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32화
7장 나와 계약하지 않을래? (1)
김효산은 솔직히 조금 기대했다.
다케미야가 자신을 워낙 총애했으니, 호텔 부사장을 압박한 것에는 그런 지분도 일정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백두호텔 주방에서 조리에 실수를 한 게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서해호텔 입장에서는 다행이네요. 백두호텔 주방장이 실수한 거요."
"그렇지. 김 쉐프, 너무 고마워할 것은 없네."
"아닙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다 케미야 대표님."
"사실 자네 얼굴을 봐서라도 내가 손을 써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 있었어. 그런데 외부인인 내가 서해호텔내부 경영에 너무 간섭하는 것도 모양새가 별로지 않은가? 그래서 참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제가 나중에 백두호텔 주방장을 만나서 크게 밥이라도 사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래, 저게 마케미야 대표님의 진짜 모습이지.'
사람이 워낙 밝고 인품이 좋으며, 진미를 즐기고 남에게 베푸는 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종업원 중에는 종종 그를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마케미야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내키지 않는 분야에서는 단 1원의 돈도, 1초의 노력도 쓰지 않는다.
폐점한 레스토랑의 영업을 연장케하는 대가로 종업원 개인당 200만 원씩 팁을 쏘는 것도 그렇다.
그 정도는 베풀어야 연장 영업을 시켜도 가게나 직원들이 좋아할 거라는 계산 하에서 하는 것이다.
"우리 레스토랑이 실망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부디 기대해 주십시오."
"알지. 우리 김 쉐프 요리 먹고 한번도 아쉬워해 본 적이 없었지. 못먹어서 아쉬워해 본 적은 많았지만."
김효산은 가벼운 웃음을 남긴 채 물러갔고, 마케미야는 정서희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또 네 아빠랑 싸웠다며?"
"그새 거기까지 소문이 났어요? 하여튼 우리 아빠도 성인은 못 되시는거 같네요."
"이번에는 뭐 때문이야?"
"그것까진 아직 못 들으신 거예요, 아니면 저한테 한 번 더 체크 하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듣긴 했는데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청담동 빌딩 담보 잡고 돈 빌리려고 했다면서? 그거 진짜냐?"
"진짜예요."
마케미야는 작게 탄식을 터뜨렸다.
"맙소사."
그는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꾹 눌렀고, 정서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구공장 가져가고 싶으면 제값에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사서 가져가라고 하시니 별수 있나요?"
"그렇다고 빌딩을 담보로 돈을 빌려?"
"원래는 팔려고 부동산에 내놨어요. 그 정도 배수진은 쳐야 아버지가 구공장을 넘겨주실 것 같아서요. 근데 중간에 훼방 놓으신 바람에 무산됐죠. 포털 부동산 인기 매물로까지 올라갔었는데, 칫."
정서희가 부친과 다툰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JM식품이 구공장을 팔려고 내놨는 데, 정서희가 그걸 듣고 자신한테 달라며 떼를 쓴 것이다.
딸자식을 사업가로 만들 마음이 없었던 JM식품 정재민 사장은 당연히 반대했고,
-절대 안 돼! 정 공장이 갖고 싶으면 제값에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사 보거라! 하지만 넌 돈이 없지? 하하하하!
-좋아요. 물려주신 빌딩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해 올게요.
-안 돼!
대충 이렇게 된 상황이다.
마케미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조그만 공장 인수해서 어디에 쓰려고? 라면 만드는 공장인데 정작 만들 수 있는 라면이 있니?"
"없긴 왜 없어요. 우리 JM식품에도 종류가 많이 있잖아요."
"그거 레시피 가져다 쓰면 재민이가 당장 특허 침해로 소송 걸고 난리 칠걸?"
"특허 안 걸리는 거 갖다 쓸 건데요? 보호 기간 지난 레시피들로요."
"그 옛날 레시피로 만든 라면이 제대로 팔리기나 하겠냐?"
"그러면서 천천히 기술 개발도 하고 자리도 잡고 하는 거죠. 청담동빌딩 그거 팔면 사업 자금은 충분하니까요."
"솔직히 팔 생각 없잖냐. 빌딩 가지고 네 애비 협박하는 거지. 안 그래?"
마케미야가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자 내내 도도했던 정서희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녀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맞아요. 진짜 아저씨는 너무 제 맘을 잘 아셔. 귀신같아요."
"재민이한테는 일부러 말 안 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며느리 될 애한테 미리 잘 보여 둬야지, 굳이 나서서 점수를 잃을 필요는 없잖냐."
"대체 진석이와 아저씨 둘 중 어느 쪽이 제 바라기예요? 저도 조금 헷갈리네요."
"물론 둘 다지. 당연히 진석이가 좀 더 열렬하게 너를 바라보고 있고 말이다. 그리고 난 자상한 아버지로서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 그 소원이 내 소원과도 일치하니 금상첨화고."
"전 아무리 생각해도 진석이와 도저히 뽀뽀 못 해요. 상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려요."
"우리 진석이 정도면 어디 가서 인물 빠진단 소리는 절대 안 듣는데."
"애기 때부터 봐왔잖아요. 징그럽단 말이에요. 그냥 동생으로만 남겨두고 싶어요."
대화를 하는 사이 차례차례 코스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또 송이예요? 진짜 아저씨 송이 사랑은 여전하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서희도 구운 송이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고 있었다.
"아저씨,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 하세요."
"그렇게 티가 났냐?"
"아빠랑 작게 말다툼한 거 이야기 듣자고 저 부르신 거 아니잖아요. 바쁘신 분인 거 다 아는데."
"내가 가진 거에 비해서 많이 바쁘지가 않아요. 사실 일은 내 밑의 사람들이 알아서 하고 알아서 돈도 벌어다 주니까."
"좋겠다. 저도 꼭 그런 기업가가 되고 싶어요."
"지금도 그렇잖아.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청담동 빌딩과 거기 세입자들이 알아서 돈을 벌어다 주잖니?"
정서희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젓가락질에만 집중하는 걸 보면, 꽤 반발심이 든 게 틀림없어 보였다.
마케미야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업 계획서 같은 거 있냐?"
"있죠. 근데 왜요?"
"어디 한번 보자."
"기밀이라서 안 돼요."
"너무하다. 우리가 남이냐?"
"그 부분에선 남보다 더하죠. 제기획을 그대로 아빠한테 알려서 방해받게 만드실 거잖아요."
"절대 안 흘린다. 나도 신용으로 먹고사는 사업가야. 그 점에서는 내 말을 믿어도 좋다."
다소 진지한 말에 정서희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그래도 곤란해요."
"왜?"
"조언이나 투자해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보기만 하실 거라면 제가 뭐하러 보여드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대가를 제시하라는 말이다.
적어도 사업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는 몸에 배어 있는 듯해, 마케미야는 다소 뿌듯했다.
"기획이 마음에 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그전에 한번 검토를 하려는 거야. 나도 사업가이니까, 투자하기 전에 투자계획은 자세히 봐야 할 거 아니냐?"
"잠시만요."
정서희는 얼른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몇 번 터치한 뒤, 마케미야에게 넘겼다.
전자문서로 일목요연하게 요약된 기획서가 뜨자, 마케미야는 다소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봤다.
"준비는 아주 예전부터 했어요. 아버지 방해가 심해서 시작도 못 했을 뿐이죠."
"계획이 제법 튼튼한데…… 설마 이걸 전부 다 네가 만든 건 아니겠지?"
"기본적인 건 제가 구상했고,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친구들?"
"나중에 제 사업을 도와줄 친구들 이에요. 거기 맨 뒤에 이름하고 경력사항도 있어요."
마케미야는 그 말에 기획서 맨 뒷장으로 넘어갔다.
과연 스무 명이 넘어가는 조력자들의 이름과 간단한 인적사항 및 경력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식품 관련 교수에, 유명 쉐프에, 경제학자에, 현직 대기업 이사까지…… 정말 제대로 준비했구나. 이런 게 있으면서 왜 재민이한테 안보여줬니?"
"옛날에 한 번 큰 결심하고 보여드린 적 있는데 아예 보지도 않으시더라고요."
"……."
"물론 지금 그건 업데이트 엄청 된 거예요. 지금도 실시간으로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고요. 세상은 계속해서 변하잖아요?"
"하고많은 사업 중에 하필 식품회사를 하려는 이유는 뭐냐?"
"우리 집이 식품회사로 크게 컸잖아요. 갖고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좋은 무기인데 일단 그거부터 잘다듬어서 강화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그다음에 그걸 발판삼아 제가 하고 싶은 사업들을 추가하는 거죠."
마케미야는 어느덧 턱까지 괸 채 진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사업은 뭔데?"
"돈 많이 벌 수 있는 사업이요."
"푸하하하!"
"돈벌이만 될 수 있다면 다 할 거예요. 우유 배달부터 반도체 생산까지 장르와 분야를 안 가리고요. 식품회사부터 시작하려는 건 초기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서 그런 거고요. 또 자리만 제대로 잡으면 안정적인 캐시 카우도 되잖아요."
정서희는 도도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요."
"정답이다, 정답이야."
"마지막에 제가 한 말이요?"
"아니, 전부 다. 네가 한 말 전부 다 정답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정서희는 은근한 기대감에 찬 눈으로 주시했다.
마케미야는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며느리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약해지는가…… 며느리가 안 되려고 하는 며느리라서 그런 건가?'
노래 가사처럼 속으로 중얼거리던 마케미야는 한껏 표정을 엄하게 다 잡고 말했다.
"그래서 JM식품 구공장이 필요하다는 거구나."
"네, 그래요. 일단 공장 설비부터 안고 시작하면 시간을 대폭 줄을 수 있으니까요."
"근데 구공장은 이미 팔린 걸로 아는데."
"……네?"
"모 신생 업체에 40억인가에 팔린 걸로 안다. 라면 개발해서 팔아보려는 신생 업체라고 들었다. 재민이한테 들었어."
정서희는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안색이 어두워졌다.
심지어 어깨를 비틀거리며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겨우 40억이라니. 나쁜 아빠, 나한테는 190억을 불렀으면서…"
"사실 구공장이 너희 회사에는 계륵이었거든. 갖고 있자니 쓸데없는 애물단지고, 그렇다고 사갈 만한 회사는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 오죽하면 공장을 철거해 버리고 땅만 팔까 하는 생각도 했었단다. 아, 내가 이 얘기 했다는 건 비밀이다."
"……알았어요. 비밀 지킬게요."
정서희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사업가로 만들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였을 줄이야.
'남한테는 겨우 40억에 팔 거면서 나한테는 190억에도 안 판다고 그렇게 세게 나오시다니…….'
"너무 네 아빠 원망하지 마라. 재민이는 네가 좋은 남자 만나서 일걱정 돈 걱정 없이 돈 펑펑 쓰면서 근심 없는 인생을 살길 바래서 그러는 거야."
"진석이 같은 남자요?"
"그렇지, 진석이."
정서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마케미야는 지금 아들이 저 모습을 봤다면 또 결혼시켜달라고 오두방정을 떨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가 한껏 진지해졌다.
"서희야,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본론이다."
"네?"
"진석이랑 딱 스무 번만 데이트해라.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럼 내가 이 기획에 투자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