. 저도 잘 압니다, 알아요."
이번에는 그렇게 살기 귀찮은 것뿐인데.
하수영은 작게 중얼거리며 컨테이 너에 들어가서 CCTV 영상을 모두 확보했다.
"아버지, 이제 슬슬 기계식 자동화재배로 전환을 할 생각인데요."
-자동화 재배법을 갖추면 수련을 할 시간이 늘어날 테니, 바람직한 일이로구나.
"쉽게 농사짓도록 응용할 수 있는 권능을 새로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여유가 나는 시간만큼 제가 부지런히 수련에 정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기특하구나. 내가 한번 찾아보마.
"네, 신어 같은 이상한 거 말고요. 편리하고 빠르게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걸로요. 이거 제가 먹고 사느라 바쁘니까 주신 되는 수련에 매달릴 수가 없잖아요."
-돈은 이미 충분히 벌지 않았니?
하수영은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벌기는요, 무슨. 완전 적자예요, 적자."
-그 정도로 힘든 거냐?
"힘든 건 아닌데 쥐꼬리만큼 모아 놓은 거 새로 회사 만든다고 다 들어갔어요. 지금 저는 빈털터리입니다."
-그러게 왜 산은 사가지고,
"아버지! 이 산이 대체 얼마나 한다고 그러세요!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한 채 값도 채 안 된다고요!"
-알았다, 알았어. 내가 한번 또 찾아보마.
"부탁드려요, 아버지."
채증을 위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
평소처럼 도둑들은 열린 쪽문을 통해 산으로 침투해서 남겨 두었던 미끼 버섯들을 모조리 채취해 갔다.
"그거 산짐승 먹으라고 남겨 둔 고수레 아닌데. 당신들 먹고 배 터져 죽으라고 남겨 둔 독이 든 미끼인데. 쯧쯧……."
혀를 차던 하수영은 불현듯 영상에서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웬 수레야?"
영상 속의 도둑들은 저마다 큼직한 손수레를 하나씩 끌고 산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퀴 자국이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산을 오른 도둑들은 일부러 남겨 둔 미끼 버섯들을 모두 따서 담았다.
당연히 수레 하나의 절반도 채우지 못할 정도의 양이었다.
겨우 저걸 담고자 수레를 가져올리가 없을 텐데.
"헐, 설마?"
하수영은 얼른 영상을 빠르게 돌렸다.
예상대로였다.
"들어온 도둑들은 있는데, 나간 도둑들은 없다?"
하수영은 저도 모르게 옆에 놓인 야구 배트를 움켜쥐었다.
거의 육신, 아니, 영혼에 각인된 반사본능이었다.
야구 배트가 눈에 띄지 않도록 태연히 컨테이너 밖으로 몸을 내민 하수영은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수영은 야구 배트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컨테이너를 나와 주변을 살폈다.
물론 어디선가 지켜볼 도둑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태도와 표정을 자연스럽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
멀리서 산새 울리는 소리만 나직하게 울렸다.
하수영은 침착함을 가장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수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 아무래도 악의 부지런함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습니다."
-도둑들이 어디 숨어 있는 거냐?
"네, 그런 것 같아요. 들어온 도둑은 있는데 나간 도둑은 없어요. 아무래도 제가 남겨 둔 미끼만으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돼버린 것 같아요."
-그럼 두들겨 잡아야지. 엘릭서를 꾸준히 섭취한 지금 너의 육신은 세계 격투기 챔피언도 아기 다루듯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릭서 섭취 게을리했는데. 그것도 엄청.
하지만 하수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깟 엘릭서로 강화된 육신 따위없어도, 이런 시골에 사는 잡도둑쯤이야…
* * *
다섯 명의 도둑들은 눈에 띄지 않는 울창한 숲속에 숨어서 농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품을 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하수영의 모습이 나타나자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잡았다.
조악한 망원경을 꺼내 하수영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폈다.
"맞네, 저놈. 서락산 문지기."
"왜 저놈 혼자만 올라온 거여? 농사지을 인부들은 죄다 어디 가 있고?"
"이제 곧 올라오겠지."
"아이고, 배고파. 뭐 좀 먹을 거 없나?"
"없어. 다 먹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넉넉히 가져올 걸 그랬나?"
"다음부터는 넉넉하게 가져오자고.
침낭이랑 이슬막이도 좀 챙기고, 밤새 찬이슬 맞았더니 몸이 오슬오슬떨리네."
"초행이니 서투른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다음부터는 단단히 챙기자구."
한 남자가 망원경으로 버섯 농장을 여기저기 살피다가 푸념을 내뱉었다.
"밭이 아주 깨끗한디? 버섯 자라날기미가 없네."
"그 버섯이 성장하는 데 보통 얼마나 걸리지?"
"일단 땅 위로 버섯 갓만 드러나면 한나절 만에도 완전히 성장하는 걸로 알어. 갓이 만들어지는 데까지가 시간이 꽤 걸리지, 아마?"
"그럼 참어. 언제 갓이 돋아날지 모르지 않나."
"아무리 봐도 갓이 튀어나올 기미가 없구먼. 오늘 안에 버섯이 자라나기는 하려나 모르겠네."
"이따 낮에 갓이 보이기만 해도 대성공이여. 다들 참고 기다리자구."
이윽고 하수영은 뭔가를 챙긴 뒤 컨테이너 문을 잠그고, 다시 산을 내려갔다.
"문지기 하는 거 보아하니 오늘은 갓이 안 돋아날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더 참고 버텨 보자구."
그러나 해가 정오에 걸리고, 오후가 되고, 저녁노을이 산 정상을 물들일 때에도 버섯은 자라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금비단우산버섯은 성장기 대부분을 땅에서 보낸다.
그러다가 머리 갓이 형성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성체로 순식간에 자라난다. 유년기가 매우 긴 매미와 비슷하다.
그 점을 아는 도둑들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지만, 끝내 황금비단우산버섯은 갓을 틔우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야간에 산을 내려와야 했다.
"이거 쓸데없이 헛고생했구먼."
"그러게 말이여. 오늘은 날짜가 안맞았나 보이."
그들은 투덜거리며 마을 회관을 찾았고, 박충원 이장은 다그치듯이 말했다.
"그렇다고 오늘 하루 공칠 거여?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버섯이가 자라나면 어쩌려고? 빨리 요기 대충하고 다시 산에 올라가서 대기 타고 있어."
"이장 어른,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온종일 산에 있었어요. 우리도 좀 쉽시다."
"잔말 말고 어서 올라가게! 어서!"
이장의 다그침을 이기지 못한 도둑들은 할 수 없이 대충 요기하고, 먹을 것과 침낭 등을 챙긴 뒤 다시 산을 올랐다.
이장의 말을 들은 보람은 있었다.
밤에 잠시 눈을 붙인 뒤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 수도 없이 많은 버섯이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다 뭐당가!"
"와, 버섯이 엄청 많네!"
한눈에 보기에도 입이 떡 벌어질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비단우산버섯이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던 버섯을 챙겼던 것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로세로 200미터가 넘는 밭이 버섯으로 가득 뒤덮여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도둑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이럴 때가 아닐세. 채취 인부들 오기 전에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그들은 허둥지둥 버섯을 채취해서 손수레에 가득 담았다.
수레뿐만이 아니라 가져온 배낭에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만큼 욱여넣듯이 담았다.
헐레벌떡 버섯을 챙겨 쪽문을 나서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 트레일러 행렬이 오는 게 보였다.
도둑들은 얼른 눈에 띄지 않게 샛길을 이용해서 마을로 돌아왔다.
"이장 어른, 이거 좀 봐요!"
눈을 비비며 일어난 박충원은 마을 청년들이 가져온 버섯을 보고 활짝웃었다.
"이거 봐. 고생한 보람이 있잖나. 다들 수고했으이."
"이장 어른, 그게 문제가 아녀요. 이거 좀 한번 봐봐요. 얼른."
"뭔데 그리 호들갑을 떠는 겨?"
이장은 한 청년이 내민 핸드폰에 담긴, 끝없이 펼쳐진 황금비단우산버섯 밭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이게 다 버섯이란 말인가?"
"진짜 어마어마하게 많어요. 우리가 가져온 건 티도 안 날 정도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