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27화
6장 얼마야? 얼마면 돼? (2)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기수는 들떠있었다.
서해식품을 통해 하수영과 전성렬사이를 이간질하고, 송이버섯 일본 수출대행을 서해식품에 넘긴다.
그 대가로 자신은 서해식품에 경력 직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있으리라.
그런 전개를 기대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는데, 모든 것이 엇나갔다.
"102억이래, 102억."
"일 년치 전부 선금으로 받은 거 맞지?"
"우와. 정말 대단하다. 역시 일본부동산 재벌은 다르구나, 달라."
"자기 좋아하는 기호식품을 위해 102억 원을 한꺼번에 쓸 수 있다니…… 재벌들이란 도대체……!"
전성렬이 (아직 생산되지도 않은)일 년치 송이를 전부 마케미야투자에 팔아버린 것이다.
역대 송이 최고 경매낙찰가를 기준으로 팔았으니, 전성렬 입장에서는 이익을 극대화한 셈이다.
더군다나 경매 수수료나 수출 과정에 드는 비용도 전혀 없다.
마케미야투자는 송이 운반도 자기들이 한다고 했으니까.
덕분에 서해식품도, 박기수도 하루 아침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기수야, 어떻게 된 거야? 왜 아직도 전 사장이 우리한테 연락이 없는 거야?
"그게 좀. 하 사장이 아직 아무 말도 없네. 나도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어. 그렇다고 자세히 파고들었다가 괜히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까봐."
-뭐가 잘못된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박기수는 일단 친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을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딱 좋은 소재가 있었다.
"야, 그리고 이번에 큰 거 하나 터졌다."
-왜, 송이가 갑자기 비라도 맞았어?
"송이 이야기 아니야. 황비버섯 알지?"
-그걸 내가 왜 몰라. 황비버섯이 왜?
"이번에 우리 회사가 300톤이나 들여왔어."
-뭐? 300톤?
소매가가 kg당 10만 원이나 하는 놈이니,300톤이면 300억 원어치다.
물론 생산원가나 도매보다는 그보다 훨씬 떨어진다.
-그 많은 물량이 어디서…… 아, 혹시 그것도?
"어, 이것도 하수영 사장이 재배한 거야. 듣자니 생산원가를 엄청 절감했대. 경기도에 버섯농장을 만든 산이 있다더라고."
-혹시 송이도 거기에?
"그건 아닐 거다. 그 산은 황비버섯을 키우려고 얼마 전에 새로 사들인 산이래. 송이 키우는 산은 따로 있을 거야."
황금비단우산버섯은 요식업계에서 거의 모든 국물 요리에 사용하는 식재료다.
양식 기술이 개발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재배단가가 높아서 비싼 식자재에 속한다. (양식이 불가능한 송이만큼은 아니지만)
-하수영 사장, 혼자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
"맞을 거야. 직원을 쓰는 걸 본 적이 없어."
-혼자서 300톤이나 되는 황비버섯을 재배했다고? 잠깐, 산을 구입한 게 언제인데?
"잘 모르는데 한 달은 아직 안 된 거 같아."
-그거 재배단가 아직 꽤 나갈 텐데. 어떻게 개인이 300톤이나 되는 양을 재배했지? 야, 기수야. 너 그거 좀 한번 알아봐 줄 수 있어?
"알았어."
-한 달 만에 황비버섯 300톤이나 재배한 거면 이거 엄청 대단한 건데. 안 되겠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원재는 허둥지둥 통화를 마무리했다.
박기수는 일단 송이 일본 수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린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수영은 부동산중개사에게 연락해서 잔금일을 앞당겨 치르자고 했다.
매도인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지라, 이틀 만에 약속이 잡혔다.
"대리인이 대신 올 겁니다. 회장님은 이제 더 이상 서락산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하셔서요."
하수영을 대하는 중개사의 태도는 이전보다 한결 공손해져 있었다.
매도인의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것 때문에 수수료를 15%나 강제로 깎았던 것 덕분인가.
"잔금일이 아직 몇 달 남았는데 이렇게 일정을 조절하신 걸 보면 사업이 잘되시나 봅니다."
"요즘 큰돈을 만졌거든요. 그래서 여유가 생겼습니다."
중개사는 부러운 눈치였다.
7억이 넘는 거액을 한번에 지불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돈이 생긴 것일까.
"아, 이제 사무소 앞이라고 합니다."
중개사가 연락을 받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고, 하수영은 다소 지루해 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중개사가 대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대리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말쑥한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와 동행하고 있었다. 서류를 처리할 법무사인가?
대리인은 깜짝 놀랄 만큼의 미인이었다.
크고 늘씬한 체형에 또렷한 이목구비와 흰 피부, 적당한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가 단아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심지어 높은 힐까지 신으니, 웬만한 남자는 그 앞에서 압도당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제가 늦었지요."
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고왔다.
하수영도 일어서서 가볍게 인사했다.
"저도 조금 전에 왔습니다. 어서 마무리하지요."
"네, 그래요."
둘은 자리에 앉았고, 하수영은 그녀의 신분증과 위임장을 남김없이 확인했다.
'그 할머니 손녀였네. 정서희?'
신원을 확인한 하수영은 정서희와 함께 중개사에게 인감을 내밀었고, 중개사는 필요한 서류마다 인감을 찍어나갔다.
하수영의 법무사, 그리고 정서희의 법무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도 옆에서 거들었다.
할 게 없어진 하수영은 대리인 정서희에게 가벼운 잡담을 시도했다.
"근데 매도인께서 법무사를 데리고 오실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변호사님이에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체크할 게 있을까 해서 함께 왔어요."
"아, 네."
"할머니가 그 산을 처리 못 해서 골치 아파하셨는데 덕분에 잘 해결됐어요. 속앓이도 떨치시고 나니까 요즘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다행이네요. 저도 버섯 잘 키우고 있다고 나중에 전해 주세요. 산의지력이 좋아서 버섯이 아주 잘 자라 네요."
"어떤 버섯을 키우시는데요?"
정서희도 딱히 큰 관심이 있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른 이들은 서류 작업에 한 창이고, 멀뚱히 앉아 있기 뭐해서 매수인과 시간이나 때우는 것이다.
하수영과 마찬가지로,
"황금비단우산버섯을 키웁니다. 이 버섯을 넣은 라면을 만들어보려고요. 잘 팔릴 거 같거든요."
"아, 그 버섯 저도 잘 알아요. 근데 그거 넣으면 너무 비싸지 않을까요? 소비자들이 사먹기에는 부담될 텐데요. 저희 집도 라면 가게 하거든요."
라면 이야기가 나오자 정서희가 눈빛이 한결 생기를 띠었다.
집이 라면 가게를 한다는 이야기에 하수영도 조금은 집중력이 생겼다.
"아, 그래요? 사실 저도 라면집 하나 차리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아하, 황비버섯을 직접 키워서 요리에 쓰려고 하시는군요."
"네, 비싼 식자재는 아무래도 사오는 것보다 직접 키워서 조달하는 게 단가에 도움이 되잖아요."
"라면 가게를 얼마나 크게 하시려고 산까지 사셔서 버섯을 키우시는 거예요?"
"나중에는 황비버섯 말고 다른 농산물도 다양하게 키워보려고요. 산은 그래서 산 겁니다."
건조하던 대화에 라면 가게라는 주제가 삽입되자 한결 생동감을 띠었다.
어느덧 서류 작업이 다 끝났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가게 오픈하시면 알려주세요. 꼭 찾아가서 맛보고 싶어요."
저건 예의상 하는 말이다.
하수영도 물론 알고 있었다. 명함이나 연락처를 건네지 않았으니..
매수인과 매도인(대리인)이 서류작업을 하는 동안 심심풀이로 나눈 담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보기 드문 미인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네, 나중에는 전국 어디에서든 제 라면집에서 파는 라면을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프랜차이즈까지 생각하시나 보네요. 사업 잘되시길 빌어요."
잔금은 문제없이 치렀고, 소유권이 완전히 넘어왔다.
하수영은 법무사에게 소유권이전등기 작업을 위임하고 돌아왔다.
"이제 서락산이 완전히 내 것이 됐군."
* * *
하수영과 전성렬은 1차로 채취한 황금비단우산버섯 300톤을 시중에 팔기로 했다.
전성렬이 가진 소매 납품라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물량이었기에, 2차 도매라인으로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아직 식품회사를 차린 것도 아니고, 오래 갖고 있어봐야 품질만 떨어지고 보관비용만 들어요. 빨리빨리 팔아버리죠."
하수영의 의견이었고, 전성렬도 군말 없이 따랐다.
현재까지 팔린 물량은 20톤 정도, 가격은 5.5억 원이었다. 유통단계를 거치다 보면 최종 소매가는 20억원 정도 될 것이다.
유통단계가 하나씩 증가할 때마다 소매가도 덩달아 증가하는 법이니.
"물량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잘 안 팔리는 거 같아."
"그렇다고 가격을 굳이 떨어뜨릴 필요는 없습니다. 해외 수출도 한번 알아보세요. 마케미야투자에서 황비버섯은 안 산다고 하던가요?"
"슬쩍 물어봤는데 전혀 관심이 없더군."
"수출이 아니라 송이에만 관심이 있는 게 정말이네요. 하긴, 그러니까 일 년치 대금을 선불로 쿨하게 줬겠죠. 그것도 경매 최고 낙찰가 기준으로, 이래서 손 큰 재벌이 좋다니까."
"자네도 나중에 손 큰 재벌이 될 거야. 난 확신하네."
"전 재벌보다는 건물주가 되고 싶은데요. 재벌은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혀야 해서 별로입니다. 이제 그런 거 안하려고요."
"꼭 마치 해본 것처럼 말하는군."
"뭐, 상상이나 꿈에서는 누구나 다 재벌이고 왕이고 영웅이 될 수 있잖아요."
하수영은 천연덕스럽게 흘려 넘겼다.
"서해호텔에서는 연락 없어요?"
"거기는 갑자기 왜 궁금한가?"
"그냥요. 밑의 직원이 식자재 납품업체 가지고 재미 보다가 VIP 손님 날려 먹었으니, 분위기가 어떨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안 그래도 총주방장인가 하는 친구가 요즘 자꾸 연락해서 귀찮게 하고 있네."
"뭐라고 하셨어요?"
"우리 송이는 백두호텔 납품물량말고 일본에 전량 다 팔기로 했다니까 상심이 크더군. 그 친구는 좀 안됐어. 자기가 잘못한 건 전혀 없는데."
"사업이라는 게 그렇죠. 모두가 다 잘못했거나, 모두가 다 잘못이 없거나. 누군 잘못했고 누구는 잘못 없고,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냥 이해관계가 합치하거나 충돌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명언이야. 나도 새겨둬야겠어."
"인수할 만한 식품회사는 좀 알아보셨어요?"
불현듯 전성렬은 하수영이 자신에게 '하문'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최근 들어 둘 사이의 기류는 그랬다.
하수영이 자신에게 큰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그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발 벗고 뛰어다니는 형태.
얼마 전에는 회사 소유 관계를 가지고 반쯤 시험을 치르지도 않았던가.
"나한테 너무 모든 걸 떠맡기는 거 아닌가? 그래도 자네 사업체이기도한데, 자네도 직접 움직이는 게 안심이 되지 않을까?"
"일단 버섯, 아니, 식품 쪽은 사장님께 전부 맡긴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전 버섯 생산에만 몰두하기에도 바빠요. 아니면 혹시 힘에 부치신 건가요?"
"아, 아닐세. 그런 건 아니야."
"화이팅. 저는 사장님을 믿고 있습니다. 나중에 재벌 회장님 되시면 꼭 제 건물에 입주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우리가 정이 있잖아요?"
가끔 하수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바로 지금처럼.
전성렬은 헛기침으로 잡생각을 떨쳐낸 후 말했다.
"사실 대형 식품회사에서 연락이 왔어."