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31화
6장 얼마야? 얼마면 돼? (6)
"그간 쌓인 영세 납품업자의 설움을 해소할 시간이 됐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전성렬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반박하면서도, 입은 이미 귀에 걸려 있었다.
"바로 받으실 겁니까?"
"그럴 리가. 애 좀 태우고 난 다음에 받아야지."
"근데 어차피 서해호텔에 줄 물량은 없는데요. 1년치 물량을 마케미야 투자가 전부 사갔잖습니까?"
"그거야 자네가 부지런을 조금만 떨면 되지 않을까?"
"제가 여기서 얼마나 더 부지런을 떨라고요? 제 몸은 강철이 아니라고요."
"자네 간은 확실히 강철 맞던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전성렬은 스마트폰을 간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차분히 주시했다.
"다시 오겠지?"
"백 프로죠."
"언제 다시 올까?"
"글쎄요, 전 10분 안으로 한 번 더 올 거 같은데요. 따지고 보면 서해 호텔도 그동안 많이 참은 거잖아요.
이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았을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스마트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고, 전성렬은 가볍게 혀를 찼다.
"하 사장, 자네 귀신이구먼."
"이번에는 받아 보시죠. 너무 애태우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사람 지쳐요."
"받아야지. 몇 번만 더 울리고."
벨이 총 8번 정도가 울리고 난 다음에야 전성렬은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방금까지 활기에 젖어 있던 그의 목소리가 대번에 변했다.
술을 잔뜩 먹고 축 처진 사람의 것으로,
"네, 전성렬입니다."
-김효산입니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안 좋으신데…….
"오늘 쉬는 날이어서 어제 과음을 했더니 아직 몸이 무거워서 그래요."
-아, 그러신가요. 쉬는 날에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같은 자영업자한테 쉬는 날 안 쉬는 날 구분이 어디 있나요. 거래처 연락 오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달려가야지요, 허허."
전성렬은 사람 좋게 웃으며 은근슬쩍 '거래처'라는 단어를 끼워 넣었다.
-송이버섯 납품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 그건 저희가 곤란한데요. 이미 1년 치 물량을 미리 전부 사간 곳이 있어서요."
마케미야가 서해호텔 한식 레스토랑 VIP라고 했었지, 아마?
지금 통화 중인 이 총주방장은 그 VIP를 대상으로 송이버섯 요리를 듬뿍 만들어주었을 테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 인연이 얽히는 게 참 우습다.
전성렬은 자연스럽게 마이크 쪽을 손으로 막고, 하수영에게 재빨리 물었다.
"얼마까지 가능하지?"
"달에 100kg이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하수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전성렬은 만약 서해호텔과 거래를 한다면 송이버섯 생산을 얼마나 더 늘릴 수 있냐고 물은 것이고, 하수영은 월 100kg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전성렬은 다시 김효산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사장님, 우리 호텔이 필요로 하는 식자재를 성렬유통에 일괄적으로 맡겨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거래가 가능하실까요?
"예?"
순간 전성렬은 놀라서 하수영을 쳐다봤고, 눈이 마주친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제가 어찌 아나요.'
'서해호텔이 이렇게 쉽게 나온다고?'
'마케미야 사장의 이탈이 아쉬웠나 보죠.'
그렇게 입 모양으로 작게 대화를 나눈 뒤, 전성렬은 다시금 통화에 집중했다.
"아, 저기……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을 주셔서 순간 당황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지금 서해호텔에 일괄 납품하는 업체는 10년 이상 된 신뢰관계가 쌓인 것으로 아는데요."
-네, 그건 맞습니다.
"서해호텔 서울 일괄납품권을 저희 업체에 주신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아무래도 전 지점 통합 관리 측면에서는 잡음이 나오지 않을까요?"
-오해하고 계십니다. 서울 지점 일괄납품만을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서해호텔 국내 전 지점에 대한 식자재 일괄납품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순간 전성렬은 환호성을 지를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하수영도 귀를 쫑긋 세우고, 스피커 모드인 스마트폰을 향해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어, 좀,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큰 선물을 안겨주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는데요."
-조건을 거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신 작은 허락을 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락이요?"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필경 송이버섯 납품을 안정적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해달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리라.
-마케미야 사장님께 좋은 말씀 한 마디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전성렬은 황당해서 눈을 들어 하수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야?'
'글쎄요, 제가 아나요?'
'그 양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직접 물어보시죠.'
전성렬은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실례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사실은 우리 부사장님께서 마케미야 사장님께 혼이 좀 났습니다.
그리고 김효산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마케미야가 먼저 서해호텔 측에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확보한 송이버섯 물량을 구매할 의사가 있느냐고, 단 마케미야는 거기에 전제조건을 달았다.
-성렬유통의 진심 어린 허락을 정중히 받아낼 것.
서해호텔 부사장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마케미야가 성렬유통을 신경 써주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마케미야는 서해호텔 경영측에서도 유의해서 관리하는 최고급 VIP.
그런 이가 백두호텔로 이탈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보고받은 부사장은 분노했고, 식자재 납품업체는 곧바로 퇴출 조치를 받았다.
-……그렇게 된 겁니다.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전성렬은 솔직히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문득 마케미야를 만나 송이 일괄매매 거래를 체결할 때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혹시 조건만 맞으면 서해호텔 납품도 고려하실 수 있습니까?
-조건만 맞다면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김 실장. 서해호텔 경영에 간섭할 방법 한번 찾아봐.
호텔 부사장을 말 한 마디로 마음대로 움직이는 영향력도 놀랍지만, 자신을 위한 진심 어린 배려에 더 놀랐다.
보통 그런 큰 사업가들은 자신 같은 영세 자영업자들의 마음 따위는 특별히 고려하지 않을 텐데.
기분 나쁘지 않은 허탈함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마케미야 대표님께서 서해호텔을 정말 사랑하시나 봅니다."
당신 요리를 참 좋아하는가 보다, 라는 말을 전성렬은 정중히 돌려 말했다.
김효산도 아마 그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요리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시는 분이죠.
"저도 들었습니다. 마케미야 대표님이 서해호텔 지방 지점에 방문하실 때에는 총주방장님께서 손수 출장을 가신다고요."
-부끄럽습니다.
전성렬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업가라면 더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괄납품 제안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그리고 송이는…….
"마케미야 사장님께 드릴 물량 일부를 서해호텔에 직접 납품하면 될까요?"
-네, 대신 마케미야투자에 매도하는 물량에서 공제하는 식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케미야는 송이 대금을 이미 일시불로 지불했다.
그렇다면 서해호텔이 송이 대금을 마케미야한테 지불해야 하는 관계가 남는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죄송하지만 혹시 송이만큼은 일단 새벽에라도 받아 볼 수 있을까요?
"네, 지금 직원들에게 지시해서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밤 늦게라도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김효산은 거듭 고마워하면서 전화를 끊었고, 전성렬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씩 웃었다.
"이게 또 이런 식으로 잘 풀리는군."
"역시 돈이 좋아요, 그렇죠?"
"암, 그렇고말고.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면 돈이 부족한 건 아닌가 생각을 해보라는 말도 있죠."
하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나저나 영세 납품업체의 설움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너무 허무하게 날리신 거 아닌가요?"
"설움? 그건 이미 한 방에 다 풀렸는데?"
"고작 전 지점 일괄납품 선물 하나에요?"
"그런 큰 선물을 받았는데 뭐하러 꽁해 있나. 마케미야 사장도 뒷이야기 들으면 별로 기분이 안 좋을 거야. 자기가 기껏 나서서 중재해 줬는데 이러쿵저러쿵 욕심부린다고 말이야."
"역시 우리 전 사장님, 너무 사업가 스타일이셔."
김효산은 초조한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렸다.
밤 11시가 가까워질 무렵, 드디어 그가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총주방장님, 왔어요! 왔습니다! 성렬유통 트럭이에요!"
"내가 직접 간다!"
김효산은 부리나케 뛰어서 자재 창고로 향했다.
뒷문을 통해 들어온 커다란 트럭에서 스티로폼 박스가 한창 내려오고 있었다.
박스에 정갈히 누워 있는 송이들을 확인한 김효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해서 150kg입니다. 여기에 싸인 좀."
성렬유통 직원이 확인서를 내밀며 서명을 부탁했고, 자재구매직원이 나서서 서명을 했다.
"이걸로 송이 스튜를 만들 거야. 잣과 깨를 듬뿍 넣은 송이 죽도 만들 거고, 불에 살짝 구워 향을 살린 송이를 넣은 고기적도 만들 거야. 그리고 또……."
주방 직원은 김효산의 중얼거림을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무슨 송이버섯 들어왔다고 우리 총주방장님이 저렇게까지…….'
마케미야가 백두호텔에 체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김효산은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해서 도움을 청하기에도 면목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요리사일 뿐이니까.
감히 마케미야한테 무언가를 청탁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총주방장님! 지금 마케미야 사장님이 오셨어요!"
"뭐? 알았어! 바로 가지!"
지금 시각은 밤 11시.
한식 레스토랑은 이미 두 시간 전에 폐점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마케미야의 방문이라면 새벽 5시에도 문을 열어야 하는 게 서해호텔의 법이다.
김효산은 조리복을 재빨리 차려입은 뒤, 마케미야만을 위해 오픈한 한식 레스토랑 VIP룸을 찾았다.
마케미야는 혼자가 아니었다. 젊고 늘씬한 미인과 동석한 상태였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아, 조카 따님도 함께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이미 안면이 있는지라 정서희는 김효산한테 가볍게 목인사를 건넸다.
"송이는 잘 받았나?"
"네, 잘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내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몰라. 나 때문에 직원 몇몇이 날아갔다면서?"
"아닙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부사장한테는 좀 미안해서 말이야. 어쨌든 외부인이 사내 경영에 간섭한 거 아닌가."
"그러게요, 아저씨. 안 하신 짓을 다 하시고, 왜 그러신 거예요?"
김효산은 나름 긴장한 채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혹시 그간 쌓인 정 때문에 자신을 배려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마케미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며칠 전 백두호텔에서 송이 요리를 먹는데 소금간이 평소보다 더 세더라고. 그래서 호텔 다시 바꿨어."
"저런, 조리하다가 실수를 했나 보네요."
"백두가 서해를 넘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김효산은 묘한 허탈함을 느끼고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