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45화
8장 라면 가게 한다면서요? (8)
"저와 계약해서 투자자가 되어주시겠다고요?"
-네, 그래요.
"100억 원 내고 5%밖에 못 가지시는 데도요?"
-나중에는 100억 원으로 1%도 못살 주식이 될 거 같아서요. 지금 꼭 들어가고 싶네요.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아직 법인 허가도 안나온 신생업체라고요."
-성공하셨잖아요. 황금비단우산버섯 재배단가 낮추기.
"……."
하수영은 잠시 침묵했다.
물론 의도적으로 계산된 침묵이었다.
상대로 하여금 이쪽의 의도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할 만큼.
"어떻게 아셨나요?"
'말려든다. 말려든다.'
-저도 나름 인맥이 있어서 여기저기 알아봤어요. 장효주 데리고 라면 CF 찍으셨다면서요? 황비버섯을 넣은 만 원짜리 라면을 천 원에 파신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설마 손해 보고 파시진 않을 테니까요.
"이야, 이거 졌습니다. 역시 JM식품 네트워크는 대단하군요."
-JM식품 네트워크가 아니에요. 제 인맥이죠. 당연히 투자 참여도 저 혼자 하는 거고요.
정서희는 얼른 변명처럼 덧붙였다.
JM식품 그룹 차원에서 나서는 일이라면 투자가 거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수영은 잠시 전성렬과 시선을 마주쳤다.
전성렬은 이제 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조용히 끄덕여 보였다.
"좋습니다. 언제 뭘까요?"
-지금 당장 괜찮으신가요?
"아, 그렇게 하시죠. 그럼 장소는……."
성렬유통 사무실 위치를 불러준 뒤 전화를 끊었다.
하수영은 기지개를 켜며 실소를 흘렸다.
"어지간히 급하기도 하네요."
"하 사장 자네 마음이 어느 순간 돌아설 줄 알고, 나 같아도 아마 그랬을 거야."
"세금계산서하고 거래내역서나 준비해 두죠. 그래도 100억을 넣는 투자자이신데, 황비버섯을 정말 싸게 재배한 건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서희는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말 그대로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준비해서 달려온 것이다.
하수영은 그녀에게 세금계산서 및 거래내역서를 전부 보여주었다.
"여길 보시면 제가 황비버섯을 생산하는데 들어간 원가가 g당 40원이 채 되지 않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서락산 매입자금을 반영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마저도 내려 갑니다."
정서희는 내역서 및 재무제표 등을 자세히 확인했다.
"프라임컴퍼니, 우리가 만드는 라면회사 법인명입니다. 프라임컴퍼니에는 g당 50원이라는 가격으로 납품할 예정이고요. 물론 그렇게 납품받은 버섯은 전량 라면 등 식품제조에만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프라임컴퍼니에서 라면 등 식품제조가 아니라 재유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황비버섯 시중가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군요."
"언젠가는 생버섯 시장도 진출할 수 있겠지만, 당장 중요한 건 라면 시장을 석권하는 일이니까요."
"소비자들이 라면을 사서 안의 버섯만 빼내서 조리하는 건 어떻게 막으실 건가요?"
날카로운 질문이지만, 이미 전성렬과 합의를 본 내용이기도 했다.
"그냥 놔둘 겁니다."
"저는 스프를 버섯과 함께 섞는 방법을 생각해 봤는데요. 그럼 버섯을 다른 용도로 쓰는 걸 막을 수 있잖아요."
"반대로 버섯을 목적으로 라면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죠. 당연히 라면 매출이 증가하고, 시장 점유율이 증가하게 됩니다."
"아,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네, 그래서 굳이 버섯에 다른 장난을 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 라면에서 버섯만 쏙 빼내서 다른 요리에 사용하는 분들도 결국 우리 라면을 사주시는 소비자분들이니까요."
"어차피 라면을 사면 버섯이 들어있는 걸 알고 있으니, 프리미엄을 얹은 되팔이가 성행할 수도 없을 테고요."
"그렇죠."
"생버섯 시장이 요동치긴 하겠네요."
"그거야 우리가 당장 알 바는 아니죠."
정서희는 하수영과 성렬유통, 그리고 프라임컴퍼니의 관계에 주목했다.
"송이버섯과 황비버섯은 순수하게 100% 하수영 사장님 소유로 재배되고 있는 거네요."
"맞습니다."
성렬유통이나 프라임컴퍼니는 버섯농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수영 사장님이 프라임컴퍼니의 최대주주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군요."
프라임컴퍼니의 지분 대부분이 하수영의 몫이 아닌 이상, 하수영이 버섯을 독점으로 넘길 이유가 없었다.
"할게요, 계약."
"여기 서명하시죠."
정서희는 투자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인감을 찍었다.
100억 원을 투자하는 대신 하수영몫의 지분 5%를 나눠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저는 투자자로서 경영에도 참여하고 싶은데요."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전문경영진이 많이 없어서요. 전성렬 사장님께서 혼자 고군분투하게 생기셨는데 부담을 덜어주시면 좋죠."
"하 사장님은요?"
"전 농장 운영하기에도 바쁩니다. 경영 같은 거에 나설 여유가 전혀 없어요."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정서희는 자신이 그동안 준비했던 사업계획서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일찍이 마케미야에게 보여주고 오케이를 얻어낸 플랜이기도 했다.
"이야, 대단합니다."
전성렬은 그 구체적인 디테일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정서희가 생각보다 사업 감각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는지도.
"괜찮은데요? 쓸 만합니다."
하수영이 미소를 띤 채 말하자 정서희는 속이 조금 뒤틀렸다.
이게 겨우 쓸 만한 거라고?
마케미야 아저씨도 그렇게 극찬을 했는데?
"이대로만 하면 큰 문제없이 사업을 안착시킬 수 있겠어요. 앞으로 두 분 공동사장님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하 사장님은요? 경영진에 이름도 안 올리실 건가요?"
직접 경영에 관여하지 않더라도 이름은 올릴 수 있다. 보통 규모 있는 기업의 초기 투자자들은 다 그렇게 한다.
"경영진에 이름 올리면 나중에 경영 실패 책임도 져야 하잖아요. 전 됐습니다. 그냥 주주로만 남지요. 아, 실무적인 간섭은 조금 할 수 있습니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정서희가 프라임컴퍼니 창업 멤버에 새로이 합류했다.
* * *
"다시 생각해 봐도 5%가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긴 해."
"그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사장님 지분도 아니고 제 지분에서 준 건데요, 뭐."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야. 자네는 65억이 아니라 황비버섯이라는 가장 큰 아이템을 투자하는 거 아닌가? 사실 그게 없으면 이 사업은 해보나 마나 한 거였지."
"JM식품 딸이라는 이름값 하나만으로도 5% 줄 만합니다. 적어도 기존 대기업들의 텃세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요."
"텃세 최소화?"
"아무런 뒷배경 없는 신생업체가 초반에 너무 잘나가면 당연히 기존대기업들의 견제를 받을 겁니다. 하지만 JM식품 딸이 투자자이자 사장으로 소속돼 있다면 어떨까요?"
"JM식품이 출자한 계열사로 오해 받을 수 있겠군."
"빅3 식품회사가 따로 딸을 통해 출자한 기업인데 허튼짓거리를 하기는 부담스럽죠. 4위 밑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전성렬은 유통시장 안에서 벌어지는 점유율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면서도 더러운지 알고 있기에, 하수영의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정서희라는 이름은 불필요한 바람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면서 프라임컴퍼니는 라면 사업 그 자체에만 온전히 역량을 집중 할 수 있을 터이고,
"좋은 게 좋은 겁니다. 정서희 사장 덕분에 더 빨리 순풍을 탈 수 있을 테니까요."
"내 지분도 아닌데 뭐. 알았어, 나도 그 이야기는 이제 더 안 하기로 하지."
"네, 괜히 정서희 사장하고 틀어지 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요. 앞으로 회사를 함께 꾸려 가실 분인데."
전성렬은 조금 긴장되었다.
유통업에 오래 종사하긴 했지만, 기껏해야 연 매출 90억짜리 농산물유통업체일 뿐이다.
프라임컴퍼니처럼 제대로 된 자체 공장까지 갖춘 식품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귀신이군. 내 마음이라도 읽었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전성렬은 가볍게 피식거리다가 은근한 웃음을 흘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나저나 회사가 나중에 규모도 커지고 업계 1위에 우뚝 서게 되면…… 정서희 사장하고 자네가 잘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가 왜요?"
"정서희 사장이 정말 완벽한 신붓감 아닌가? 식품 재벌가 딸에, 미모에, 지성까지. 어느 한 곳도 부족한 점이 없지 않나?"
"그러니까 제가 왜요?"
"뭔가, 정서희 사장 정도로도 자네 눈에 안 차는 건가?"
"오너와 경영진의 연애는 드라마에서나 보는 겁니다. 사업에 사심이 섞이게 되면 확장이 더뎌져요. 저는 하루빨리 꿈을 이루고 싶단 말입니다."
하수영은 조금의 이성적인 호감도 없어 보였다.
전성렬은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저런 완벽한 여자와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됐는데, 젊은 남자라면 설렘에 차 있어야 정상 아닌가?
'어지간히도 상처가 컸나 보군.'
저 젊은 나이에 실연의 상처를 얼마나 많이 겪었으면 저럴까.
이미 들은 이야기가 적지 않은지라, 전성렬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 * *
"오늘 미션은 이만 끝. 이제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됐어, 내가 혼자 갈 수 있어."
"이것도 데이트에 포함인 거야, 서희야."
정진석이 다정하게 부르자 정서희는 닭살이 돋는다는 듯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미안한데 나 지금 진짜 혼자 있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니 여기서 서로 각자 집에 가자. 응, 진석아?"
"숙녀분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아쉽지만 물러나야죠."
"너 먼저 들어가."
"알았어."
정진석은 어깨를 으쓱한 채 몸을 돌렸다.
우렁찬 엔진음을 퍼뜨리며 빨간 페라리가 멀어져갔다.
정서희는 그걸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몇 번 남았더라……."
한 16번 남았나?
까도 까도 까이지 않는 횟수에 정서희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냥 전부 없던 일로 해버려?'
사실 마케미야가 이렇다 할 만한 투자를 해준 건 아직 없다.
당장 프라임컴퍼니에 납입할 100억 원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 돈은 청담동 빌딩을 담보 잡아서 마련해도 된다.
막말로 마케미야의 도움 없이 프라임컴퍼니와 손을 잡고 나아가도 무방한 상황이다.
그녀는 이제라도 약속을 취소하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에이, 그래도 그럴 순 없지.'
하지만 곧 포기했다.
아직 받은 게 없다 해서 이미 한약속을 물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마케미야가 자신에게 갖는 신용을 떨어뜨리는 악수다.
'분명히 아버지가 견제 들어올 거야. 그걸 막아내려면 아저씨 도움도 필요하고, 참자, 서희야. 꾹 참고 버텨보자.'
마케미야와 한 약속을 이어나가는 것은 모든 면에서 장점을 갖는다.
징그러운 정진석과 아직 데이트를 더 해야 한다는 악몽만 빼면 말이다.
그녀는 곧바로 마케미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100억이 필요해요."
-저번 그 계좌로 보내면 되지?
"네,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